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뱀의 그곳은 두 개, - 4 -
이무기를 찾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신경쓰이지 않으면 이상할 만큼 큰 공간이 있으면 들어가보게 되니까.
"찾았다. 영단!"
위험을 무릅쓰고 잠입한? 보람이 있었다. 눈 앞에 있는 것은 새하얀 비늘이 유독 돋보이는 이무기, 달리 교룡(蛟龍)이라 불리우는 영물이었다. 당연기에게 내공은 물론 정력에도 좋은 물건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철창안에 갇혀있었다.
"음... 잡혀올 정도면 별로 안 센가?"
"키이이이──"
녀석은 마치 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이를 드러내고 노려보았다. 그 꼴이 마치 항의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과연 인간이 아니라 맹수 따위와 싸운 듯한 흔적이 있었다. 느껴지는 기의 양도 방대해서 화경의 고수라할지라도 내공자랑을 할 수 없을 듯하고, 외공의 절세고수와 비견되는 육체를 가진 게 분명해보였다.
"좋아, 이무기! 넌 내꺼야!"
"키야아아아──!"
내가 창살 안 쪽의 동굴로 손을 뻗으려 하자 불쾌하다는 듯 눈가를 좁히며 독니를 드러내었다. 혹시..
"내 말을 알아듣는 거야?"
"키이이익──!!"
뭐라는 거야...
"어차피 기를 것도 아닌데... 그냥, 못 알아듣는 걸로 하자."
알아들으면 왠지 찝찝하잖아? 나아가보면 쇠창살의 문은 친절하게도 열려 있었다. 어찌보면 간단한 문제였는데, 굵기만해도 직경으로 삼 미터.. 아니, 일 장(一丈)에 이르는 녀석이 조그만 사각형의 철문을 지날 수 있을리가 없다.
철문 안 쪽으로 들어갔을 뿐인데 녀석의 크기가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이 장(二丈) 정도의 동굴을 빽빽하게 채우고, 고개를 들고 나를 내려보니까 말세에나 있을 법한 괴물처럼 보였다.
"키야아아아아아!!!"
이무기는 나를 집어삼키려는 듯, 입을 벌리며 커다란 흉성을 뿜어내었다. 이류고수 정도라면 즉사할 정도의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압박이었지만...
"시끄러워."
"캬아아아악!!"
"시끄럽다고."
콰앙,
"끼이이이익..!!"
그대로 주먹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검을 쓰지 않은 것은 소지품이 없으니까... 발가벗은 상태로 다니는 건 묘하긴 하지만.. 딱히 춥지도 않고 이것도 꽤.. 아슬아슬해서 좋은데.
단순한 내려찍기에 머리가 반쯤 패였던 이무기는, 갑자기 땅에 주둥이를 처박은 채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끼이이... 끼잉, 끼잉... 끼르루루..."
"뭐야.. 왜 갑자기 기분 나쁘게 우는거야?"
"키이이이이? 끼리릿?"
"...."
"끼릿?"
..이 자식, 아무리 생각해도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 이무기는 한 번 맞아보곤 갑자기 정말로 눈을 내리깐채 키이잉 혹은 끼이잉 같은 소릴 번갈아 내고 있었다.
"역시 내 착각이지? 에이~ 뱀이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 없잖아."
스륵스륵,스르르륵,
하지만 이번에도 녀석은 따에 파묻은 고개를 휘저으며 고개를 살살 저었다.
"내 말을 알아 듣는다고?"
"키잇! 키잇!"
고개를 살짝 들어서 끄덕끄덕 하더니 다시 처박고 눈을 깔았다.
"야! 너 뱀이잖아. 니가 어떻게 사람 말을 알아들어!"
"끼잉. 낑낑. 낑.."
"사기치지마! 이 뱀대가리 새끼야!"
"끼이이잉!"
이 놈이 어디서 눈을 부라려? 확 그냥 목을 졸라주려다가 아무래도 두터워서 포기했는데 이 녀석은 내 손짓만으로도 깜짝 놀라서 목을 움츠리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낑낑.. 끼이잉.."
