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도가문파 주제에 음란하다, - 5 -
전진파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눈앞의 광경을 의심했다. 낮게 깎인 산봉우리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나 내가 다른 봉우리를 착각한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서려는데.. 다소 익숙한 물건이 보였다. 저건 칠자중 한 명이 내게 사용하려고 했었던 물건. 공따위가 세개나 묶여서 앞에 달려있는 이상야릇한 형태.
손에 쥐어지자 내기에 감응해 멋대로 웅웅, 울림을 일으키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 저림을 느끼는 동시에 깨달았다.
전진파는 여기 '있던' 게 맞다.
...근데 지금은 없네?
아니 이게 무슨 무지개.. 아니 그냥 개 같은 경우야...?
"하..."
어이가 없으면서도 문득 떠올랐다. 분명, 얼마전에도 그랬다. 그땐 마교란 곳이 원래 오늘만 보고 사는 녀석들이니,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으니 넘겼는데...
하지만 전진파는 아니잖아.
여기서 교주로서 당해야.. 아니, 해야할 일이 얼마나 많았는데!!
마교야 원래부터 악인이고 나쁜 놈들이니까 죽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선량한 도사들을 학살하다니!
뿌드득.
나는 전진칠자의 유품이나 다름없는 물건을 받아들며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내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 것은 아까보다 더 격렬하게 진동을 발했다. 익숙한 것보다 더욱 개량된 그 진동에 가슴 안 쪽으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지낸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직도 그 목소리가 떠오른다.
─허허헛! 오늘 밤은 재우지 않겠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체험을 시켜주겠소이다!
─일곱을 다 부를테니 각오하시지요.
"...크으윽."
떠올릴 수록 아련해지는 기억에 화가난다. 나를 위해 이런 물건까지 만들어준 순진무구한 그들이 사라져갔을 고통을 생각하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어떤 자식인지는 몰라도 절대.. 용서못해."
죽었다고 복창해라.
나는 하늘로 뛰어올랐다. 아득하게 넓기만 하던 풍경이 축소되고 구름이 닿을 듯 가까운 천공에서, 억눌러놓았던 기운을 개방했다. 의식이 흩어지고 세상의 전경이 바라보여진다.
안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면 눈 아래에 보인 광경은 평범한 산과 마을이 아니었다. 색(色). 무수한 색의 일렁임이 보인다. 기(氣)가 순환하는 모든 광경을 발아래 두고서 찾는다.
결국 내기(內氣)란 무인을 통해 정제된 연료, 무인을 하나의 동력기관이라고 해석한다면... 자연지기(自然之氣)와 달리, 인위적으로 내공을 사용한 흔적은 세상에 남기 마련이다.
그리고 보았다.
"찾았다."
상대의 꼬리는 길었다. 벌써 수백 리, 아니 천 리도 더 밖에 있었다. 먹물처럼 검은 기운을 끈적하게 흩뿌리며 흔적의 끝에 있는 존재는 불길할 정도로 넘실거리는 어두운 기운을 품고 있었다.
너로구나?
내가 그것을 주시한 순간, 그것도 나를 알아차렸다. 그래. 그 정도는 되니까 이렇게 내가 모르게 수작질을 부린거겠지? 그 정도 힘이 있으니까.. 이 하찮은 무림 속에서 자신도 붙었을 거야.
근데.. 너는, 상대를 잘못 골랐어. 그걸 지금부터 알게 해주──
"잘도, 잘도! 스승님과 사형제들을 죽였구나! 이 요녀!!!"
"....?"
나는 멍하니 하늘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기엔 이를 악물고, 노기가 충천한 사내가 보였다. 검을 두자루 패용하고 있었는데... 무공 수준은 대충 초절정고수.
요즘따라 자주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 무림맹 옆의 대나무 숲만 해도 열댓명씩 포진해 있었으니 원래 많은지도 모르겠다.
"사형제..?"
"모르겠단 말이냐! 나는 건양자(健梁子)다!"
..아니, 그렇게 하면 어떻게 알아들어. 누가 와서 이건 막과자다! 하면 그게 그래서 정확히 무슨 과자인지 내가 알아야해?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한가지, 생각나는 게 있었다.
"..너도 전진파야?"
"그렇다. 사문의 명령으로 협의를 찾고, 마두를 처단하고 왔더니... 정작 성지가 어찌 이리 되었단 말이냐. 요녀의 사술이 전진을 더럽혔다는 건 헛소문이라고 생각했건만..."
"뭐? 그건.. 사실이 맞긴 하지만 내가 아니라.."
"..아니라고?"
"응, 그 요녀들은 이미.."
"하! 이 모습을 보이고도 요사한 혓바닥을 놀릴 셈이냐?"
"아니! 그러니까.."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건양자가 노기 가득한 표정으로 검을 뽑았다. 한 자루는 손으로, 다른 한 자루는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로, 뽑아든 검 끝이 나를 겨눴다.
"전진파를 희롱하고, 지배하는 더러운 요녀! 나, 건양자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겠다!!"
그렇게 하늘로 달려들었는데... 과연, 이런 광경을 보고 시비를 걸만했다. 어딘가 초절정고수 답지 않게 모자란 전진칠자와 비교하면 천지차이였다. 자연경(自然境).. 그러니까, 거의 선경(仙境)의 초입.
