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1부 불안(3)
어떻게든 여행당일의 아침이 밝았다. 입꼬리가 잔득 올라가서는 여행떠날 준비를 서두르는 연수와는 달리 어쩐지 은영과 재준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지난저녁 나름의 가족회의를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수원으로 떠났던 영길은, 아침 8시를 넘기고 있는 지금까지 전화한통 없었다. 친구라는 작자들과 지금까지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게 불보듯 뻔했다.
‘하.. 왜 하필 그 인간이랑.. 강원도까지..’
그렇게 생각하며 은영이 오후에 영길과 함께 강원도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짧게 몸서리를 쳤다.
"후우, 매형은 끝내 아무런 연락도 없으시네"
-얘. 괜찮아. 보나마나 또 친구옆에 붙어서는 아버지 아버지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술이나 들이키고 있을텐데 뭐. 후우. 그나저나 이따가 올케랑 올 거 생각해서 좀 적당히 하고 와야 할텐데.
자신의 차량에 짐을 구겨넣고 있던 재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연수가 슬쩍 은영의 기분을 살폈다.
"그럼 은영아. 이따가 보는걸로 해. 날 더운데 고생하구."
-응. 오빠 걱정하지 말구 먼저 내려가서 있어. 도착하면 연락하구. 어머님하구 언니두 먼저 내려가세요. 연재도.
남편 재준이 피곤함과 미안함이 섞인 표정으로 은영을 내려다보며 말하자 은영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만들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재준이 은영의 손을 꼭잡고 좀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딛었다.
전화기로 영길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연수가 그걸 제지하고 나서는 통에 전화기를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재준이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는, 창문을 내려 은영에게 손짓했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은영이 식구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다다가, 자동차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게 됐을 때, 한숨을 몰아 내쉬며 잿빛을 구겼다.
'후우. 이제부터가... 정말 문제라면 문제구나'
어제부터 시종일관 자신을 둘러싸던 불안한 기운을 애써 억지로 밀어내며, 은영이 시계를 한번 힐끔 본 뒤 천천히 집으로 들어가 학교에 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자흐 일어나흐 마쉬어~!!"
-그게 그러니까 흐흐흐흐. 난 좀 쉴게 흐흐흐
"아니 천하의 유영길이가 그게 무슨? 끅. 아 취한다. 그러지말귀 마쉬어~"
한편 수원 상가집에 가 있던 영길은 벌써 몇 시간째 친구들틈에 껴서는 술자리에 앉아있었다. 고스톱판이 흥건하게 벌어졌던 새벽에는, 고스톱을 치는건지 술을 들이키는건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내 걱정하는 가족들은 진심 한명도 없는건가?'
아침 아홉시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스마트폰을 바라본 영길이, 깨끗하게 '텅하니' 비어있는 배경화면을 잔득 취한 눈으로 뚫어져라 확인했다. 가족은 커녕 그 누구로부터도 전화 한통 없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얼마가지않아 얄궂은 알림음과 함께 화면이 팟하고 꺼져 버렸다.
나지막하게 씨팔을 외친 영길이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여분의 배터리는 챙겨오지 않았다. 답답하고 씁쓸한 기분에 담배 한개비를 꺼내 입에 베어문 영길이, 눈을 감고 폐속 깊이 담배 한모금을 빨아 담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어찌됐든 은영과 단둘이서 강원도로 내려가게 됐다. 후우. 그래선 안되는걸 잘 알고 있지만, 영길은 몇 시간 만에 빨아보는 담배의 쓴 향에 취해, 은영의 쌔끈한 얼굴, 잘록한 허리라인과 더불어 그 풍만하고 육감적인 몸매를 찬찬히 기억해내며 베시시 웃었다.
그 처남댁이 죽여주긴 하지. 죽여줘...죽여줘?
"후우. 에이 그게 그러니까 이 미친놈이 지금 무슨 흐흐흐흐흐"
담배에 붙인 불이 필터까지 다다르자, 영길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물고있던 담배를 멀리 던져 버렸다. 다시한번 시간을 확인한 영길은 슬슬 집에 돌아갈 요량으로 다시 친구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이란 생각보다 간사한 면이 있나 보다. 진즉에 학교에 나와 이런저런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고 있던 은영은, 불과 어제만 해도 비굴하게 몸을 꼬으며 자신에게 부탁아닌 부탁을 던져내던 박선생으로부터 끝끝내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하자, 잔득 빈정이 상해 버렸다.
물론 어떤 기대감에 가득차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고는 해도, 사람인 이상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 올려다본 시계바늘이 정확하게 2시를 가리키자, 서서히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아. 어쩐다. 영길.... 그 사람하고 강원도까지 내려가는건 진짜.. 진짜 싫은데. 후우'
불과 몇 시간 뒤면 영길과 함께 같은차를 타고 가족이 있는 강원도까지 내려가야 한다. 그런 생각에 은영은 지끈거리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세게 눌렀다.
자신에게 할당된 교무를 어찌저찌 모두 해결하고 나니, 벌써 퇴근시간이다. 책상 한 켠에 자리잡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슬쩍 들었을땐, 역시나 아무런 연락도 오질 않았다.
'어제는 신나서 그렇게 말하더니, 정작 아무런 생각도 없는거 아니야? 이 사람?'
연락이라곤 없는 화면을 바라보다 영길의 얼굴을 떠올린 은영이, 몸을 타고 흐르는 '소름'에 몸을 한번 떨었다. 그리곤 영길에게 먼저 전화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자신의 가방을 챙겨서는 퇴근준비를 서둘렀다.
불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먼저 영길에게 전화를 거는건 더더욱 내키지 않는 은영이었다.
집에 도착해 이제는 버릇이 된 것 마냥 현관 앞에서 깊은 쉼호흡을 한번 내뱉은 은영이, 헛기침을 한번 하고선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제일먼저 신발을 확인하자니, 대관절 영길의 신발이 보이질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발장을 뒤져보아도 그 어두칙칙한 영길의 신발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설마 아직 집에 안온거야?"
안심인지 불만인지 모를 말을 나지막하게 입 밖으로 쏟아낸 은영이 구두를 벗고 천천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행여나 하는 마음에 시누이방과 화장실, 그리고 연재의 방을 차례로 노크한 뒤 열어봤지만, 역시나 영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질 않았다. 이쯤되니 은영은 안도나 불안보다는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방으로 성큼성큼 달려간 은영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자신의 가방을 침대위에 팽개치고 스마트폰으로 영길에게 연락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아 진짜 뭐야 이 사람.
은영이 불안한 마음에 영길에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영길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 잔득 짜증이 난 은영이 다시금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 덩그러니 서서 시간을 확인하던 은영이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만두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라.’
애당초 영길과 그렇게 긴 시간동안, 같은 차를 타고 내려가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혼자 버스나 기차를 타고 내려가도 은영으로썬 괜찮은 변명거리가 생길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쏜살같이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들어와 강원도까지 내려갈 준비를 서두르던 은영이, 그 전에 땀에 잔득 젖어버린 자신의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혹여라도 영길이 집에 들어오기전에 서둘러 집을 빠져 나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지만, 그러기엔 몸 구석구석이 너무 찝찝해서 견딜 수 없었다.
시간에 쫓기던 은영이 브라와 팬티 차림으로 -미쳐 벗어놓은 옷가지를 정리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욕실로 달려갔다. 그러곤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옷에 걸치고 있던 얄궂은 천조각들 마저도 순식간에 벗어버리고, 샤워기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