"아니, 자꾸 이러면 내가 나쁜 녀석 같잖아..."
"끼이이잉.."
숫제 울 것 같은 표정이다. 뭐야 이 녀석, 진짜 영물이야?
"낑낑..."
"그거 듣기 싫어서 바로 배를 째고 싶어."
"키이이이? 키잇, 키잇??"
"뭐? 그런 소리 낸 적 없다고?"
끄덕,끄덕.
녀석과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눠본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뱀은, 아니 이무기는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 게다가 주먹맛을 본 녀석은 빗자루마냥 머리를 처박고 굴종의 자세를 취했다.
"어.. 그래, 알아듣는 구나? 그럼 좀 미안한데 영단을 가져가도 괜찮을까?"
"키이이.. 키이이잇!"
"괜찮다고?"
"키이이이익!!! 키엑! 키엑! 키에에엑!"
"좋다는 거지?"
쾅! 쾅! 쾅!
이무기가 답답하다는 듯이 동굴벽에 대가리를 처박다가 고개를 마구 도리저었다. 대체 눈은 왜 저렇게 열심히 깜빡이는지 저러다가 눈에서 빛이 나올 지경이다. 흉악한 뱀 녀석치곤 불쌍해 보이긴 하는데..
"하지만.. 너 살려준다고 영단이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
퐁!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 안에서 뱉어낸 물건은 침이 아니라 뭔가 반짝거림이 멈추지 않는 물건이다.
"구..슬?"
"키이이.. 키이이..."
그것은 광채가 영롱하고 우아했다. 청록색을 은하수처럼 품은 것이 고사의 화씨옥이 과연 이렇게 생겼을까 싶은 광채가 났다. 뱀 아가리에 들어 있던 게 찝찝하긴 하지만 수려한 빛을 뿜어내는 것이 상당히 값진 보화인 게 틀림없는데..
"설마, 너 이거..."
끄덕끄덕.
"뇌물이야?"
찡긋.
여기까지 와서는 황당해졌는데 녀석이 갑자기 빙그르르 굴렀다. 구르면서 혀를 날름날름거리는데.. 위협적으로 소리를 내거나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재주를 봐달라는 듯 열심히 눈을 깜빡거리며 살랑이고 있었다.
딸랑딸랑~
이거 지금 애교 부리는 거야? 아니겠지? 라고 말하기도 전에 미친듯이 무구하고 간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저는 독도 하나도 없구요. 사람 한번 물어본 적 없는 착한 뱀이요' 대충 그런 느낌... 아니 뭐 이런 뱀이 다 있어?
뭐, 놀라운 건 놀라운거고.
"미안한데 그래도 나 영단이 필요하니까. 역시..."
"키이잉! 키잉! 키잉! 키이이잉!! 이이이잉!"
녀석이 미친듯이 도리질을 쳤다. 아니 지가 무슨 도리깨야? 그렇지만 한 갓 미물도 이렇게 살려고 발버둥을 치니 측은지심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깨달은 사람처럼, 두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놓고 고민하는데.. 내 흔들리는 두 개의 원을 본 녀석이 또 다시 입 밖으로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입 안은 창고와 이어져있기라도 한 건지 이번에도 비싸보이는 구슬이 튀어나왔다.
"흠,흠... 네가 좋은 녀석이라는 건 알겠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알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해도 본래의 목적이.. 역시 나는 재보보다는 영단이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하나 동그란 형태의 뭔가가 나왔다. 입 안에서도 빛을 내는 보석? 야명주? 뭐지 이 녀석? 아니, 보화에 눈이 멀어 원리원칙을 어기면 오래가지 못한다. 안되는데.. 영롱한 빛이.. 내 마음을 흔들어버려.. 하지만, 이성을 찾자. 냉정하게 생각하는 거야.
"으흠, 으흠... 이렇게 아끼지 않고 줘서 고마워. 엄청나게 고맙긴 한데.."
"키이?"
"그래도.. 내가 널 잡으면 얻을 물건이었으니 원래 내 물건 아닐까?"
"키이잉?"
"그러니까.. 딱히 내가 받은 건 없잖아?"
