〈 58화 〉1부 덫(1)
"김은영 선생님, 사고 났다더니.. 몸은 괜찮아요?"
-아?...네, 괜찮습니다...
교무실로 들어서자 동료 교사들이 은영을 맞이하며 걱정해주었다. 은영이 애써 웃으면서 자리로 들어갔다. 혼이 나간듯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다들 갸웃했다. 차량 사고가 흔하지만 별일 아닌 것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몸도 멀쩡해보이는데 허옇게 질린 얼굴이라니. 그러기도 잠시, 다들 자기 일을 생각해내고는 이내 관심을 꺼버렸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의미 없이 모니터를 바라보고-오늘 수업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타이핑을 하고. 은영은 퇴근하고 배봉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심장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바르게만 살아온 은영에게 배봉과 같은 질 나쁜 사람은 겪어볼 기회는커녕 만나볼 기회조차 없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해지기만 했다.
어느덧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나고 종례 시간이 다가왔다. 은영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 아이들이 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수근대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수근대는 소리가 어제보다 더 짙어진듯 했다- 천천히 교실로 향했다.
은영이 들어서자마자 웅성대던 교실이 언제 그랬냐는듯 조용해졌다. 귀를 채우던 소음이 사라지니 오히려 주변을 살피게 되듯, 은영이 자신을 바라보는 반 아이들을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았다. 웬일로 차분한가 싶으면서도 교탁에 다가가 섰다.
"자, 오늘 하루도 별 일 없었지? 다음 주 부터는 다시 야자 시작되니까, 마음의 준비들 좀 하고. 질문 있는 사람? 없..."
갑자기 한 아이가 손을 든다. 이름이 아마 오기호, 오기호였던 것 같다. 질문? 저 녀석이 어쩐 일로...
"선생님, 어제 야동 봤어요? 왜 잠을 못 잔 것처럼 힘이 없어요? 하하하!"
'..아니 무슨 학생이..'
저게 선생님에게 할 말인가 싶어 화를 내려다가 은영이 생각해보니 어제 자신이 한 농담이 떠올라 분을 삭였다. 참을 인 세 개를 쓰고는 억지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그런거..."
-요즘은 선생님 나오는 야동이 대박이에요 큭큭큭
"아 그 티팬티!"
-너도 봤냐? 그거 완전 쌔끈해요 선생님!
기호의 말을 이어 다른 아이 하나가 웃으며 소리치자 교실이 다시 왁자지껄해지며 소란해진다. 은영이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야동이 한두 개가 아니고, 여교사를 상대로 하는 성적 페티시가 꽤나 흔하다는 것을 은영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티팬티 입은 여교사가 나오는 야동도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선생님'이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들릴까. 왜 자꾸만 지난 주 자신의 치태를 지적하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것일까.
평상시에도 태도가 좋지 않아 손을 놓고 있었던-이번 해가 조용히 지나가기만을 바라게 하는- 아이였는데, 오늘따라 눈빛이 음험해보였다. 은영이 결국 정색하고 말았다.
"...농담을 할게 있고 안 할게 있지. 그런게 성희롱이라는거 모르니?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자. 선생님 이만 간다."
은영이 황급히 정리를 하고 교실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가는데 아이들의 시선이 뭔가 께름칙했다. 단순히 여교사에 대한 호기심이라고만 하기 어려운 그 어떤 어두운-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눈빛.
그래, 마치 영길과 배봉 같았다.
"은영이 화난 눈빛도 존나 예쁘다 씨발!"
-자꾸 떠오르네 티팬티...은영이 보지 존나 따먹고싶네 하...
스마트폰 영상이 돌기 전의 은영이 H고등학교의 꽃이었다면, 지금의 은영은 한 번이라도 기회가 되면 따먹고 싶은 년으로 이미지가 추락하고 있었다.
영길과 배봉에게 시달리면서, 결과적으로는 여성으로서의 성적 쾌락에 눈을 뜬 탓인지 은영에게 은연중에 색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탓도 있었다.
"후우..."
은영의 몸을 가지고 농담따먹기를 하던 아이들 뒤에서 몇 번씩 주먹을 쥐다가도 이내 힘을 빼는 연재였다. 자신도 저들에게 화를 낼 자격은 없었으니까. 저 아이들은 말로만 은영을 희롱했다면, 연재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은영을 직접 범하기까지 했으니까. 무슨 자격으로 자신이 나설 수 있단 말인가. 연재는 자책했다.
