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내 사형은 나만 건드릴 수 있어, - 3 -
설마 이 미친 짓거리의 목적이.. 그 짓..? 용세린의 물음에 수라문주는 한 줌의 부끄러움 없이 대답했다.
"그래.. 강한 수컷이 아름다운 암컷을 탐한다... 당연한 것 아닌가?"
응, 그래.. 당연하긴 한데.. 무영림에 갔다와봐서 아는데, 저 정도 무공이면 보자마자 처녀를 달라고 해도 넙죽 받칠 명문여식들이 군단 규모로 있을 거다. 그런 놈이 왜 이런 사달을 내고 지랄인가 하는 게 용세린의 고민이었다.
"멍청아, 그런 거라면 당장 기루만 가도..."
"흐흐.. 보이지 않느냐? 이 것이?"
"음.."
용세린은 느꼈다. 파괴의 의념이 너무 강해서 주위의 모든 것이 스러지는 게. 남자는 파괴의 화신, 지고의 경지에 오르고서도 스스로도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저건 일종의 우화(羽化)였다.
자신의 경지를 통제하지 못하는 건 이상하지만 그것이 통제불능이 아니라, 그러한 존재가 된 것이라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양강지공을 익힌 자가 뜨겁고, 빙한지공을 익힌 이가 차가움을 뿌리듯, 자연현상 같은 것이니.
"나는.. 파괴 그 자체다."
뭐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녀석인가? 저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다니... 그나저나,
"결국, 여자랑 하고 싶은 거지...?"
그렇다면.. 얘기가 빠른데.. 뭐, 사형을 실컷 두들겨팬 나쁜 녀석에게 범해진다니... 뭔가 배덕적인 기분이긴 하지만, 져서 범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 저 찌릿거릴 정도의 기운이 안에 들어가면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고... 저 녀석 정액은 막, 자궁을 찔리는 기분 나고 그럴 것 같은데....
"후후.. 왜 그러느냐, 표정이 변했지 않느냐. 범해질 운명이 두려운 것이냐?"
"아니."
그 반대!
이 녀석은 맛이 가있기도 하고.. 말이 통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럼 나, 항복할게. 해주면.. 되는 거지?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되잖아?"
"크큭.. 이 몸을 동정이라도 할 셈이냐?! 웃기지 마라. 쟁취해야한다. 계집은 모름지기 눕히지 않으면 안된단 말이다! 그리고 너를 묶어놓고 매일밤 매시간, 한 시도 빼놓지 않고 범해주마. 큭큭큭큭..!"
이런 미친놈이? 다양한 쾌락을 느끼고 싶을 뿐이지 섹돌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고! 뭐 물론.. 내공과 체력에 의해서 쾌락을 느낄 수 잇는 정도에 차이가 나는 걸 알았으니... 그런 일이 얼마나 엄청난 쾌락일지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서도... 그런 건 성에 안 맞아.
스으으윽──
수라문주가 하늘 높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내려쳤다. 천단의 일격이 산맥을 벤다면.... 그 손짓은 구름을 가른다.
푸화아악!
지평선 너머로 펼쳐진 구름이, 씻겨나가듯 퍼져나간다. 단순한 일참이 아니다. 옆의 머리카락 일부가 잘려나갔다. 깨달았다.
'맞으면... 죽어.'
제 아무리 자신이라도, 확실하게 죽는다. 이 녀석은 강하다. 장난으로라도 져줄 수도 없다. 공격 하나하나가 모두 흉험해서 까딱 방심하면 그대로 목숨이 위험할 정도.
차앙!
공격을 막아낸 손이 저릿저릿하다. 손목에 힘을 안 준게 아닌데 검을 놓칠 뻔한 건 처음이다. 경력만으로도 몸이 저릿저릿하다...
"큿...!"
"흐흐, 얌전히 굴복하거라..!"
"난 굴복하지 않...!"
아.. 뭔가 플래그 같잖아. 닥치고 있자.
츠츠츠츠츠층!
찰나의 순간, 한 번으로 보이는 도격은 사실은 수 십번의 휘둘러짐의 결과다 검과 도가 닿기도전에 경로를 수정해 서로를 노린다. 그렇지만 검을 휘두를 수록, 느껴진다.
'...밀리고 있어.'
용세린은 출도이래 처음으로 패배를 직감했다. 저 파괴기인지 뭔가 아는 요상한 기운은 위험했다.
"수라참혼격(修羅斬魂擊)!"
수라의 도는 혼마저 가른다. 그 이름처럼 본래 베어서는 안될 것을 베는 게 보인다. 직선상에 존재하는 흐름, 인과, 법칙이 일시적으로 끊어져 공기의 흐름이 뒤틀리고, 중력마저도 흔들리는 무지막지한 광경이 펼쳐진다.