"키에에에에!!!"
녀석의 표정이 뒤집어져서 흉성을 질렀다. 어딜 뱀 주제에. 영약으로 교환되고 싶어?
"끼이잉.."
토,토토톡, 톡톡톡..
살기를 살짝 뿜어줬더니 다시 온순해졌다. 그리고 되도 않게 헥헥 거리더니 또 다시 뭔가를 뱉었다. 데구르르르.. 그 입안에서 튀어나오는 옥들. 척 보기에도 범상치가 않다. 광채가 영롱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여의주인줄 알겠다.
돈이라면 쉽게 벌 방법이야 많지만.. 그렇다고 공짜로 번 돈이 싫어지는 건 아니잖아?
"으음... 뭐.. 내가 딱히 이런 걸 받아서 그런 건 아니고, 사람 말을 알아듣는 생물을 죽이는 것도 가슴 아프니까... 하긴, 어떻게 이렇게 선물도 주는 착한 뱀을 죽이겠어. 그렇지?"
끄덕끄덕!
"하긴, 난 원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니까... 하아, 나도 마음이 약해서 탈이라니까."
"키이이..?"
내 말을 들은 녀석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데 눈초리가 불손하다. 뭐랄까,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는 사기꾼을 보는 듯한 눈빛? 그럴리가, 여기에 지적생명체라곤 나하고 녀석 뿐인데. 혹시 뒤의 귀신을 보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너.. 설마 내 말을 못믿는 거야?"
도리도리도리강호의도리, 녀석은 고개가 두 개로 늘어날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좋아. 그럼... 앞으로 너는 이제부터 영단과 재보를 구해오는 역할을 맡을래?"
"키이이익!?!"
보물 욕심이 있는지 눈빛이 사나워졌다. 이 녀석이 억울해할리는 없고.. 역시.. 짐승과 인간의 화합은 어려웠던 걸까? 아무래도 다음 선택지를 원하는 것 같다.
"그럼 영단 될래?"
"시이이이..."
갑자기 다시 착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럼.. 그냥 뱀이나 이무기라고 부를 수 없으니 어쩔까... 짭룡이 정도가 좋을까?"
"키이이익!"
"뭐? 좋다고?"
"키익! 키익! 키이이익!"
"그럼 영단이?"
"키,키이이..."
"짭룡이 좋지?"
끄..덕..끄...덕.
아까부터 고개를 너무 흔들어대더니 저럴 줄 알았다. 엄청 힘겹게 끄덕여댄 이무기. 짭룡이를 획득했다. 철창을 고정하던 부분을 강기로 잘라내자 녀석이 알아서 빠져나왔다. 그럼.. 영단도 얻었겠다. 돌아가면 끝?
"너 나가는 길 알아?"
"키익."
"그럼 안내해."
그렇게 밖으로 향하려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뱀 대가리, 자칭 타칭 배교주와 조우했다.
"어... 안녕?"
"네년이 어떻게 여기에..?"
배교주는 죽은 부모라도 돌아온 것처럼 눈을 부릅떴는데, 내 옆에 있는 짭룡이를 보고 격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네 년...? 감히 본좌의 이무기를..!"
순식간에 짭룡이가 끌려가기 시작했다. 폼을 잡더니 실제로 실력이 있는 녀석이었다. 아니, 이렇게 넋 놓고 있으면 안되지!
"아, 안돼! 얜 내 소중한 보물상자라고!"
나 역시 동일하게 허공섭물을 일으켰다. 결국 이는 기를 이용한 접인지력(接引之力)의 승부. 배교주의 실력이 상상이상이긴 했지만 나라고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네 년....? 이 정도의 실력을, 숨겨두고 있었나?"
"음.. 뭐. 그래. 은둔고수.. 뭐 그런거야."
"그런 년이 왜..."
"어.. 그게..."
너무 뻔한데 다들 이 부분에서 놀라는 건 어쩔 수 없나... 근데 반응이 좀 달랐다. 혼자서 주억거리더니 납득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랬었군. 크으윽..! 역시, 황록색 그 놈이..! 더러운 정파놈들..!"
