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내 사형은 나만 건드릴 수 있어, - 2 -
남자는 말없이 진무진의 앞에 섰다. 하지만 그를 마주한 진무진은 선명하고,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스물 한 번째, 수라(修羅). 너는, 천검의 계승자인가?"
이 자야말로 재앙, 자신들이 막아야할 적.
'수라문주..!'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려울지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입을 열면 그대로 목구멍을 타고 들어올 듯한 살기에, 진무진은 차마 입술조차 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수라문주는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침내... 수련을 끝마치고 올라온 나는 모든 것을 얻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너무도 쉽게 부서졌다. 정점에 올랐으나 내가 얻은 것은 손 안에 바스러진 먼지와 공허함 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찾았다. 유일하게 내가 살아있는 감각. 전투의 전율을, 나를 만족시켜줄만한 적을! 그리하여 다시 한번 나에게 생존을 실감케할 상대를... 그러나... 모두가 하찮은 벌레였을 뿐이었다."
"..."
파스스스...
남자의 주위가 지금 이 순간에도 검게, 재가 되어버리고 있었다. 저건 단순한 살기의 방출이나, 의형상인(意形傷刃) 따위가 아니었다. 투쟁, 그 자체인 남자가 만들어낸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멸(生滅)의 공진(共振)이었다. 말을 나눌 뿐인데도 그 강함이 피부에 박히듯이 느껴졌다.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해할 수 있겠느냐? 어떠한 자극도 없는 세계, 타인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벌레들의 세상에서 느끼는 고독을...?"
슈화아악..!
양 주먹을 움켜쥔 수라문주의 주위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나며, 파괴의 원이 확장한다. 원 안에 들어온 모든 것들이 소멸되기 시작했다. 모래도, 공기도, 심지어 그 육신을 가리던 옷마저도. 그 강한다는 천잠사로 만들어졌음에도 불 앞의 밀랍처럼 녹아내렸다. 수라문주는 움켜쥔 주먹 아래로 핏물을 흘리면서 깊은 탄성을 토했다.
"그렇기에.. 나는 기대했었다. 유일하게 우리 수라문에 비견되던, 아니 앞서기 까지 했다고 전승되는 천검문의 계승자. 그 계승자만을 기다리며 하찮은 놈들과의 일전을 감내해왔었다. 그런데...."
수라문주의 눈빛에 분노가 어렸다.
"그런데, 그런데,그런데에에에!!!!!!"
수라문주는 완전히 미쳐버린 것처럼 핏발을 세운 눈으로 괴성을 질러댔다. 광기가 터져나오는 양 주먹에서는 핏물이 터져나왔고, 밟고 있는 땅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크으윽!!"
분명 그저 외침이었을 뿐인데 진무진은 몸이 부서지는 듯한 환상을 느꼈다. 여지껏 천고의 영약을 먹고 신화(神化)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눈 앞의 상대는 그 이상이었다. 마치, 신(神) 그 자체.
정신을 차렸을 때 진무진의 몸은 방어초식을 취하고 있었다.
'천류..'
쩌어엉──!!!
수라문주의 내지른 일권에 온 대지가 끓어오르다 못해 증발해버린다. 단지 일권을 내질렀을 뿐인데, 모든 공력을 다한 방어 초식이 순식간에 깨어졌다.
"쿨럭.. 크흐으윽..!"
단 일권, 진무진은 생에 최고의 방어초식을 펼쳤음에도 견디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무릎 꿇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데 그토록 기다려온 싸움이.. 나의 대적자로 예비된 그 적수가, 이처럼 하찮다니..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크읍..."
"너 또한 수 많은 벌레에 지나지 않았다니, 너 또한 하찮았다니... 아, 아아..!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네 놈에겐 실망했다."
콰앙!
"커억!"
발로 진무진을 걷어차 그 가슴을 짓밟은 수라문주는 그대로 하늘 높이 수도(手刀)를 들어올렸다. 수도에서 뿜어나온 강기는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흉험했고, 그 눈빛은 너무나도 차갑고 비정해서 도무지 광인의 것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형편없구나. 고작 너 따위가 천검문의 계승자라니.. "
"후후...."
