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1부 씨앗(2)
빈정이 상할대로 상한 은영은 서둘러 방안으로 들어가 침대위에 가방을 신경질적으로 던져버린다. 조심스레 은영을 따라 들어오던 재준은 아무말없이 그런 은영의 동정을 살피고 서있었다.
"후우 정말..."
-미안하다..
"오빤 이 상황에서도 그저 미안하다는 말뿐이야? 오빠가 뭘 잘못했는데?"
-쉿 쉿 은영아 조용!
혹여나 바깥에서 노모가 들을까 재준이 노심초사하며 자신의 검지손가락을세워 입술쪽으로 가져다댄다.
'하여튼 늘 이런 사람이지. 오빤...'
그런 재준을 쏘아보던 은영이 옷을 겨우 갈아입고 다시금 방을 나선다. 은영이 편한 차림으로 밖으로 나오자 네다섯명 되는 무리들이 이번에 아까보다도 더욱 노골적으로 휘파람을 불어보낸다. 어떤 치는 박수까지 치며 환호성을 보내기도 했다. 은영은 애써 무시하며 천천히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자 남편 재준이 은영을 따라가 말을 건넸다.
"내가 도울건?"
-됐어. 피곤할텐데 오빤 그냥 들어가서 쉬어.
"피곤하긴 은영이가 더 힘들지. 후우 번번히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소리 계속할거면 그냥 들어가줘 응?
"알았어 알았어 화내지마 은영아. 그럼 그냥 옆에 서 있을게."
은영의 눈치를 살피던 재준이 은영의 곁에서 떨어졌다. 은영은 한번 눈을 흘기고는 천천히 냉장고 문을열어 간단히 안주거리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와씨 줘남댁 진짜 쥐기네, 안그러냐 영길아, 내 여기가 껄떡껄떡 선다!"
-이 놈이 미쳤나 그만 닥치고 마셔, 마시라고. 나 쫓겨나기 싫다고 흐흐.
"마셔야지, 근데 술 말고 줘남댁 마시면 안 되냐, 술 말고 줘남댁이 주는 물, 흐르는 물, 지리는 물 그 머시당가 그 있잖여!
-흐흐 이놈이 닥치래도, 주둥아리 확 차버리기 전에 마시라고 흐흐
"영기리 넌 복받았다, 진작에 안 들어오고 뭐했냐, 너도 좋고 나도 좀 좋을건디 좀 뭐 안 해보냐? 크하핳"
-흐흐 한번만 더 헛소리 하면 너 안 본다 흐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은영은 부엌에서 손수 만든 간단한 안주거리를 가지고 거실로 나왔다. 영길과 그의 일행들은 대관절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아까부터 무엇인가 속삭대더니만 은영이 자신들의 곁으로 다가오자 연신 환호성을 질러댔다. 이쯤되니 한동안 그저 묵묵히 지켜보기만하던 재준과 그의 어머니도 불편한 기색을 띄워 보내기 시작했다.
"그럼 재미있게 보내세요"
-에이 줘남댁. 그러지말고....
아까부터 은영을 줘남댁이라고 부르던 치가 기어코 사고를 치고말았다. 안주를 내려놓고 일어서던 은영의 가는 손목을 그대로 낚아챈 것이다.
"어.. 왜 이러세요?"
-꺽. 아니 줘남댁. 뭐가 그리급해? 그러지말고 술이나 한잔 따라봐요.
"왜이러세요.손 놓으세요"
-거 존나 비싸게 굴지말고 크큭
영길의 그것과 어쩐지 느낌이 비슷한 웃음을 입꼬리가 그득히 올라가도록 지어내던 그 치가 기어코 다른 한 손으로 은영의 허리춤을 낚아챘다. 그러자 영길과 나머지 일행들. 그리고 재준이 동시에 은영곁으로 다가가 녀석의 손을 뿌리쳤다.
"야 이 미친놈아. 너 진짜 취했냐?"
-그래. 아니 그게 그러니까 이싱키야 취했냐. 춰남댁 아놔 미안함다.
