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내 사형은 나만 건드릴 수 있어,
무림지존이 누구냐?
그 질문에 대한 세인들의 논란은 분분했으나, 공통적으로 좁혀지는 이들이 있었다.
고수 중에서도 정점에 올라 삼황(三皇)이라 불리우는 이들.
오랜세월 최강의 자리를 지켜온 자지검황(自支劍皇) 발기천(發氣天).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소림의 최고수로 추존된 경기불황 (璟氣佛皇).
마지막으로 마교의 절대자로서 그들보다 못할 리 없다는 색천마황(色天魔皇).
색천마황은 세간에는 그저 방사(房事)를 통해 내공을 얻는 사술로 힘을 쌓은 것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기실 그 무공 또한 절대의 경지에 오른지 오래되었다.
압도적인 내공과 경세적인 무위로 색계(色界)를 지배하는 자.
바로 그 색천마황이, 현 마교의 교주이자 십만대산의 절대자가... 지금. 갈기갈기 찢긴 것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처참하게 널부러져 있었다.
"쿨럭!.. 끄.. 으... "
숨이 붙어있었지만 울컥 피를 토하는 그가 내일 아침 해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요원해보였다. 그런 천마를 내려보는 산발머리 사내의 표정에 담긴 감정은 허탈감이었다. 너무나도 순수한 허탈, 하찮은 벌레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조롱이나 경멸은 한 줌도 없었다.
"역시, 하찮구나 너희들의 무공이란 것은..."
사내의 모습은 지극히 경멸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황은, 천마(天魔)는 마음 속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차원이.. 다르다.'
무공(武功)?
이런 게 무(武)라고 불려도 되는 걸까? 아니다. 이런 게 무(武)라면 자신은, 무림은, 무얼 하면서 살아왔단 말인가?
아니, 이런 걸. 살아왔다고, 표현해도 괜찮은 걸까?
지금 저 사내의 눈에 담긴 아쉬움 한점 담기지 않은, 절대적인 실망감.
오로지 실망 밖에 주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폐가 무너져 호흡조차 성치 않은데 헛웃음이 나왔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단 일수(一手).
자색의 섬광과 함께 천지가 무너졌다.
보았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다는 것(天飜地覆)이 의미하는 바를.
그 눈에, 그 몸에, 똑똑히 새기고 말았다.
천마는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이 서서히 분해되기 시작한 탓이다. 그건 천마에게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사내의 주변의 풍경은 원형으로 강물에 쓸려나가는 돌을 수 천, 수 만배의 흐름으로 보는 것처럼 빠르게 닳아없어지고 있었다.
마모된다. 분해된다. 가루조차 남지 않을 만큼 작게, 하찮게, 그 운명을 따라 사라졌다.
그 무공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풍경에 천마는 눈을 부릅뜬 채로 죽었다. 하지만 그의 시체도, 그와 목숨을 함께한 부하들과 함께 사라져갔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어쩌면 세간에선 마교 교주가 실종되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은거를 했다고도. 그러나 진실은 그 힘과 함께 사라졌다. 그 광경을 보면서 사내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펴냈다.
"무림지존에 가깝다는 놈이 이 정도라면.. 무림 같은 건 더 볼 필요도 없겠군."
사내의 권역을 한참 벗어난 곳에서 지켜보는 복면사내는 말을 삼켰다.
'그게 아니라... 당신이 너무 강한 겁니다...'
수라문(修羅門)의 역사 중에서도 이런 존재는 없었다. 마선의 영역에 발을 걸친 마교루를 벌레처럼 찢어죽여놓고, 감흥은 커녕 지루한 표정이었다. 그 권태 가득한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천검문은.. 당대의 천검문주는 언제 쯤 볼 수 있지..?"
"..!.. 속하가 확인한 바로는, 천무검객이라는 자가 천검문의 것과 같은 무공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안내해라. 역시..."
전진파가 자리잡고 있을 방향을 바라본 사내는 그렇게 모든 것이 지워져,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곳에서 몸을 돌렸다.
.....
삼선녀의 행방..? 으,음...
내가 고민하고 있으면 아직도 대답을 못하고 있어서 그럴까... 건양자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
"설마... 그들의 행방을 모르는 것이오?"
"어, 어.. 그, 그게..."
모를 수도 있지 않나..?
내가 알아야할 일이던가...?
"소저?"
하지만 이 비이성적인 도사 놈은 다르게 생각했는지, 눈초리가 싸늘하다... 심장에 비수가.. 아,아니, 생각해보면 이렇게 당황할 게 없었다. 그저 내가 보고 들은 그대로 삼선녀가 어디갔는지 얘기하면 될 뿐이잖아?
어디로 말하는 게 좋을까. 그냥 아무데나 주워섬긴다고 믿어주진 않을테니까... 음.. 잠시 진실을 떠올리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술을 열었다.
"..마교."
"흠..?!"
"마교의 교주가.. 삼선녀를 부렸어요. 선자(仙者)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요."
그래, 그랬다. 사람을 기대하게 해놓고 도망가는, 그런 모든 악의 원인인 그들이... 전진파를 재로 만들었다.
"마..교.. 마교, 마교..! 크..으으윽...!"
역시나. 건양자의 눈꺼풀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가 크게 깨달은 얼굴로 끄덕였다. 개안한 그의 표정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과...연, 그랬던.. 것인가... 그 추악한 놈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지는 군."
"무언가... 생각나시는 점이 있나요?"
"그렇소. 처음부터 적은 정해져 있던 것이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감히 본파를 상대로 이런 끔찍한 짓을 벌일 놈들은 그들 뿐이니까."
