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1부 가족(2)
"그게 전화로, '집에 들어와서' 살고 싶다고..."
재준의 입에서 이어진 말은, 은영에게 있어선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지난날 시어머니가 그렇게 간곡하게 부탁할땐 매몰차게 거절하더니, 왜 이제와서 들어오겠단 말인가? 은영은 내키지 않는건 매한가지지만 차라리 사업자금 명목으로 몇푼 더 얹어주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했다.
"이제와서 그러고 싶다고 하디?"
-....예. 아무래도 연수 누나도 매형도 조금 지친것 같고... 또 두분다 이제 나이도 있으시고
재준이 하는 말은 어느정도 사실이었다. 재준의 어머니가 연수를 낳고 10년도 넘게 지나 재준을 낳은 탓에 재준과 연수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나이차가 존재했다. 은영이 시누이로써 연수를 조금은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조금은 있었다.
재준은 끝내 말꼬리를 흐리며 은영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재준은 어머니의 결정을 기다렸다. 시어머니의 결정을 기다리는건 은영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다분히 서로 '다른 기대'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듯 보였지만.
얼마간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시어머니가 천천히 운을 떼기 시작했다. 동시에 재준과 은영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을 꼴깍 삼켰다.
"가까운 시일에 집으로 한번 찾아오라고 전해주겠니? 재준아."
노모의 말이 끝나자 은영의 안색이 급격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예상은 했다. 재준과 꼭 닮은 시어머니가 쉬이 자식을 내팽겨 치는 일따위 하지 못할 것 이라는 것 쯤. 은영은 시어머니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의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할 얘기가 그거였어?"
저녁식사를 마치고나서 연신 은영의 표정을 곁눈질로 살피던 재준을 조금 쏘아보며 은영이 말했다. 침대 위에 누우려던 재준이 다시금 미안한 기색을 가득 내보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게 됐다. 은영아."
-뭐가?
"그냥.. 이것저것 다."
남편의 미온적인 태도에 조금 화가난 은영이 화장대 앞에서 자신의 얼굴에 바르고 있던 화장크림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으며 나지막하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오빠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지 않아? 난 솔직히 사람으로써 이해가 안가. 어쩜 사람들이 그래? 어줍짢은 사업 한답시고 꼬빼기도 안보이다가 어쩌다가 한번 집에 찾아와서는 '돈내놓으시오'하면서 협박하던게 하루 이틀이야?
그리고 이번에도 그래. 무슨 진짜 대박 사업이니 어쩌니 하면서 오빠랑 나랑, 그리고 시어머니 쌈지돈까지 뜯어간게 겨우 1년전이야. 그런데 그새 그 돈을 다 썼대? 그러고선 무슨 염치로 연락을 해선 집에 들어오겠다고 하는건데? 아무리 오빠 누나라지만, 나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어."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을 쏘아붙이던 은영을 바라보는 것이 힘들어 재준은 또다시 고개를 숙일 뿐이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은영만큼 재준도 화가 나는것이 사실이긴 했다. 유일한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번번히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누나 '연수'를 나몰라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은영의 눈치를살피면서 돈을 내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디 성격이 둔할 정도로 착해빠진 재준은 늘 그런 연수를 미워하기 보단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보곤 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재준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없는 재준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일까. 은영은 잠시간에 하던 것을 마무리하고는 재준에게 손을 건넨다.
부드러운 성품이 이런 데서는 탈이지만 평생 같이 갈 남자로 택한 것은 자신이므로. 재준의 어깨를 짚고 조용히 입을 맞추고는 재준과 눈을 마주한다.
재준과 은영은 밤일을 자주 치르는 부부는 아니었다. 결혼 전에도, 그리고 부부가 된 후에도. 교회에서 만났기 때문이어서인지 아니면 학창시절의 풋풋한 기억 때문인지. 그러나 재준은 감사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은영이 내게 온전히 모든 것을 맡겼음에. 그녀가 외로움과 경계심 때문에 주위와 거리를 두지 않았다면 은영이 이렇게 자신에게 오는 일은 없었으리라.
교회 남자들의 질투어린 시선을 받고 학창시절 긴장을 달고 만나던 그 고생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만큼 침대 위 은영의 몸은 아름다웠다. 이제는 익숙해질만도 하건만 청초한 얼굴 아래 목선으로 이어지는 하얀 피부의 육감적인 나신은 여전히 재준을 숨막히게 만든다.