은영의 허리춤을 낚아챘던 남자가 영길과 나머지 일행들에 의해 은영곁에서 간신히 떨어지자, 은영이 재준의 손목에 의지해 서서는 가녀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재준도 당황스럽고 화가났지만 어쩐지 이런 상황에서도 쉽게 나서려하지 않는다. 그저 영길의 되도않는 사과를 받으며 서 있을뿐이다.
"많이들 취하신것같은데 이제 그만들 하세요"
은영의 시어머니가 노기가 가득한 말투로 한마디하자 영길은 물론 일행들이 일순간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귓전까지 빨개진 은영이 거의 울듯한 표정을 지으며 재준의 손을 뿌리치고 방으로 달려들어갔다. 잠시간 멍하니 서있던 재준도 영길을 향해 간단히 눈인사를 날린뒤 서둘러 은영을 따라 들어갔다.
"야 이 미친놈아. 이게 무슨 무례냐?"
-아니 난 그저...
영길과 친구들이 은영의 허리를 감싸줬던 그 치를 나무라고 서있자니 조금있다가 은영의 시어머니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이 그게 그러니까.. 장모님..."
중간에서 어쩔줄 몰라하던 영길이 그제서야 사태를 깨닫고 부랴부랴 친구들을 밖으로 내몬다.
"영길아. 미안하게 됐다."
-씨바알. 그러니까 그게 이 새끼 땜에 분위기 좆돼고 좋다 아주 그러니까!
"에이 쒸발 내가 뭘 잘못했냐. 술한잔 따라줄수도 있는거지"
-아니 그러니까 그게 이 생키가 아직도 .. 야 꺼져. 내가 어떻게 이 집에 들어왔는데. 에이
"얌마 영길아 그래도 말야"
영길과 일행들이 그 치를 둘러싸고 한마디씩 하자 한동안 맞서고 있던 그 치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영길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니 줘남댁. 허리감촉 장난아니더라. 개미허리야, 개미. 아주 짧은 순간이긴했지만 내 이 손목에 촤악 감기는게 아주 일품이었어. 빨통도 뽕 아니던데!"
-아니 그러니까 이생키가 아직 정신을 못차렸나. 빨리 가라.
"에이 새끼 우리 사이에 뭘 그러냐. 우리가 하루이틀 보던 사이냐. 옛날엔 한여자 돌려먹던.. 그 머냐 그래그래 구멍동서 아니냐. 얌마 암튼 너 새끼 존나 부럽다. 저런 여자랑 같은집에서 산다는것 자체가 꿀꺽. 아 침넘어가"
한동안 신나서 말을 쏟아내던 치를 그저 묵묵히 바라보자니 이 치가 끝까지 하는 행동이 아주 가관이다. 아직도 그 짧은 순간의 '유희'를 되새겨 보려는지, 이제는 영길 앞에서 두 눈까지 질끈 감고서는 우락부락한 두 손바닥을 허공에 곧게 펴서는 무언가를 주물럭 거리는 모양새를 만들고 서 있다.
"아 니네 줘남댁... 엉덩이 촉감도 아주 죽여줄거야. 그지? 크기도 딱 적당할것같고. 저 허리에 저 엉덩이면 분명히 쪼임도 좋을텐데. 아 맞다 예전에 니가 선생이라고 그랬나? 너희 줘남댁. 이야 애새끼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아 진짜 간만에 학생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진다. 존나 열심히 학교 다닐 자신 있는데. 선쉥니임! 존나 따먹고 싶은 선쉥님! 내 고백을 받아줘요! 내 자지도 받아주고! 크흐흐흐"
-아 그게 그러니까 알았으니까 빨리 가라 이제.
"줘남댁이 담임이면 빨통, 아니 우유 존나게 열심히 빨아 먹을텐데! 영길이, 그래서 언제 딸거냐? 응? 우리가 친구 아니냐 친구. 친구 좋은게 뭐냐고. 응? 나도 좀 응?"