그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정체를 너무나도 늦게 알아버려서... 조금만, 빨리 알아차렸다면..."
"어쩔 수 없소. 상대가 마교니까."
이 무림엔 '마교는 어쩔 수 없지' 같은 분위기가 퍼져있기라도 한 걸까? 단 두글자가 나왔을 뿐인데.. 제법 참담한 분위기가 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마교 놈들은 너무나도 사악하고 잔인해서... 나도 짧은 시간 동안 잡혀갔었지만 떠올리기도 싫을 정도로 괴로운 시간을 보냈잖아?
아.. 그러고보면 이번엔 본산이라도 가볼까.
"끄음.. 마교.. 놈들이었다니, 소저께서도.. 고초가 많으셨겠소... 바로 말하지 못하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아, 아니에요.. 저, 저는 음기가 강하니까요..."
"그것은.. 그렇다 하여도..."
아까 행했던 짓거리들이 생각났는지, 건양자가 재차 머쓱한 표정으로 나를 쓸어보았다가 고개를 털었다.
"으흠.. 크흠, 그나저나 그런 사악한 대법이 있었다니..."
갑자기 말을 돌린 건양자가 내 몸을 바라봤다. 왜? 하고 싶어?... 어.. 아,아..! 그러고보면 사악한 사선녀가 아직 내 몸에 남아있었다. 지금도 시시각각으로 내 몸을 갉아먹으며, 언제라도 너희 도사놈들은 죽었어야 했다 같은 소리를 뱉으면서, 너의 좆만한 물건을 거내봐라! 라고 외칠지도 모르는 상태였지!
"대체 무슨 술수인지 혹시, 알고 계시오?"
"어, 어... 이혼대법... 듣기로는 이혼대법이라는 사악한 사술인 것 같아요. 타인의 몸을 강탈하는 비술이라는 데.. 저도 거기에 당해서.... 흐윽.."
내가 말하다가 눈물을 훔쳐주면 건양자가 끄덕였다.
"과연, 마교..."
어쩐지 술법 자체는 배교에 있을 것 같지만 본인도 수긍한 것 같고 아무래도 괜찮겠지...? 썩어도 도사일테니 치유목적으로 나를 데리고 다녀주면 완벽 할텐데, 건양자가 품 속에서 부적 같은 것을 꺼냈다.
"그것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힘이 있는 부적이오. 이혼대법이라는 사악한 술법을 물리치고 싶으나, 아쉽게도 본인은 무에 치중한 터라.."
"읏..."
부적이 따끔거리면서 배에 붙었다. 부적 자체의 영험한 효능이라기 보다는 그저, 아까 엉망진창으로 당해서 아픈거였지만.
"으,으흠.."
그걸 알아차렸는지 건양자도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러워할 뿐이다. 잠시 뒤 부적들을 붙이고 서신을 쓴 건양자가 내게 그것을 건네주었다.
"이것을 가지고 모산파(茅山派)로 가시오."
"모산파요..?"
"그렇소. 모산파의 술법이 뛰어나니 그대에게 걸린 문제를 풀어줄 것이오."
그렇게 말하며 건양자가 몸을 돌렸다. 저 방향은.. 마교?
"가실.. 건가요?"
건양자는 굳어진 표정으로 끄덕였다. 어... 실력으로만 보면 검황못지 않긴 해도 아무래도... 이대로 보내면 죽는 거 아냐? 아니 죽는다. 마교 교주가 검황 정도만 되도 확실히. 으,음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하,하지만..."
"소저, 도사된 자로서 어찌 사마외도를 내버려두겠소? 하물며 그게 사문의 원수임에야..."
그거 사실 니 원수 아니야...
"하지만.. 칠자께서 살아계실 무렵의 실력이, 도사님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 분들 전부를 합한 것만큼 강하신 것은 아니시잖아요...? 준비라도 하시는 게..."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지나도 늦지 않으나, 본인의 수양이 깊지 않아 어쩔 수 없소."
뭐? 정말로 이대로 가려고? 넌 내 안의 사악한 기운을 혼내줘야할 거 아니야!
"도사님이 가시면.. 저는..."
"..끄음.. 그 부분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모산파에서라면 충분히 해결해줄 것이오."
..아, 그냥 지금 뒷통수 때리고 납치해버릴까.
"..흠..?!"
그래도 꼴에 고수라고 촉이 좋은 건지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
좋아, 그래. 이렇게 된 거.. 사선녀가 나서야할 때... 어?
"───!!!"
그 때, 폭음이 울려퍼졌다. 지상에서 수 백개의 천둥이 내리친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굉음이 거대한 폭풍을 동반해서 휩쓸려왔다.
"무..슨..."
그 파동에 담긴 흉험함을 깨닫고 건양자는 전율했다. 아니, 견디지 못했다.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야, 그렇겠지. 저런 파괴적인 힘은, 진범 녀석인가. 그런데.. 저 방향..?
".아,아아..아아아....!"
다리가 풀린 건양자가 발작하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음.. 나도 이런 반응을 보여줘야하는 걸까? 아니면, 내공 같은 걸 잘 못느껴서 괜찮다고 해야하나? 아니, 나도 생각해보면 무공을 보여줬으니까 지금이라도 주저 앉아...?
다행히 건양자는 맛이 갔는지 나를 신경쓰지 못하는 기색인데... 잠깐, 뭔가가. 감각에. 거슬렸다.
건양자가 바라보는 방향에 있는 것. 대충이지만 알 수 있다.
마교.
그리고, 바로 그곳을 향해서 익숙한 기운이 가까워져가고 있다.
"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