갈라진 바위가 먼지로 흩어지고, 호수가 역류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
"흐하하! 으하하하! 더다! 아직 모자라다! 내 전부를 받아봐라!"
치르르르릉...!!!
방울이 울리는 듯한 소리는 연격을 연격으로 맞선 결과다. 수 억개의 방울이 동시에 흔들리는 듯한 공명음은, 일대를 휩쓸며 음공의 고수가 전력을 다한 것처럼, 지나가던 새가 떨어지고, 산짐승들이 귀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게 만들었다.
"읏....!"
용세린의 발이 떨렸다. 이건 진짜, 위험한데...
"흐흐, 이제 굴복할 생각이 들었느냐?"
"음... 적당히, 무승부로 하고.. 섹파라도 하지 않을래?"
"섹..파? 뭐라고 하는 것이냐..?"
"그러니까 주기적으로 성교를 하는 그런 관계를 말하는 건데..."
"주기적? 그럴 필요가 왜 있지!? 네 년은 영세영겁 본좌의 것이 될 것인데..!!"
"후우우.... 아 뭐, 알아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타협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하는 수 없잖아, 전력을 개방할 수 밖에.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용세린은 사부를 떠올렸다. 아마, 이런 상황까지 가만히 있으라고 한 건 아니겠지..?
설마 그 정도 융통성도 없는 늙은이는 아니겠지?
'천문... 해방.'
스스스스──
명멸하는 수 천개의 청광이 하늘로 떠오른다. 시위나 무력행사가 아닌, 그저, 그 존재를 드러낸 결과로 구름이 걷혀지고 햇빛이 드리웠다.
"호오... 역시 투지를 잃지 않았구나. 계집..! 이게 너의 전력이냐..?"
...평온하다.
수라문주가 소리치며 광소하는 것도 새소리나 바람소리처럼 들린다.
지금 용세린의 마음은 어느때보다도, 아니.. 평온하다기보다는 무정할까? 그리고 깨달았다. 천문을 개방한 상태로는 일 분도 자신으로 있을 수 없다는 걸.
사부가 왜, 하지말라고 했는지 알겠다.
이건... 인간이 아니게 되는 길이구나.
모든 것이 하찮다.
세상 따윈 허무하게 느껴졌다. 산이 부서지던 저 발악에 강이 사라지던 무슨 상관일까. 그 또한 순환이고, 그 또한 흐름인데...
손을 뻗었다.
"후후, 소용없...... 억...?"
투쾅──!
그 몸을 바쳐 세상을 창조했다고 전해지는 거신의 주먹에 맞은 것처럼, 수라문주는 너무나도 하찮게. 파리가 내쫓기듯 날아갔다. 모든 것을 부수는 그 역장조차도 이 힘 앞에서는 무력했다.
콰과과광!
수 백리가 넘도록 산을 부수며, 땅을 긁으며 날아가 처박히고 나서야 그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회피도 방어도 불가능 했던 건 당연하다. 이건 이미 무공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 압도적인 광경을 보는 용세린의 표정은 무심했다.
그 흔한 지루함조차 일지 않았다. 그저, 무심하게.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서 하늘에서 동앗줄이, 아니, 사슬이 내려온다.
잠깐만 비틀면 쉽사리 끊어버릴 수 있을 푸른 사슬을 용세린은 굳이 거부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대로 올라가면 어디로 가게 될 까? 선계 같은 것? 아니면 자연지물이 되어버릴까?
평소라면 그런 의문을 떠올렸겠지만.. 지금 용세린의 마음 속에 그런 것은 없었다.
그저 이것이 순리라면 순리대로 가게 될 뿐.
"...."
그렇게 하늘로 비상하던 때,
"흐아아아.. 나는, 아직.. 안 죽었..다아아아..!!"
수라파천무(修羅破天武). 천멸붕겁(天滅崩劫)!
수라문주가 지면에서 휘둘러친 적광으로 시작된 일참은 자색의 번개가 되어, 이윽고 흑색의 파멸이 되어 용세린에게 쇄도했다. 그 이름 그대로 하늘을 부술 것 같은 일격이었지만, 그걸 마주한 용세린은 그저 조용히 손바닥을 내밀었다.
"...!"
흑색의 반월과 거신의 손바닥이 마주 부딪혀 폭발했다. 그 사이에서 일어난 충격에 반경 수 백리의 모든 새들이 땅으로 떨어졌고, 구름이 사라졌다. 두 힘 사이의 반탄력을 견디지 못한 수라문주의 몸은 지면 깊숙히 처박혀버렸다.
그리고 충격을 받아내고도 얼마 밀려나지 않은 용세린은 그대로 사슬을 타고 다시, 올라가려고 했다.