대체 뭐라는 거야 자꾸? 혼자서 얼굴을 붉히며 난리를 치고 하니 뭐라고 해줘야할지 모르겠다. 역시 무림인 놈들은 상종하면 안된다. 아, 나도 무림인이던가..?
꾸우우욱──
서로가 양 쪽에서 기운을 발휘해 짭룡이를 잡아가려는 상황. 짭룡이는 중간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낑낑거렸다. 이러다가 찢어지기라도 하면 안되는데 모처럼 친구가 된 내 뱀가죽 주머니가..!!
"버텨! 구해줄테니까!"
"끼이이잉!! 키오오오옷!!!"
어쩐지 녀석이 더 괴롭게 울어댄 것 같지만 아무래도 좋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어!
"끼이이이이!!!!"
다행히 내 이런 각오(?)가 통했는지 먼저 손을 놓은 건 배교주였다.
"크윽, 이 년...! 이무기를 죽일 셈이냐!"
"그럴리가 없잖아! 뱀대가리 아니랄까봐 잔혹하네. 데려가는 거잖아?"
"감히! 본좌의 것을 탐한 댓가를 치루게 해주마..!"
슈화아악!
배교주는 힘싸움을 하다가 밀리니까 두 손을 뻗어 기습했다. 그 쌍장에서 내뿜어지는 묵직하고 강력한 혈기(血氣)는 나조차 깜짝 놀라서 뒤로 피할정도로 엄청났다. 대체 뭘 처먹고 지냈는지 강기의 밀도가 핏물처럼 짙다. 내가 몸을 날려 뒤로 피하자 그대로 다가오며 좌장(左掌)과 우장(右掌)를 번갈아 내밀었다.
"어디 이 것도 전부 피해봐라!"
혈우폭멸장(血雨爆滅掌). 초식을 펼치기 전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손을 뻗을 때마다 쏘아져 동굴 한켠이 펑, 펑 터져나가며 커다란 손자국이 발걸음처럼 찍혀나갔다. 웬만하면 조금 맞아주고 신음이라도 질러주고 싶은데... 저건 안되겠다.
내가 회피하자 배교주는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는지, 핏발을 세우며 미친듯이 출수하기 시작했다.
파박,파파바바바박!!
손을 내 뻗는 속도가 아까의 배 이상으로 빨라졌다. 마침내 그 손바닥이 안개처럼 상반신을 가릴 정도로 분열하더니 동시에 수 십개나 되는 장력이 연이어서 빗발쳤다.
콰과과광!
방금의 일격으로 느낀 건..
"오빠.. 너무 세! 조금만 살살!"
"이, 이 년이..? 감히 본좌를 능욕하려 들어?! 반드시 네 년의 가랑이를 찢어 죽여주마!"
찢어주는 건 좋지만.. 죽이는 건 좀 취향이 아닌데? 센스 없긴. 아무래도 대충 져주고 다시 음양교합을 꾀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한데 아직도 진심을 낸 게 아니었는지 무공의 특징인지 장력을 출수하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그러다 조루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닥쳐라!!"
뭐, 속사(速射)라고 불러줄까.
파바바바바바박!!
계속해서 쏴댔고, 나는 피했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 건지...
"네 년, 네 년 때문에..! 본좌의 백년대계(百年大計)가!!"
"백년 대게..?"
"이 년.. 용서치 않겠다. 크으으으으..!!!"
갑자기 얼굴이 변해갔다. 원래가 뱀상이었다면 이제는 진짜 뱀처럼 변하고 있었다.하지만 무리가 있었는지 혈관이 솟구치며, 때때로 얼굴이 불룩불룩 부풀고 있었다.
"그거.. 안전해보이지 않는데. 괜찮아? 그러다 진짜 뱀 되면.."
"으아아아..!!! 내 기필코, 네 년의 가랑이를 찢어죽여주겠다!!"
끄윽, 끄륵, 끄르르르륵!!"
"우엑.."
얼굴이 시뻘개져서 울긋불긋 터질 듯이 솟은 모습은 여느 괴물 못지 않다. 꿈에 나올까봐 무서운데..
