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화 〉1부 가족(1) (2/109)



〈 2화 〉1부 가족(1)


"어머님 다녀올게요"


은영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출근 준비를 끝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딱히 정해져 있는 일상에서 크게 빗나가는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건만, 은영은 그저 하루하루가 고맙고 즐겁기만 하다.

생각해 보건데 남들이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어쩌면 딱 '그만큼', 남들만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은영은 생각했다. 4년 간 자신에게 시집살이 한번 시킨적 없는 너무나 고마운 시어머니, '박봉'이긴 하지만 가장으로써 맡은 책임을 불평없이 묵묵히 다해주는 착한 남편까지 벌써 몇년째 맞이하는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건만, 오늘도 여느때와 같이 남편과 출근 준비를 서두르는 은영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단지 아직까지 자식이 없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은영의 나이가 8살때, 그리고 10살  차례로 운명을 다하셨다. 유일한 혈육이라고 보아도 좋을 '이모'의 손에서 자랐지만, 이제 겨우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된 소녀에게 부모님의 부재는 쉬이 감당해내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가 친구 손에 이끌려 우연히 나간 '교회'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학창시절부터 쭈욱 연애를 계속한 끝에 지금과 같은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두살 터울인 남편과 결혼할 당시의 은영의 나이가 조금은 어리다고 할 수 있는 22살에 불과했으니, 은영의 마음속 한켠에 가족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가득 자리하고 있었을지는 이로써 미루어 짐작할  있으리라.


간단하게 인사를 마치고 남편과 함께 집밖으로 나와 시간을 확인해 보자니 8시 10분전.

자신의 일터인 H고등학교로 향하자니 조금은 빠듯한 감이 있다. 지체할 겨를이 없어 은영은 서둘러 발걸음을 내딛는다.

다행이라면 평소 때처럼 교통이 혼잡하지는 않다. 남편을 회사까지 데려다주는  시간대에는  '전쟁'과도 같은 힘겨운 싸움을 치뤄내야만 하지만 오늘은 왠일인지 도로상황이 조금 여유롭다. 남편의 직장과 은영이 교사로써 몸담고 있는 H고교의 거리가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는 점이 어쩐지 항상 자그마한 위로가 된다.




"은영아. 힘들지?"

-음?



도로를 얼마간 달리자 보조석에 앉아있던 남편 재준이 미안한 얼굴과 함께 말을 걸어온다. 어떤면에선 남들은 조금 믿기 어려울수도 있지만 이런 가정일이나 그 외의 잡다한 일들은 순전히 은영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들이다. 그것은 일찍 가족을 잃었던 은영의 인생이 자신 스스로에게 가져다준 작은 소망이었기도 했고, 동시에 은영 스스로가 당연히 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는 소명과도 같은 일들이었다.


은영의 입장에선 보잘것 없는 자신을 언제나 아껴주고 감싸주는 재준이 그저 고맙기만 하지만, 때론 너무 착한 재준의 성격이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질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오빠. 또 그런다. 내가 정말 원해서 하는 일이라니까?"


-그래. 알았어.  미안해서. 후우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던 재준이 짧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은영의 그것과 어쩐지 비슷한 느낌의 웃음을 띄워 보낸다.

자신의 학교와 10분거리에 있는 재준의 회사에 도착하자 은영은 조용히 차를 세운다. 동시에 재준은 서둘러 가방을 챙기며 차에서 내린다.



"오빠. 그럼 이따가 봐!"

-어 그래. 아참 은영아!

"응?"




인사를 건네며 바삐 차를 돌리려던 은영을 재준이 잡아세운다.





"미쳐 말 못했는데, 음. 아 아니다. 나중에 저녁식사하면서 얘기해도 될 것 같네."


-얘기? 음. 무슨?


"아. 아니야. 지금 바쁠테니까 이따가 얘기하자. 그래도 되는 얘기야"

-후우. 알았어 오빠. 이따가 해도 되는 얘기면 이따가 하지 뭐. 좋은하루!





차를 돌려 회사로 나아가는 은영의 차를 한동안 바라보던 재준은 서서히 자신의 회사 건물 안으로 발을 들여 놓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한달음 한달음 내딛는 재준의 발걸음이 어쩐지 조금 무겁게 느껴진다.