"..뭐가 웃기지?"
'그래, 나는.. 형편없지...'
진무진의 웃음에 수라문주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진무진은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천검문이 패배한다. 자신으로 인해 사문의 명예는 떨어지겠지만, 그 대신 무림은 평화로워질 것이고.. 사부나 사매가 나서야할 일도 없을 것이다.
전승에 따르면 수라문주는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모든 게 끝.
이런 재앙을... 무림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
"너는.. 뭔가를 위해 희생하는 눈을 하고 있구나."
"...!"
"그래, 그래, 그래, 그래....! 그런 거였어... 긍지 높은 천검의 계승자가 멸시를 부정하기는 커녕, 긍정하다니. 그래.. 애초에.. 너는 처음부터 껍데기였던 거다. 너는 이미, 누군가에게 진 놈이었다는 거다아아!!!!!!!!"
당혹하는 진무진의 표정에, 수라문주는 정답을 찾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광소했다.
"크카카칵, 캬캬카카칵, 크키킥.. 아,아아, 아아...! 있었구나. 누구냐, 너의 사부냐? 아니면 동문의? 호오, 동문이군. 그래, 너 따위가 계승자로 선택받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있었구나, 있었어. '진짜'가!!!!"
"허,헛소리.. 크흑.. 하지마라. 나, 나야말로 계승자..."
"킬킬킬킬킬... 헛소리라고 생각하느냐? 정말로? 그런데 표정은 거짓을 모르는 구나. 눈은 거짓을 말할 줄 모르지, 위장할 줄도 속일 줄도 모르지, 그런데 지금 너의 눈이 흔들리는 구나! 진정한 계승자는.. 진정으로 계승자가 되었어야할 자는 다른 자라고!!!"
확언하는 수라문주의 말에 진무진의 표정은 충격으로 멈춰버렸다. 이미 놈은 깨달았다. 사매의 존재를.. 그렇다면 하다못해, 놈의 팔 하나라도..!
진무진의 몸이 은청의 휘광으로 빛난다. 감히 천문을 개방할 수는 없지만, 그 힘을 빌릴 수는 있다. 솟아오른 검강의 위에 또 다시, 별빛이 씌워진다. 찬란함을 넘어선 그 광명은 진원진기마저 사용한 생애 최대의 기술. 모든 것을 걸고서 제거한다. 반드시, 반드시...!
"..동귀어진? 아니 노리는 건 팔인가? 그런데 말이다. 분명 내가.. 말했지 않나? 시시하다고..!!!!"
────!!!!!!!!
진무진은 아까보다 족히 배는 빠른 일격을 맞고 절벽에 처박혔다. 바스라져버린 절벽이 무너지며 그의 몸도 함께 추락한다. 진무진의 몸은 전신의 뼈가 부서진 것처럼 가눌 수도 없었다. 아아, 진원진기마저 격발시킨 몸으로도 좇을 수 없는 속도라니.
"크..윽..... 으...."
절벽의 조각들에 깔려 탄식했다. 이제, 무림은 끝이었다. 소녀의 여행도 끝날 것이다. 의식이 끊어져간다. 그 때였다.
"사...형?... 사형!! 괜찮아요?!"
'사..매?..어떻게?'
천리길도 넘는 거리였다. 그런데 왜 여기에 사매가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을 묻기도 전에, 용세린의 고개가 수라문주 쪽으로 돌아갔다.
"이 새끼가..!"
'아,안돼...! 저건 맞서싸워선 안..돼!'
진무진의 뱉어지지 못한 외침 속에서 용세린의 신형이 빛이 되어 쏘아졌다. 수라문주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발차기에,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본능이 그에게 방어를 강요했다.
쿠콰아아앙!
그저 형도 식도 없는 발차기인데 겹쳐 막은 손에 짜릿한 전율이 흐른다. 위협을, 감각을, 느껴본 것이 대체 얼마만이란 말인가? 뇌를 태울 듯한 환희가 벅차올랐다.