그 때, 울컥. 충격이 그 아랫배를 울렸다.
"으흑..?!"
지이잉─!
해소하지 못한 경력이 그녀의 배를 타고 들어와, 하복부를 자극했다. 찌릿하면서도 강렬한 감촉.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부여잡던 뭔가가 끊기는 기분과 함께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저 하늘의 마수로부터.
"..아?"
용세린이 정신을 차린 순간, 사슬이 갑자기 흉험해졌다. 그네처럼 그녀를 감싸고 받치던 사슬은, 죄인을 포박하는 사슬이 되어 양 팔다리를 구속하며 얽혀갔다. 용세린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 데려가려고..?"
스르륵...
"그렇게는.. 안 되지. 아직 못해본 체위가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사형이랑도 아직.. 못해봤..다고..!"
용세린은 그 손에서 떨어졌던 검을 불러내어 쥐고, 하늘을 향해 베었다.
사슬이 깨어졌다.
....
어.. 웬일인지 내려다본 천산산맥은 이전의 절반 크기가 되었다. 빌어먹을 사슬을 치워놓고 보니 바퀴벌레처럼 죽지 않은 수라문주랑 싸웠던 탓이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나였다. 그건, 약점이 하나 없었으니까.
"..강하기만 한 게 아니라 실전적이구나. 크크큭.."
녀석은 고통에 다소 무감했다. 무감하다기 보단 그것 자체를 희열로 느끼는 듯 했지만, 거시기를 걷어찬 통증만은 어쩔 수 없었는지 표정을 찌푸렸다. 뭐 금강불괴를 넘는 녀석이니 터지진 않았겠지만. 그 생리적인 충격에는 당할 수 없었는지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불알이 아파서 쓰러진 주제에 폼 잡지 말라고 멍청아."
"흐흐.. 아쉽구나. 처음으로 만나는 나 이외의 존재가.. 나보다 강했다니."
"미리 말해두지만.. 난 해주려고 했다?"
"큭큭.. 아쉽구나..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면, 괜찮았을 거라는 거냐?"
"아니 그건 아니고.. 내가 좀 묶여있는 걸 싫어해서─."
"그럼.. 죽여라. 지루하고, 하찮은 삶이었지만.. 나 또한 약육강식의 대상. 하다 못해 사람에게 죽는다면. 기쁠지도."
하고 많은 게 사람인데 뭐라는 거야, 진짜 이 녀석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은 아니다. 근데 죽이라고?
"? 내가 왜?"
"...크..흐..음? 이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그럼 왜, 싸운거지?"
"후우... 자, 너 좀 모자란 것 같으니까 정리해줄게."
나는 수라문주의 멍한 표정을 짜증스런 얼굴로 노려보면서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접었다.
"첫째, 넌 날 따먹으려 했는데.. 찌질하게 약했지? 그래서 못먹은거잖아? 그치?"
"그,그렇..지.."
표현이 좀 천박스러웠는지 수라문주의 얼굴이 뭉개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째, 죽이는 건 승자의 권리잖아? 니가 이겼어?"
"큿...."
"자! 그럼 결론이 났잖아. 이번엔 실패했지만 다음 번엔 절치부심해서, 성공해봐."
"살려..주는 건가? 네 정조와 목숨을 노린 상대를..?"
"응, 나는 관대하거든."
다음 번엔, 적당히 약해지던지. 진짜로 세져달라고... 그럼 정말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 대신... 정말 네가 세져버리면.. 나중에 나도 한 번은 봐주던지?"
녀석은 말이 없었다.
큭, 굴욕이다! 네 년! 날 모욕할 셈이냐! 라던가.. 그런 소리라도 하려나. 아, 그럼 지금 내가 덮쳐야하는 상황이야...?
마음 속으로 쓸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수라문주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역시 저 녀석, 정상이 아니야.
"큭... 크.. 큭큭..큭..끅.. 크흑.. 크.. 하! 크하하하핫..!!!!"
"..너, 머리 맞았어? 머리는 안 때린 것 같은데..."
"좋..다.. 아주 좋다!!! 으흐흐..! 널 범하게 될 그 날을.. 기대하마! 다시..만나자..!!"
스팟─
미친 놈처럼 웃어대던 미친놈은 지 할말만 하고 그대로 빛이 되어 사라졌다.
"휴우."
그럼, 이걸로 한 건 해결.....?
"아! 저 녀석 색공 익혀놓으라고 하는 거 깜빡했다!"
젠장, 살려주는 대신 익히라고 비급을 던졌어야 했는데...
뭐, 한 번 더 쓰러트린 뒤에 가르쳐도 되니까.. 아무래도 좋은가.
그대로 몸을 돌리면 저 멀리, 사형의 모습이 보였다. 못다한 일을.. 하러 가봐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