학교에 도착한 은영이 서둘러 차를 주차시키고, 눈치를 조금 살피며 교무실 안으로 발을 들인다. 딱히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으레 그렇듯 '꼬장꼬장'한 대머리 김현식 교감에게 한소리 들을까 걱정하는 눈치다. 다행히도 대머리 교감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음을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자신의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김은영 선생!"




여느때와 틀림없이 카랑카랑한 쇳소리가 은영의 이름을 불러내자 은영이 짐짓 놀라며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형광등에 비쳐 유난히  '반짝'이는 교감의 머리가 은영을 반긴다.





"네... 네 교감선생님.."


-참나. 아니 김선생!  찔리는거 있습니까? 사람이 부르는데 뭡니까? 그 사색이 되버려서 질렸다는 풍의 표정은?"

"네? 질리다니요. 그런 말씀.."

-참나... 됐고. 잠깐 이리로  봐요



선배로서 후배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것일까. 김현식 교감은 은영이 부임한 2년전부터 항상 그런 식이었다.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사람, 그리고 그것이 삶이 되어버린 사람. 무언가 일이 있을 때면  스트레스는 항상 아랫사람에게 향했고, 은영의 기억에 비추어보면 가장 만만한 20대 여교사에게 향했던 것 같다. 때로는 불만과 함께 섞인 묘한 시선이 있어 외면한다고 생각을 깔끔하게 털기도 어려웠다. 평범한 일상의 잡티 같은. 생각을 더 이어가봐야 자신만 피곤함을 알았기에 은영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일까.


뒤돌아서서 자신의 자리로 향하는 교감을 은영이 자신의 자리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서며 뒤따른다. 은영이 교감의 곁에 가서 서자 교감이 두꺼운 안경테를 자신의 콧잔등까지 내리깔며 은영을 올려다본다.





"김은영 선생. 오늘 선생님 반으로 전학생 한명 오는거 알고 있어요?"


-아 예?. 아..





은영은 교감의 말을 듣고 아차 싶었다. 몇일전쯤에 대충 전학생에 관해서 얘기를 전해듣긴 했는데, 이런저런 일에 치이다 보니 미쳐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아 예? 라니요. 정신이 있습니까? 휴우. 하여튼 김선생. 언제까지 내가 하나하나  챙겨줘야 합니까? 담임씩이나 됐으면 말이에요......"

-..............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엄연히 직장인 이 곳에서 자신의 상사인 교감으로부터 이런식으로 한 소리를 들을때면 딱히 기분이 좋을리 만무하다. 그저 마음속 깊이, 이 장중한 의식이 빨리 끝나고 끝나기만을 바라고 또 바랄뿐이다.






"어쨌든 조금 있으면 전학생 올테니까 김은영 선생이 수습 잘 해 주시고. 요즘 또 사회적으로 학생들 관련한 문제들이 말썽이라면 말썽이니까 그건 그거대로 김은영 선생이 알아서.............."


10분간 계속된 대머리 교감의 일장연설이 끝났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2막이 시작됐다. 은영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벌써 자신보다 몇년앞서 교직에 들어선 거대한 '선배'의 연설을 묵묵히 들어나간다. 아마도 교감의 시선은 자신의 몸을 가끔 훑어보고 있겠지만, 어디나 그렇듯 중년의 마지막 찌꺼기이겠거니 한다. 시끄러운 것보다는 조용하게, 그리고 느린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빠른 것이 낫다.



대머리 김현식 교감의 연설은 그 후로도 10분이 더 지나서야 끝이났다. 피곤한 몸을 가눌 겨를도 없이 동료 교사들과 함께 아침 교무회의를 마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내쉬자니 은영은 이제야 겨우 살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후우 끝났구나. 아니지 이제 시작이구나.'



은영은 잠시간 눈을 감고 이제야 겨우 자신에게 찾아온 자유의 기쁨을 누려본다.



"김은영 선생!!!!"



이 세상에 자신의 기쁨과 행복을 깨지길 바라는 자가 있다면 -그것도 아주 간절히- 그것은 필시 저기 빛나고 있는 대머리 영감일거라 생각하며 은영이 거의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니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습니까? 예? 내가 지겨워요? 내가 지겹습니까? 아니 말이야. 요즘 선생들은 도대체가 개념이 있는 겁니까? 아니  어려운 임용고시 패스해서 들어오면 끝이에요? 사람말이 우습습니까? 아니 말이야....................."