"끄흐으이이잇!! 닿는 발의 감촉! 고통! 밀려나는 이 외력(外力)!! 아아, 아아아.. 너로구나! 너였어어어!!!"
"뭐라는 거야.. 이 미친 새끼가!"
분명 용세린이 살폈던 진무진의 꼴은 상당히 처참했다. 이미 인간이 아닌 존재나 다름없는 그의 생명이 위험할 정도였다.
'이 자식.. 감히...!'
용세린의 생각은 빠르게 끊어졌다. 붉은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남자의 몸으로부터 검은 섬광이 뿜어져나온 탓이다. 그것은 깨달았을 때엔 이미 궤적 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녀를 향해, 뒷편의 진무진마저 노리며 쏘아져왔다.
"이 개자식이..!"
콰아앙!!
쏘아진 광선을 막았는데, 그 결과 폭발이 일어나고, 땅이 요동치고 하늘이 울린다. 실로 천지를 증발시키는 경세적인 위력은 용세린이 밟고 있던 지면이 봉분이 되도록 일대의 땅을 모조리 증발시켜버렸다.
"이 개자식이, 옷 다 찢어지잖아!"
수라문주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자신의 공격을 맞고도 옷을 지켜낸다. 저 가녀려보이는 몸에 너무나도 강한 나머지 섭리조차 비트는 자신이 간섭하지 못할 정도의 힘이 있다.
찾았다, 찾았다. 찾아냈다!!
"흐후흐흐하하하하!!! 아아아, 아아아아!!! 황홀하구나! 행복하구나!!! 나는 너 같은 계집을 원했다! 그래, 죽지 않는구나! 힘을 해방하지 않으면 다치지조차 않는구나!"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맛이 가버린 수라문주가 아까의 광선을 쉴새 없이 뿜어낸 탓에 용세린은 막아내느라 기진맥진했다. 그저 피하거나 하면 될텐데 뒤에 쓰러진 진무진을 위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사,사매.. 나 같은건 두고...."
"헛소리 하지마요! 사형 자지맛 보기 전엔 안 비킬테니까!"
"사,사매.. 그,그런 말을..."
"맨날 못알아듣기만 하고! 둔감해서는.. 이렇게라도 얘기 안하면 모르잖아요? 살아나면... 뭘 해야할지 아는 거죠?"
"어, 어....으,응..."
진무진이 충격에 휩싸여 동의해버린 가운데 용세린은 주먹을 쥐었다. 좋아, 이걸로 이제껏 미뤄왔던 사형도 공략이다! 같은 내기를 가진 상대랑 궁합이 그렇게 좋다는데, 마침내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절대로 질 수는 없지.'
"크흣, 아아, 아아아!!! 좋구나, 좋아!!"
'대체 이 미친놈은 뭐야..!?'
혹여나 사형을 노릴까 용세린은 접근해 검조차 쓰지 않는 극도의 육탄전을 펼쳤는데, 정작 맞는 수라문주는 전신요혈을 사정없이 두드려맞으면서 좋아하고 있었다.
그냥 일격이 아니라 한 방 한 방이 산을 울리는 타격이다.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지면이 굉음을 내고, 족히 십 리는 될 곳에 지어진 집이 무너지고, 나무와 바위가 부서져 파편이 되는 그런 일격임에도, 천하 십대고수조차 살려달라며 빌게될 일격을 광소하며 받아내고 있었다.
'뭐지.. 이 괴물은?'
오직 지옥의 아수라처럼 영겁토록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수라문주의 절대적인 방어력에는 용세린도 질려버렸다.
"흐흐흐하하하하!! 더, 더, 더욱 때려보거라!! 나의 계집이 될 거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잘난 척을..!"
용세린은 어검술로 즉시 검을 손에 쥐었다. 재빠르게 그 손에 쥐여진 검은 마교의 전설이며, 신조차도 벤다고 일컬어지는 백년장미검, 그리고 이어 천검문이 왜 검문(劍門)인지 알게 해줄 일격이 그 손 끝에서 피어난다.