은영은 스스로가 얼마나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인지 알고 있을까. 자신이 은영의 첫 남자이자 마지막 남자라는 사실이 재준에게는 믿음의 증거와도 같았다. 풍만하다는 말도 부족한 가슴 한 쪽을 손으로 부여잡아 본다. 잠시 은영의 얼굴을 보다가, 이내 분홍빛 젖꼭지에 혀를 대어본다. 은영이 꿈틀거린다. 재준은 이 순간이 좋았다.
가슴을 얼마간 어루만지다가 재준이 몸을 아래로 향한다. 작은 숲을 지나 골짜기 안의 작은 틈새. 투명한 점액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다. 은영의 성격과도 같은 것인지 부끄러움이 많은 그곳을 잠시 바라보다가 재준이 마침내 은영 위에 몸을 실었다.
은영은 재준이 포근하게 감싸주는 이 행복감이 좋았다. 다른 이들의 관계는 격렬하기도 하다는 것을 얼핏 들어보기는 했으나, 이것 또한 사랑이라 생각했다. 부끄러운 몸이지만 사랑해주는 재준이 고마웠고, 재준의 체온은 아까의 격한 감정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다.
돌아오는 주말밤에 재준으로부터 어머니의 '전언'을 전해들은 연수가족은 마치 기다리던 답변을 얻어냈다는 듯이 뻔뻔하지만 당당하게 자신들의 짐가지를 싸가지고 재준의 집으로 들어왔다.
늘 그렇듯 미안한 기색이라곤 좀체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떳떳하게 발을 들이는 시누이와 그의 남편을 맞으며 은영은 혹여나 자신의 뒤틀린 심사가 얼굴에 가득 드러날까 조심 조심하며 형식적으로, 다분히 형식적으로 새로운 가족을 맞이했다.
은영이 시누이 가족을 볼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그래봤자 놀랍게도 자신의 결혼식과, 돈을 구걸하며 재준의 어머니께 거의 버선발로 닥칠때 몇 번 본 것이 전부다- 놀랍도록 똑같다.
'기분 나빠'
"아이구, 재준이 이거 미안하게 됐네 그려. ㅋㅋ 당분간 신세좀 져야겠어"
-아니에요 매형.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남의집 오셨나요. 어서 들어오세요
"큭.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구. 이야 재준이 와이프분은 더 예뻐지셨어요. 캬 볼때마다. 캬아.."
-예? 예..
연수의 남편이 고이 그 실지렁이 같은 눈매를 흘려대며 은영을 위 아래로 훑어내자 은영이몸서리를 치며 대꾸한다. 직업이 직업인탓에 '시매부님. 이 상황에선 재준이 와이프가 아니라 이렇게 이렇게 부르는 거랍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매달렸지만, 은영은 그만두기로 한다.
결혼식에서부터, 바빠서 정신이 없던 그 와중에도 시매부란 사람의 시선은 그리 깨끗하지 않았다. '가족'의 품으로 맞이하는 자리지만 저 사람은 과연 나를 '가족'으로 보는 것일까 싶은 그런 의구심, 불안감. 애써 잠재워본다.
"인간아. 실없는 소리하지말고 빨리 들어가"
-아이 알았어. 그 사람 참. 큭큭
현관에 선채로 한동안 은영의 몸을 기분나쁘게 쳐다보던 남편을 꼬집으며 연수가 남편과 은영을 번갈아 흘겨본다.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든 은영이지만, 그저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아참. 연재는요?"
남편의 입에서 뜻하지 않은 이름이 흘러나오자 은영은 옆에 서 있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한다. 연재?
"아. 문밖에 있어. 얘가 사춘기라 낯을 가려 요즘. 야! 연재야! 유연재! 들어와! 할머니랑 삼촌한테 인사드려야지!"
시누이가 문밖을 향해 소리치자, 은영은 얼어버린 몸을 겨우 가누고는 천천히 드러나는 실루엣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그 실루엣이 완연한 모습을 현관등 밑에서 드러내자 환한 불빛에 반사되어 경직된 채 고정되어버린 4개의 눈동자가 마주한 채로 한동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 어.."
-서... 선생님.
재준과 시누이 내외가 연재와 은영을 번갈아 가며 바라본다.
재준의 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채 용서아닌 용서를 빌고 있는 시누위 가족을 지켜보고 있자니, 재준과 같이 착하기만 한 재준의 어머니가 결국 딸자식앞에 미끄러지듯 쓰러지며 부둥켜 안고 만다.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은영의 불편한 마음도 조금은 풀어짐과 동시에 끝내 가시지 않은 당혹감에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쓸려 버렸다.