먼저, 어검술만을 사용하지 않았다. 어검과 검을 동시에 펼치는 기술만으로도 전진칠자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할 정도의 수준이다.
채엥!
검과 검이 부딪히자 건양자는 검을 뱀처럼 휘감아들며, 내를 노렸다. 지극히 유연하면서도 살벌한 검초였다. 나 또한 검황에게 사사받았으나 본류는 기공과 심검에 있는 내가 밀렸다.
속도는 내가 한참 빠르지만 내가 막아야하는 검은 하나가 아니라 두개였다.
심검이 검술보다 뛰어난 건 심력을 썼을 때 뿐이다. 평범하게 싸우면 당연히, 구현할 수 없는 심검이 검술보다 약하다. 압도적인 내공차이로 제압할 수는 있지만.. 하필 이 녀석, 애매하게 강하다. 내공으로 밀어버리면 이 녀석 멀쩡친 못할텐데...
"자,잠깐! 내 말 좀 들어봐!"
"나는 홀리지 않는다! 요사스러운 계집아!"
파앗!
"아니 그러니까!"
"닥쳐라! 내가 홀릴 줄 아느냐!"
오해라니까 이 자식이..!
젠장! 짜증나죽겠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흔적이 남았지만 저건 지금 이 순간도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고 있다. 당장 원수도 갚아야하는데 이런 황당한 이유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촤악!
"읏..!"
결국, 딴 생각을 하다가 피하지 못한 검격이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가 옷섶을 베어버렸다. 그 모습을 보여 건양자가 조롱을 뱉었다.
"뻔뻔스러운 년! 감히 잘도, 사형제의 옷을 걸치고 있구나! 네 년의 몸에 허락되기에는 그 옷은 너무도 값지다! 당장 벗어라!"
"잠깐!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벗지 않겠다면 내가 벗겨주마!"
"뭐,뭐라고..?"
"하! 더러운 요녀 주제에 뭘 그리 놀라느냐. 모든 도사가 너희 요녀들에게 얼굴이나 붉힐거라 생각했느냐! 내 친히 네 년을 벗겨, 사형제의 무덤 앞에서 무릎 꿇고 빌게 만들어주마!"
이 자식.. 뭐야? 알몸으로 그런 짓을 시킨다고?
...잠깐 상상해버렸다.
아니, 아니── 그러니까. 딱히 그런 걸 당하고 싶은 건 아니야. 그저 뭐랄까. 지금 급하긴 한데.. 따지고 보면 난 교주로서 마지막 남은 문도를 추스를 의무가 있는 게 아닐까?
뭐..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고 했는데.... 전진교의 복수가 중한 일이긴 하지만... 조금만, 미뤄도 괜찮지 않을까...?
"충격이라도 받은 거냐? 아니면, 사람을 홀리는 요녀에게도 자존심이 있다는 거냐? 엎드려 빌고 싶다면 지금이다."
"엎드려 빌어.?"
"그래, 알몸으로 무덤 위에서 엎드려 빌어라. 그렇게 하면 도사로서의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내공을 폐하는 것으로 끝내주겠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더는 사내를 홀릴 수 없도록, 네 년의 그 요사스러운 구멍을 완전히 망가트리고, 영원히 가둬주마."
잠깐 침이.. 삼켜졌다.
음, 조금, 긴장해서 그러나? 아니야. 그냥... 차분하게 하면 되는 거니까.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 나는 서서히 거리를 좁히며 미소를 지었다.
"누가 누구 목숨을, 거둔다는 거지? 하찮은 도사 주제에. 너도 저 놈들처럼 흙이 되서 나자빠질텐데~"
"이... 이, 썩어빠진 요녀가! 좋다, 이 검집들은 네년이 좋아하는 육봉 대신으로 박아주마!"
"..!!.."
건양자가 검집들을 날렸는데 그 또한 이기어검이었다. 이제 두 자루의 검집과 두 개의 검이 나를 사방에서 포위했고 네 개의 검이 극히 미세한 시간차를 두고 바람개비처럼 휘몰아쳐왔다.
따다다당!
검을 모든 방위로 돌려 막았지만 그것마저 예상했는지, 튕겨나가는 줄 알았던 네 개의 검무리가 풍차처럼 돌면서 다시금 쇄도했다.
퍼,퍼억!
"크흐윽..!"
교묘하게도 검은 날 베지 않았고 회전하면서 덮쳐온 검집이 내 등과 복부를 강타했다. 충격에 꺾인 내 몸을 향해 검등으로 내려쳤다.
콰앙!
폭발음이 비산하며 바둑판처럼 깔려있던 판석들의 귀퉁이를 부서트리며 내 엉덩이 자국을 남겼다. 고개를 들면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건양자가 검을 내 목에 겨누고 있었다.
"..심판의 시간이다."
칼날이 서서히 내려와서 교묘하게 내 상의를 주욱 베어냈다. 칼에 베인 종이처럼 반으로 갈라져서 풀어헤쳐지는 무복, 드러난 가슴을 검집으로 찍으며 밀어붙혔다.
"응..큭..!"
"진정한 도사가 요녀들을 어떻게 다루는 지 보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