-......................


은영은 그저 고개를 조아리고 다시한번 묵묵히 교감이 쏟아내는 말들을 주워들을 뿐이었다. 몇분간이나 계속된 교감의 말들이 더 이상 자신의 귓가에 맴돌지 않게 되자, 은영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김은영 선생.. 내가 지켜볼거에요. 음? 아니 말이야. 후우. 뭐 암튼 이만하기로 하고, 아까 말한 전학생 왔단 말입니다. 전학생!"

-아!



교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은영은 교감의 눈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옮긴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 싶은  학생과 눈이 마주친다. 언제 들어왔지? 피곤한 탓인지 잠시간 정신을 잃은 틈에 들어왔나. 이런 생각보다도 은영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가득 채워버리는 단어는 그저 하나 뿐이다.


'쪽팔려.....'



학생과 마주한 눈을 힘겹게 거둔 은영은 자신을 향해 그 가는눈을 쏘아대는 교감을 뒤로한채 터벅터벅 자신의 책상으로 향한다. 어쩐지 아침에 재준이 자신의 회사로 발걸음을 옮긴 그것과 비슷해 보이는 걸음이다.






"여기에 앉으렴."

-네.




자신의 자리에 돌아와 학생과 마주한 은영은 겨우 마음을 추스린채 천천히 학생을 살핀다.


"혹시 부모님은 같이 안오셨니?"

-예? 아예. 두분 모두 바쁘셔서요.


"아 그래? 후우.. 음..

-역시 부모님과 같이 왔어야 했나요?

"음? 아니 아니. 꼭 그런건 아닌데, 보통 전학생들은 아버님이든 어머님이든 한분과 같이 오시곤 하거든.  상관없어 신경쓰지마"

-네.



'후우 그도 그럴게...'


학생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은영은 머릿속으로 얼마전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는 학생의 학적부를 그려내 본다.

성적은 보통이었던 것 같고, 딱히 교우관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다만 걸리는건 하얀 종이위에 잔인하게 흩뿌려진 '정학'이라는 두 글자. 학생을 대하면서 그 어떤 선입견도 가지지 않으려고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말을 하고 다짐하는 은영이건만, 그도 사람인탓에 그것이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리라. 그저 학군 내에서도 성적이 하위권에 속하는 자신의 학교에  한명의 '문제아'가 전학을 왔구나, 뭐 이를테면 그와 비슷한 생각 뿐이었다.

부임 3년차, 이런일에 익숙하다면 익숙한 은영은 자신의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리라 잠시간 굳게 마음을 먹고 있는 눈치다. 전학생을  번 받아본 은영으로썬 학부모의 이름이라던지 직업이라던지 하는쪽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학생이 얼마나 ‘사고를 쳤는가’ 아니면  쳤는가에만 관심이 있을뿐이다. 고교 남학생이라 그런지 시선의 방향이 마음에 들지만은 않지만 그것은 나이대가 그러니 어쩔 수 없고, 눈빛. 흔들리지는 않지만 잿빛이라 한다면 너무 감상적인 것일까.






"역시.. 정학 문제 때문에 그러시나요?"

-!



은영은 아차 싶은 생각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학생을 바라본다.




"아니. 그게."


-괜찮습니다. 그렇게까지 당황하지 않으셔도 돼요. 선생님도 어차피 잘 아시겠지만, 싸움을 좀 했습니다. 뭐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일일이 말씀드린다고 선생님께서 딱히 좋아하실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제 입으로 이런 말 드리면 좀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질 나쁜 놈은 아닙니다. 선생님.


"........."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입밖으로 쏟아내는 낯선 방문자를 바라보며 어쩐지 미간을 잠시간 찌푸리는 은영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보기좋게 들켜서 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일까. 은영은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는 낯선 이의 얼굴과 가슴 한 켠에 조그맣게 수놓아져 있는 학생의 이름을 번갈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 뭐 자세한건 잠시 후에 자세히 얘기하도록 하자. 우선 반에 가도록 하자."