-아 닥치고 가! 빨리 꺼져 흐흐
"으흐흐흐 영길이 아주 혼자만 따묵을라고 이 이기적인 쉐끼"
-흐흐 개소리 말고 좀 꺼져주라 흐흐
치가 쏟아내던 말들을 줏어듣던 영길이 강제적으로 치를 돌려세우며 술자리에 있던 일행들을 집으로 보낸다. 일행들이 모퉁이를 지나 보이지 않게 되자 영길도 발을 돌려 집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들였다. 그러면서도 그 치가 방금전까지 쏟아냈던 말들을 떠올리자니 왠지 자신의 남성이 불끈불끈 해 지기에, 손으로 한번 한번 꼬옥 쥐어보며 이내 비릿한 웃음을 날렸다.
"은영아. 화 많이 났지 미안해"
-하아 진짜 분해. 흑..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은영이 침대 위에서 각티슈의 휴지 한조각을 꺼내 눈물을 훔치고 있자니 재준은 그저 발을 동동 굴리며 은영의 곁에 서서는 으레 그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보기에 따라서 대단한 직업이 아닐수 있을런지도 모르지만 은영은 자신이 하는일에 대해 적지않은 자부심을 가지며 살아왔다. 그런데 인생의 낙오자같은 놈들에게 술심부름과 더불어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치욕을 당한 것에 대해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손이 허리만 감싼게 아니라 분명 가슴에 닿았어, 의도적이었어. 더러워.'
"은영아 미안..."
-됐어. 됐다고. 오빤 정말 계속 미안하다는 말밖에 못해?
"....미안 정말 할말이...."
-됐다고..
은영이 영길 일행에게 받은 수모를 남편에게 쏟아낼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애미야.."
-!
아까의 일이 걱정되었는지 재준의 어머니가 재준의 방을 찾았다.
"애미야. 정말 내가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흑.. 아니에요 어머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니야. 내가 정말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지. 그래도 애미야. 부족한 내가 이렇게 부탁하마. 연수 남편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 애미 니가 오늘일은 이해해주고 넘어가주렴. 정말 미안하다 애미야"
재준의 어머니가 은영의 하얀 손목을 잡고 거의 울며 바닥에 주저앉아 은영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은영의 화도 조금은 누그러지는듯 보였다.
"저 그러니까 그게..."
하지만 어느틈엔가 집안으로 들어온 영길이 재준과 은영. 그리고 장모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며 은영의 방문 옆에 쭈뼛쭈뼛 서 있었다. 은영은 영길을 쏘아봤다.
"장모님. 그라니까 그게 재준이랑 재준이 와이프분께는 정말 그러니까 드릴 말씀이 업습니다. 죄송합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문밖에 죄인마냥 서있는 영길에게 은영의 시어머니가 다가가 말했다.
"재준이 안사람한테는 내가 자네 대신 사과했네. 오늘일은 자네도 자네 친구분들도 조금 과했다는거 알고있지?"
-예 그러니까 그럼요 장모님
"늦었으니까 더 긴말은 하지 않겠네. 오늘일은 자네 입장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이쯤 해두도록하고 연수 방으로 가서 그만 주무시게. "
영길의 장모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영길에게 고스란히 내뱉고는, 영길의 곁을 지나 방으로 사라졌다. 하지칸 정작 영길은 그 자리에 서서 쭈뼜거리고 있었다.
"그래요 매형. 늦었으니까 일단 그만가서 좀 쉬세요"
-어 그러니까 재준이 볼 면목이 없구만. 그게 재준이 와이프도 그렇고.
"처남댁이라고 불러주시겠어요?"
은영이 앙칼진 목소리로 영길에게 따지듯 말하자, 영길이 흠칫 놀라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을 받았다.
"네 그러니까 처남댁한테도 죄송하구요 그게..."
은영이 한동안 영길을 쏘아보다 침대 위의 이불을 덮고는 돌아 누워버린다. 이에 재준이 영길에게 다가가 간단한 목례를 전하며 방문을 닫았다. 한동안 굳게 닫힌 재준의 방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영길은 천천히 연수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짧지 않았던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