다만 마지막까지 자신을 배려한 은영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조금씩 피어오르던 연재로서는 그녀가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이,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주변 분위기가 끈적하게 변해가는 것을 느끼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에게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빠, 나 오늘 회식 있어서...응, 먼저 들어가."
아무리 천천히 정리해서 학교를 늦게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은영이 배봉을 만나러 가야만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오전의 사고 때문에 차를 카센터에 맡겨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하는 상황. '○○성인용품'은 지도어플에도 나오지 않아서 어림짐작하여 대충 근방에 가서 발로 헤매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물론 은영이 배봉에게 연락한다면 '친절히' 안내해줬겠지만 그것만은 죽어도 싫었다.
은영이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미모의 여성이 혼자서 제 발로 들어서는 일은 흔하지 않은 골목에 들어선 은영의 모습은 거리의 부랑배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으므로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사잇길로 들어섰다. 은영이 헤매기를 얼마간, 마침내 익숙한 길목에 들어섰다. 지난 주말 배봉과 영길에 의해 겪었던 굴욕이 떠오르자 은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생각보다 밝은 이 골목에서, 자신은 대체 어떤 꼴로 씹물을 지려댔단...아니 치욕을 당했던 것인지. 수치와 굴욕에 분노해야 하는데 은영의 몸은 오히려 달아오르고 있었다. 남자와 '만족할만한' 관계를 갖지 못해서 그럴까...
은영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선생으로서 연재에게 '노력한다면 잊을 수 있다'고 말한지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하지만 지난밤의 꿈과 오늘 아이들의 질 나쁜 농담, 그리고 배봉의 협박까지. 은영의 정신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일들이 너무 많았고, 몸에 새겨진 쾌락은 아직 잊혀지기에는 너무도 강렬한 기억이었다.
몇 발 내딛자 흔들리는 그녀의 시야에 기분나쁜 네온사인으로 치장된 '○○성인용품'이 들어왔다. 그 옆의 익숙한 '렉서스'도.
[딸랑딸랑]
은영이 조심스럽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흐릿한 조명 아래, 일전에 보았던 기분 나쁜 물건들-노골적인 성행위용 도구와 싸구려 란제리, 야시시한 의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배봉은 보이지 않았다.
은영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데 구석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배봉이 껄렁하게 차려입은 젋은 놈과 소곤거리고 있었다. 한 손에는 조그만 무언가를 들고 있었는데, 둘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연신 히죽대고 있었다. 잠시 후 인기척을 느낀 배봉이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던 은영과 눈을 마주쳤다. 은영이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그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은영 쪽으로 다가왔다. 혹시라도 얼굴이 팔릴까 싶어 은영이 잔뜩 움츠린 채 고개를 돌렸다.
'안돼!'
"올~ 쌔끈한데? 재미 보세요들, 하하"
-큭큭 짜식, 어여 꺼져.
은영에게는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젊은 놈이 그녀를 스쳐가며 흘깃 보더니 씨익 웃고는 바로 가게 밖으로 나갔다. 이제 실내에는 은영과 배봉 둘만이 남았다. 서늘한 공기가 은영을 더욱 위축되게 만들었다. 배봉이 히죽 웃자 은영이 애써 인상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이미 시매부한테도 말씀드렸지만, 이제 더는 못해요. 이쯤에서 그만둬주세요."
-응? 줘남댁, 뭘 그만 한다는겁니까, 우리 좀 서로 즐겁기만 하면 되는건데 말이지 큭큭..
배봉이 실실 웃으며 눈으로 은영의 몸을 훑어내렸다. 역시 죽여준단 말이야. 은영이 보는 것도 아랑곳않고 배봉이 부풀어오른 바지 앞섶을 만지작거렸다.
이 남자는 부끄러움이란건 애초에 없는걸까, 은영이 눈을 찌푸리면서도 배봉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싫어요, 이런 더러운 관계."
-나는 좋은데? 더럽고 말고 할게 뭐 있어, 서로 헐떡대며 섹스하는게 무슨 죄야? 줘남댁 지난번에 제대로 즐기더만 큭큭, 허리 돌려대는게 그냥 타고났다니까. 재능이 있어! 큭큭..
배봉의 이죽거림에 은영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 사람은 말하는 결이 다르다. 정말로 어떤 말을 해야...
"당신들 나 강간한거야! 알아? 내가 고소하면 당신들은 바로..."
-에비 무셔라~ 줘남댁! 나 이미 여자 많이 돌려봤수? 소년원도 다녀오고 빵도 다녀오고. 응? 한번 더 다녀온다고 뭐 달라지겠어? 큭큭
'아...이럴 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