대답없이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전학생과 함께 은영은 자신이 담임하는 반으로 천천히 자리를 옮기며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 애썼다.


'유연재.... 유연재.... 분명... 분명.. 어디서  듯한 인상인데...'





시간을 보자니 벌써 오후 6시다. 야간자율 감독 교사가 아닌탓에 눈치를 보며 퇴근준비를 한다. 은영이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하자니 남편의 퇴근시간은 아무래도 길어질 모양이다. 사무직인 재준의 퇴근시간은 은영과는 달리 잘 정해져 있는 편이다. 그것도 주로 오후 8시를 넘어 밤에 가까운 시간으로 고정된채로. 재준이 늘 은영을 보며 '고맙다' 미안하다 따위의 말을 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은영이었다. 고아나 다름없는 자신을 평생동안 흔들림없이 바라봐 주었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벌써 몇년동안 한결같이 무엇이라도 해준 재준이었다. 세세한것 하나하나 신경써 주는 재준을 생각하며 은영은 천천히 차에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은영이 집에 도착하고 저녁을 준비하자 9시가 다 되어서야 재준이 집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은영의 식구들은 죄다 성격이 비슷한듯 보였다. 저녁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임에도 가장이 들어올때까지 저녁식사를 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사소한 배려'는 이 집의 가족 구성원 3명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의 '신념'이자 '미덕'이었다. 거실에 들어서는 재준이 여느때와 같이 아내와 어머니, 아들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훑어보다 이내 얼굴을 살짝 붉힌뒤 서둘러 욕실로 들어간다.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부탁했건만, 자신이 들어올때까지 기다려주는 가족들이란. 재준은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마음이 적당히 뒤섞인 자신의 마음을 정리한채 가볍게 몸을 씻는다.




"오늘은 별일 없었어?"


-별일은 무슨. 그보다....


마주보며 식사를 하며 하루의 일과에 대해 재준과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던 은영이 아침의 일을 떠올리며 재준을 바라본다. 재준은 은영과 눈을 마주치자 고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헛기침을 한번 한 뒤 운을 떼기 시작했다.



"저.. 어머니"

-어 그래.


잠시간 눈앞의 어머니의 얼굴 표정을 더듬어 살피던 재준은 무언가 말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을 하다, 이내 천천히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저기 그.. 연수... 연수 누나요."


-......


"아무래도 어머니께 연락을 드리는게 부담스러워서 저한테 먼저 연락을 하신 모양인데, 매형 저번에 사업시작한거...  안된 모양이에요."



재준의 입에서 '연수'라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이름이 흘러나온자, 재준과 마주하던 고부(姑婦)는 거의 동시에 수저를 탁자위에 내려놓으며 재준을 멍하니 바라본다.




"아무래도 연락드리기 죄송스러웠겠죠."

-그래서, 재준이 너에게 연락해서는 하소연이라도 했단 말이니? 연수 그것이 너한테 전화해서는 뭐라고 하디?

"어머니 진정하세요. 누나나 매형이 뭐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요? 사업이라는게 좀체 쉬운일은 아니잖아요"


-암 그렇지. 절대 쉬운일은 아니지. 그러니까 내가 이번만큼은 말렸던거야. 거봐라. 사업시작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번에도 다 날렸다니? 아니 연수랑 유서방은 대관절 무슨 일이라니.


"저도 자세한 상황은 몰라요. 그저 전화로....."





은영은 그저 멍하니 시어머니와 자신의 남편이 나누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시누이. 마주한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버려 얼굴조차 가물가물한 그 시누이.

너무나 다정한 이 집 분위기에 걸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시누이 가족일 것이다. 그것은 매번 '사업자금' 명목으로 벌써 적지않은 돈을 조달해  지난날의 '화려한 이력'은 물론이고, 이젠 집에 들어와서 다함께 살면 어떻겠냐는 시어머니의 간곡한 부탁따위 단칼에 무시하던 -아마도 늙은 노모를 모시기 싫은 표정이 얼굴에 다분해 보이긴 했지만- 그녀의 정말이지 '정떨어지는' 행동에 기인한 판단이리라.

은영은 그저 남편의 아직 '끝나지 않은' 다음 말을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