검을 든 자들은 생각한다. 최고의 검격은 뭘까─? 천개의 검의(千劍)를 터득한 종사의 의문은 거기서 시작했다. 하지만, 그 끝이 하늘(天)이라는 것은 이상했다. 검이랑 하늘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본질을 참오한 끝에, 그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수련과 무도로 포장한들 검의 본질이란 죽음(殺)을 선사하기 위한 인간의 발버둥. 그것은 너무나도 하찮아서 쉽사리 실패하고, 이내 스러지곤 한다.
반면에 저 하늘(天)은 어떤가? 그 어떤 생명체에게도 예외는 없이, 철저하고 확실한 죽음을 내리지 않는가? 피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죽음의 선사자.
인리(人理)는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천리(天理)는 거스를 수 없으니,
이것이. 하늘의 검(天劍)이다.
용세린이 검집에 손을 움켜쥔 순간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멎은 듯 했다. 정지된 세계, 그 안에서 오로지 홀로 무한히 가속하는 일참. 마침내 맥동하는 그 손가락 끝에서 해방된 휘두름이야말로 방어도, 저항조차도 불허하는 천리의 검.
천검류(天劍流) 극의(極意).
천단(天斷).
"크읏..!?"
시종일관 회피하지 않았던 수라문주도 이번에는 경시할 수 없었는지 황급히 몸을 뒤틀어 피했다. 그러나 휘두름을 전부 피할 수는 없었고,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귓볼과 어깨 끄트머리가 뭉텅 잘려나가며 피가 치솟았다.
"크흐윽..!"
단 한번의 일격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경악성이 퍼져나갔다. 설마 자신에게서 피를 넘어 뼈를 보게할 정도의 일격이라니!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느껴본 적 없는 고통이 수라문주를 자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아!!!!"
그리고 그는 아까보다도 더 크게 환호했다.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열렬하게. 하지만 경악한 건 수라문주 뿐이 아니었다.
'..진짜 미친 새끼 아냐 이거!?'
원근감을 무시하고, 뻗쳐나간 모든 범위의 적을 평등하게 파괴하는 궁극의 검. 저 하늘의 별마저 베어버릴 것 같은 검격에 뒤늦게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그 검격에 맞은 수십리 바깥의 산맥이 잘려나가, 굉음을 내며 주저앉는 중이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너무나도 강렬한 일격에 용세린의 얼굴이 하얘졌다.
'이거, 너무.. 위험해.'
익힌 뒤로 써본 적이 없는 기술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자신은 학살자가 되려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일격을 날려대면 사형은 반드시 죽는다.
그렇다면, 장소를 바꿔야한다.
"흐흐흐히히히힛..! 좋다, 좋아. 너무나도.. 기쁘구나아아..!!"
다행히 저 미친 광인은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용세린이 산맥 안 쪽으로 빛살처럼 도망쳤는데, 수라문주는 한 술 더 떠서 공간을 접어 달리듯이 점멸하며 빠르게 쫓아왔다.
'뭐 저딴..!'
"흐흐흐.. 더욱, 더욱 갖고 싶구나! 아아아.. 이 정도의 힘이라니, 너라면 나를 만족시켜줄 수 있겠지!! 천검문의 후인이여.. 너는 자격이 충분하다! 너라면, 나의 수라파천도(修羅破天刀)를 볼 자격이 있다!"
"수라파천도..?"
그거 분명.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아니, 산적놈이 쓰는 잡기 아니야? 라고 하고 싶지만, 진짜 그럴 리가 없다. 놈은 모르겠지만 사실상 회피불가 수준의 무제한 사거리에, 방어불능이라는 심검의 영역에 있는 천단을 최소한의 궤적으로 피해낼 정도의 고수라면, 주방에가서 칼질을 해도 신무(神武)를 보게될 것이다.
"아아. 아아.. 더더욱 네 년의 뱃 속, 그 안에 이 씨앗을 심고 싶구나!!"
"뭐!? 너, 지금 나랑 섹... 아니, 성교가 하고 싶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