'이런 바보같은. 어떻게 시누이 아들도 몰라보니. 아무리 몇 번 본적 없다지만. 하 김은영. '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은영은 연신 자신의 손톱을 깨물어본다. 사실 어느정도 납득은 가는 상황이었다. 시누이의 아들이라고 해 봤자 재준과의 결혼식, 그러니까 4년전 자신의 결혼식에서 한번 본 것이 은영으로서는 사실상 전부였다. 추석이나 설날과 같은 명절때 시누이 가족이 사업을 핑계로 찾지 않은탓에, 그리고 돈이 아쉬우면 내외가 부리나케 달려올 때도 아들은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은영으로선 스스로 '문제아'라고 연재를 어찌되었든 '규정'해 버린 탓에 학적부던 무엇이든 자세히 살피지 않은 것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에 대해서만 괴로움을 느끼는듯 보였다.
'후우. 그래도 뭐 어짜피 실수라고 할 건 없었으니까.'
그렇게 자신을 설득시킨 은영이 역시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연재를 힐끔 바라본다. 거의 사색이 되어있는 듯한 연재의 표정으로 말미암아, 은영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한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인듯 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연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은영을 만난 것이 4년전 꼬맹이였을 때였으니까. 그 나이 또래의 2차 성징이 으레 그렇듯 인상도 변해버렸으니 자신이 모를만 했다고 합리화를 해본다. 연재도 몰라봤으니 자신이 알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6명의 식구가 식탁앞에 모여 앉았다. 1년 남짓하는 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가 식탁 위에서 쏟아지는 주제의 전부인 듯 보였지만, 그보다도 가관인것은 연수의 남편이라는 작자의 태도였다. 정말 며칠은 굶은 사람마냥 게눈 감추듯 벌써 몇 그릇째를 비워내고 있다. 사실 은영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제일 상대하기 껄끄러운, 아니 마주치기 조차 싫은 쪽은 자신의 시누이인 연수나, 같은 반 제자인 연재가 아니라 아주버님이라고 할 수 있는 -형식적으로나마 그렇게 불러야만 하는- 바로 이 작자였다.
껄끄러운거야 사실 매한가지긴 해도 시누이는 이 가족의 피를 조금은 '얻어 받았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어딘지 날카로운 인상과는 달리 착한 면도 조금은 느낄 수 있는 사람이긴 했다. 반면 공식적으로 '시매부'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라곤 -딱히 관심조차 없긴 했지만- 올해 40이 된 자신의 시누이와 두세살 정도 터울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비해 턱없이 늙어보이는 그의 얼굴은 어딘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하는게 사실이었다- 느낌이긴 하지만, 벌써 몇번이고 자신을 볼때면 왠지 기분나쁜 시선을 -다분히 성적인 면에서, 음흉해 보이기까지 하는- 깊숙이 자신에게 던진다는 것 뿐이었다. 사실 은영에게 두 그릇 째를 비우고 세 그릇 째를 비릿한 미소와 함께 부탁하는 '시매부'라는 작자의 표정역시 어딘가 기분나쁜 그것이 잦아들기에 충분해 보였다.
식탁에 모여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자니 은영의 머릿속에 '연수'내외가 지난 1년간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그림이 조금씩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치부가 들어나지 않길 바라는 말투로 이리저리 돌려대며 말하고 있었지만, '시매부'라는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순한 '거짓말'이나 '포장'따위를 걷어내자니 한가지 사실이 고개를 내민다. '도박'
은영은 마음속으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쉰뒤 자리를 일어서는 가족들과 함께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식사하는 내내 자신의 표정을 살피던 재준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지만, 최소한 지금만큼은 자신의 남편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다. 그저 신경써야 하는건 앞으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보살펴야할 식솔이 2명, 아니 3명 더 늘었다는 것과, 그 중 한명은 신경이 거슬릴 정도로 왠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었다. 가족, 가족... 그래도 가족이니까.
얼마후 은영이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자니, 자신의 등 뒤에서 어둑한 그림자가 보여진다. 은영이 '설마' 하며 조금은 경직된 표정으로 놀라 고개를 돌린다. 아니나 다를까. 연수의 남편 '영길'이 어느새 은영의 뒤에 서 있었다.
"무.. 무슨 일이세요?"
-큭. 아 이거 고생하십니다. 괜히 저희 때문에. 큭. 이것참 본의 아니게
은영은 마주하기 힘든 영길의 어딘가 비릿한 얼굴 표정을 바라보며, 애써 태연한척 하려 무던히 노력했다.
"아.. 아니에요. 가.. 가족이잖아요. 마음 쓰지 마세요"
-큭.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너무 감사하지요. 참 근데 놀랐어요. 우리 아들이 그래 재준이 와이프분 제자일줄은 근데. 참 뵐때마다 느끼는거지만 참 이쁘십니다. 그래 큭큭
"네?"
