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1부 불안(2)
재준이 회사 선배에게 부탁을 한 날짜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재준은 일찌감치 회사에 휴가를 받아 놓은 상태였고, 은영도 눈치껏 학교에 사정을 얘기하고 시간을 빼놓은 상태였다. 유달리 스케쥴이 없는 연수 내외는 여행일정이 다가올수록 뭐가 그리 좋은지 그저 눈치없이 이것저것 여행도구를 챙기느라 분주해 보였다.
하지만 순탄할것만 같았던 여행은, 정작 여행을 하루 앞두고 보기좋게 뒤틀어졌다.
"네? 박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미안해요 은영씨. 내가 갑자기 상황이 그렇게 됐네. 딱히 부탁할 사람도 없구
"아니요 선생님. 그게 아니라. 아니. 제가 분명히 몇일전에....
-미안해요 은영씨.
여행을 하루 앞두고 학교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던 은영에게, 기러기아빠인 박선생이 다가와 무언가를 부탁하고 있었다. 어쩐지 은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선생은 은영앞에 서서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부탁했다.
"김은영 선생님 정말 미안해요. 내일부터 휴가인거는 알고 있는데, 갑자기 외국에서 마누라랑 애들이 들어온다는데, 딱히 부탁할 사람도 없고. 정말 미안해요. 정말 미안한데, 내일 하루만 어떻게 근무 좀 바꿔주면 안될까?"
-안돼요 선생님!. 이러시면 제가 곤란하죠. 분명히 제가 선생님뿐만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께도 미리 말씀드린건데, 무조건 이러시면..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잖아요. 김선생님. 정말 미안해요. 내일 감독하시는 선생님들 조편성을 봐도 부탁할 사람이 은영씨밖에 없는걸 어쩌겠어요. 미안해요. 이번 한번만 내 부탁좀 들어주면 안될까? 사례는 뭐든 할테니까 김선생~ 제발 부탁이야"
-아이 선생님. 그게..
동료교사가 너무나 절박한 표정으로 은영곁에서 매달려 애원하자 은영도 끝내 곤란한 표정으로 말문을 닫아버렸다. 그런 은영의 표정을 암묵적인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인 박선생이, 은영의 두 손을 꼭 잡더니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돌아섰다.
'아. 당장 내일이 출발인데 곤란하게 되어 버렸네. '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한 은영이 한동안 당혹스런 표정을 짓다가 책상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들어 재준의 연락처를 눌렀다. 그러면서도 불편한 기색을 좀처럼 감출수 없다.
"여보세요? 은영아"
-어. 오.. 오빠.
기분이 좋아보이는 남편의 음성을 듣자, 선뜻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은영은 한숨을 몰아내쉬다 천천히 입을 땠다.
"어. 그러니까 그게. 음.. 후우. 아니야 이따가 집에서 얘기해."
-어? 왜? 무슨일 있어?
"아니야. 오빠 이따가 집에서 얘기하자 우리."
어제와 거의 같은 시간에 집에 도착한 은영을, 재준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맞았다. 은영은 재준을 향해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며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재준이 서둘러 은영의 뒤를 좇았다.
"은영아 무슨 일이야?"
-하아, 몰라 몰라.
방안으로 들어온 은영이 재준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한뒤 그대로 침대위로 쓰러져 버린다. 그런 은영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재준이 침대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앉았다.
"빨리 말해봐. 무슨일인데? 아까 전화받을때부터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야."
-후우.
채근하듯 대답을 촉구하는 남편을 차마 제대로 바라볼 자신이 없어, 한동안 베개 잎에 머리를 묻은채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누워있던 은영이, 겨우겨우 고개를 들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은영의 말이 끝날때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재준은, 굳게 닫힌 입을 쉽게 열지 못한채 은영의 얼굴만 바라 보고 있었다.
"오빠 미안해. 갑작스럽게 일이 그렇게 되어 버려서"
-아니지. 은영이가 나한테 미안할 일은 아니지. 후우. 글쎄 직장생활하다 보면 뭐. 그럴수도 있긴한데..
말꼬리를 얼버무리던 재준이 끝내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한동안 말이 없던 재준이, 먼저 손을 내밀어 은영을 꼬옥 감싸 안았다.