-아. 칭찬입니다 칭찬. 아 근데. 큭. 아 그럼 마저 수고하세요
영길이 비릿한 미소와 함께 은영으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입밖으로 새어 나오는 구취에 어쩐지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저사람 저렇게 말이 많았던가? 참 근데. 참 근데. 요상한 말버릇에 어쩐지 말에 논리력이나 개연성도 다분히 떨어져 보인다는 생각에 은영은 잿빛을 구겼다. 여전히 자신을 '재준이 와이프'라고 부르는 그의 '몰상식'에 대해 이 나라의 국어 선생으로써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은영은 눈을 한번 질끔 감았다가 이내 그만두기로 한다.
이윽고 다시금 고개를 돌려 은영이 나머지 설거지를 계속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영길은 고개를 다시금 빼꼼히 돌리며, 그런 은영의 뒷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맛을 다신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게, 연수 내외가 재준의 집에 들어온지도 벌써 한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은영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우려했던것 과는 달리 딱히 연수 식구들과 지내는 일에 있어서 불편한 일은 없었다. 아니 생각보다도 더 '무난한' 시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이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연재는 재준의 집으로 들어온 이후로 학교에서 은영을 마주칠때면 왠지 은영을 피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 은영도 마찬가지였다- 보름의 시간이 흐르자 처음에 느꼈던 그런 낯선 감정도 차츰 수그러 드는듯 보였다. 집에서도 우려와는 달리 시누이 내외가 문제를 일으킨다거나 하진 않았다. 왠일인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행동하는 듯 보이는 시누이 내외 덕분에 은영은 그래도 차츰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는 '가족'이라는 단어가 만들어내는 포근한 감정에 차츰 젖어들기 시작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은영의 시어머니가연수 내외를 '거두어 들이면서'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는 것이었다. 우선 하나는 더 이상 동생 내외에게 경제적으로 손을 내밀지 말것. 그리고 두번째. 사위인 영길은 도박은 물론 당분간 음주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 뭐 압축해서 열거한다면 이 두가지 조건을 내걸고 집에 머물수 있게 했다. 영길은 무조건 알겠다 그렇게 하겠다며 '장모'앞에서 빌고 또 빌었지만, 재준은 물론이고 은영까지 그런 그의 모습을 어찌되었든 처음에는 신뢰할 수 없음에 당연했다. 하지만 보름이라는 시간동안 어찌되었든 조금은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시누이 가족의 모습에 차츰 '안도'와 비슷한 감정이 재준내외에게 잦아들기 시작했다.
은영으로썬 사실 영길이나 시누이만큼이나 연재쪽도 부담스럽긴 매 한가지였다. 그것은 필시 좋든싫든 자신의 가족을 알아보지못한 도의적인 책임과 부족한 자신의 교사로서의 책임이 맞물려 만들어낸 당혹감이었다. 사실 재준과 몇 년을 같이 살면서 시누이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몇 번 듣긴했지만-이마저도 자신의 가족얘기를 꺼내려 하지 않는 재준의 탓으로- 은영으로써도 항상 흘려듣기 일쑤였다. 그러니 시누이 가족의 자세한 상황 따위 머리속에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그날 밤 반쯤 굳어버린 얼굴로 시누이 가족을맞아들인 이후 한동안 은영을 고민하게 만든 것도 사실은 연재에 대한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며칠 간 같이 지내본 끝에 연재에 대한 은영의 감정도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학교에서 상담차 연재와 얘기를 나눈 끝에 -사실 이마저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음이라- 은영은 학적부로 인해 연재를 조금은 오해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재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정학사유는 -그러니까 다분히 표면적인 이유는- '학생들간의 패싸움 가담'이었다고 한다. 헌데 이게 억울한것이 자신은 애시당초 싸울 생각이 없었는데 단지 같은학교학생이라는 이유로 반 친구들에게 불려나가게 되었다는것이다. 은영으로써는 연재의 말에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쏘아 보냈지만 점차 연재가 조금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시누이 가족이 들어온 이후 다시금 꼼꼼히 읽어본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연재의 생활기록부는 사실 매우 평범했다. 그러니까 패싸움으로 정학을 먹은 학생의 그것치고는. 1학년때는 성적도 꽤나 우수한 편이었다. -시누이 내외를 떠올려본다면 차라리 기적에 가까운 성적이라고 해도 좋으리만큼- 하지만 단지 패싸움에 가담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물론 연재의 진의는 아니었지만) 가장 중요한 고교시절의 한켠에 정학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데에 대해 은영은 담임으로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가족으로서' 연재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연유로 연재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가슴속으로 어떠한 각오를 새겨넣는 은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