"그나저나 그럼 당장 내일 어떻게 하지? 어머니는 물론이고 누나네 가족들은 하루종일 들떠서는 계속 저러고 있는데. 출발 시간을 조금 늦춰야 하나?"
-아니야 오빠. 그렇게 하면 내가 더 죄송해 지잖아. 내일 학교일정이 빨리 끝난다고 해도 오후 세네시 정도는 되야 할텐데, 평일이라도 그 시간에 강원도까지 내려가는건 너무 빠듯하지. 오빠가 노력해서 얻은건데 나때문에 그럴필요는 없어. 내가 더 미안해지니까.
"집에서 강원도까지 그렇게 오래걸리진 않을텐데. 가족들한테 양해를 구하는편이 낫지 않을까? 조금 늦게 출발하자고 이야기해볼게."
-안된다니까 오빠. 그러지마. 그냥 오빠랑 가족들이랑 먼저 출발하고, 내가 학교 일정 끝나는대로 버스를 잡아타든 기차를 타든 해서 바로 따라갈게. 그게 차라리 나아.
잔득 걱정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던 재준을 은영이 연신 다그치듯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후내내 학교에서 강원도까지 가는 버스편과 기차편을 알아본 터였다. 은영의 자세가 워낙 강경했기 때문에, 재준은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하고 은영과 함께 거실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재준과 은영이 거실로 나갔을 때, 연수의 눈치를 살피던 영길이 기어이 입을 열고 무엇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영길을 보니, 은영이 잔득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게 그러니까. 그래. 재준.. 아니 처남. 그러니까 그게 방금전에 왠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말이야. 갑자기 친구놈 하나가 아버지 상을 당하셨다고 하셔서 말이야. 당장 그놈한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그게 그러니까 또 이게 무시하자니, 또 나름 막역한 놈이라서 흐흐."
-아 그래요 매형? 친구분께서 부친상을 당하셨어요? 그럼 가 보셔야죠.
"어 그런데 말이지."
-예.. 매형!
"흐흐. 그러니까 그게 그놈 집이 수원이라서 말야. 음. 아마도 아버지를 근처 병원에 모신것 같은데. 또 이게 그 뭐냐 막역한 사이라서, 수원까지 내려가면 또 밤도 새고 막 그러면 또. 음. 막상 또 내일 늦게 집에 도착할 것 같아서 말이지."
-아. 바.. 밤을 새셔야 해요, 매형?
"어. 그게 그러니까 이놈하고 그 불알... 아니.. 그러니까 뭐시냐. 막역한 사이라서 흐흐"
돌연 입에서 '불알'이라는 말이 흘러나온 영길이 베시시 웃으며 민망한 표정을 은영을 올려다 봤다. 은영이 그런 영길을 곱게 볼리 없었다. 재준이 그것을 의식하면서 서둘러 다시 말을 이었다.
"아 그래요? 아 그럼 어쩌죠? 매형 상황이 딱하긴 한데. 사실 집사람도 내일 갑작스럽게 근무를 교대하는 바람에 꽤 곤란한 상황이거든요."
-어? 그래? 그 재준이 와이.. 아니 처남댁도?
재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길이 똥그란 눈을 치켜뜨고 은영을 바라봤다. 영길과는 달리 은영은 그런 영길의 눈을 단칼에 잘라 피해버렸다. 그러자 이번엔 잠자코 지켜보던 연수가 말을 거들고 나섰다.
"하여튼.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 인간이야. 그럼 뭐 어떻게해. 올케도 내일 갑작스럽게 시간이 안 되면, 여행을 취소해야 하는건가?"
-아니죠 아니죠 언니. 그래선 안되죠. 처음 떠나는 가족여행인데
연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영이 연수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시매부도 사정이 생기셨고 저도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여러모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도 강원도까지 가시는데 시매부님은 몰라도 저 때문에 여행 스케쥴을 바꾸는건 저도 썩 달갑지 않아요.
그래서 아까 학교에서 강원도까지 가는 차편을 알아보던 참이에요. 그러니까 내일 만약 시매부님께서 일찍 돌아오신다면 시매부님만이라도 기다리셨다가 먼저 같이 출발하셨으면 해요. 저는 학교일정끝나는대로 바로 차편으로 갈테니까요."
-그럼 그러니까 그게. 음. 제가 처남댁과 이를테면 그 뭐냐. 음... 아 그래 '동지'로써 말씀드리는데요.
은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을 잇는 영길을 바라보며, 은영과 연수가 왠일로 거의 똑같은 표정으로 영길을 바라봤다. 동지라니. '가족'의 말이지만 은영은 왠지 속이 조금 매쓰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뭐 저도 오늘 가서 밤을 새면 그러니까 음. 당장 내일 몇시에 들어올지도 모르구요. 그러니까 그게 괜히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저때문에 사랑하는 그 가족들이 기다리는건 저도 좋지 않습니다. 해서 그러니까 그게 처남댁만 괜찮으시다면 흐흐흐흐"
은영을 바라보며 느끼한 미소와 함께 말꼬리를 흐리는 영길을 가족들이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기분이 썩 좋지 않던 은영도,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영길을 내려다 봤다. 그러자 영길이 헛기침을 한번 내뱉은 뒤 말을 이었다.
"그. 그러니까 그게. 연재 학교 근처에, 흐흐. 그러니까, 처남댁 학교 근처에 친구놈 하나가 성인요... 아니 그냥 뭐냐 장사를 하는데, 그놈이 차가 한 대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그러니까 제가 빌려달라고 하면 무조건 빌려줄 놈이라서요 흐흐흐. 뭐 처남댁만 괜찮으시다면 나머지 가족들은 내일 일찍 먼저 렌트한 차를 타고 출발 하시고,
그러니까 그게 '처남댁만 괜찮으시면' 처남댁이랑 저는 친구놈 차로 그 뭐냐.. 그... 그래 후발대? 후발대로 나중에 출발하면 어떨까요? 흐흐흐흐"
연신 은영을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날려대는 통에 매스꺼운 기분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 은영이였다. 게다가 이젠 이골이 나다시피 한 영길의 말투가, 은영의 기분을 심하게 뒤틀리게 만들었다.
잠시동안 말이 없던 재준이, 정적을 먼저 깨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 글쎄요. 무엇보다 은영이 뜻이 중요하긴 하겠지만, 저로썬 매형이 그래만 주신다면 고맙죠."
재준의 입에서 탐탁치 않은 말이 흘러나오자, 은영은 재준을 한번 흘겨봤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눈치가 없을까.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 시누이와 시어머니가 차례대로 재준의 말에 수긍을 하고 나서는 통에, 졸지에 은영은 내일 영길과 목적지까지 함께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말았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상태로 멀뚱멀뚱 서있는 은영을 바라보며, 영길이 연신 싱글벙글 기분 나쁘게 웃어 보였다. 은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 저.. 신경써주시는 시매부님께는 정말 감사드립니다만, 전 역시 기차나 버스를 이용하는 편이..."
-올케. 사람이 왜 그래? 이 사람 무안하게. 왜? 뭐 불편한거라도 있어?
은영이 불편한 기색을 겨우 억누르며 조용조용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데,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연수가 은영의 말을 잘라내며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한동안 평안한 관계를 유지하던 시누이로부터 예기치도 못한 지적을 받자, 은영이 당황한채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러자 그 상황을 그냥 그대로 바로보고만 있을 수 없었는지, 재준의 어머니가 연수의 등을 한번 치면서 입을 열었다.
"연수야. 그만해라. 애미도 심난할텐데. 그래도 애미야.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내일 애미가 여기 유서방이랑 같이 강원도로 내려왔으면 싶구나. 물론 애미가 나름 계획을 잘 짰을테지만, 유서방이 이렇게 먼저 신경써주는데 같이 움직이는 편이 좋을것 같구나. 시간도 절약될것 같고 애미도 그게 더 편할 것 같구"
-아.
시어머니까지 나서서 영길의 편에 서버린 이상, 은영은 더 이상 자신의 의견이 통용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옆에 멀뚱히 서 있는 남편의 얼굴을 한 번 째려보고, 동시에 가족들의 눈치를 살피며 나지막한 한숨을 한번 몰아 쉴 뿐이었다.
이래저래 불길한 기운이 가시질 않는 은영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