"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비,빌어먹을 놈들.. 내 말을.. 들으란.. 말이다아하아악!!!"
배교주의 전신은 발갛게 변했고, 울긋불긋 솟은 혈관은 몸 안에서 구렁이 들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요동쳤다. 그와 더불어 이 거대한 동공 전체가 무너질듯이 울렸다.
"크아아아아!!!! "
쿠쾅! 쿠과앙! 과아앙!!
이제는 인간이 아닌 음성을 뱉어내는 배교주의 손에서 혈룡이 쏘아졌다. 쏘아진 혈룡은 닿는 모든 것을 파쇄하며 뚫고 지나갔다. 쏘아지는 한 방 한 방에 동굴이 새로 파이고 있었다.
"음.. 멋지네, 잘 봤어. 그럼 이제 가도 되지?"
배교주는 미친듯이 혈룡을 쏴댔다.
"크아아아악!!!!"
광기마저 느껴져서 꿈에 볼까 무섭다. 그러더니 또, 아까처럼 몸을 끓어오르게 했다. 부풀어오르고 더 부풀어올랐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혈룡의 파도. 저건, 위험하다.
그래서 막았다.
어..
그런데 이거... 반격기잖아?
────────────────────────!!!!!!!!!!!!!!!!
일순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충격은 지진이 되어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일대를 완전히 잠식했다. 죽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배교주는 살아있었다.
"끄륵.. 어떻게.. 너 같은.. 계집이.."
"이거! 내가 공격한 거 아니다?"
"..있단.. 말이.. 커흑.. 냐.."
"그러니까.. 내 탓은 아니다!? 오해하면 안돼?!"
"말도.. 안.. 쿨럭..! 커..허어......"
펑!
배교주는 대답을 못하다가 부풀어오르더니 이내 터져버렸다...죽었나?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상반신이 사라진 뒤에도 움직이는 괴물은 아니었다. 집중해서 쳐다봐도 어떠한 기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죽은 게 확실해보였다.
"저기... 좀 일어나봐."
발로 툭툭 걷어찼지만 반응이 없었다. 혹시나 이무기는 거시기만 두 개가 아니다! 하면서 일어나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 음.. 이건 실수야. 실수."
절대 불살의 약속을 어긴 건.. 아니야. 봐, 애초에 내 공격이 아니라 튕겨낸거다. 자기 칼에 자기가 찔린 셈이랄까.. 게다가 나쁜 놈이었으니까 죽어도 싼거고... 그런데 비릿한 피냄새가 묘하게 이상한 기분이다. 기분 나쁜 걸까. 아니면 기분이 좋은 걸까──
찝찝해. 본의는 아니지만, 이런 게. 살인이라는 건가...?
"..으,으응..."
야릇한 감촉이 몸을 휘감는다. 뭘까, 이 기분....
"아..."
잠깐 멍 때렸다. 녀석의 시체를 두고 눈에 띄는 두 개의 늠름한 그곳에 눈길이 간다.. 완전히 색다른 경험이었는데.. 조금은 아쉽다. 뭐. 이미 지나간 일이고.
"그럼... 돌아갈까?"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갑자기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대체 뭐가 일어난 거야?!
황당해서 기감을 끌어올렸다. 일 장, 십 장, 백 장이 되고 나서야 이 동굴 위, 세워져있는 건물 주위에 상당한 인원이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무림 세력으로 느껴지는 기세는 맹렬했고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잠깐, 나 지금 전라인데..?! 황급히 옷가지가 될만한 것을 찾았다. 다행히 반파된 동공 내부에도 무너지지 않은 곳은 있었고, 이 곳에는 시녀가 많이 들락날락거렸기에 근처에서 시녀들 용으로 마련된 복장을 구할 수 있었다. 내가 옷을 입는 동안에 여기저기서 칼부림이 나기 시작했다.
채앵, 챠앙, 콰과앙!
연이어 울려퍼지는 폭음과 칼 소리. 정신을 집중하자 바깥의 상황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추악한 사공(邪功)으로 무림을 혼란케하는 더러운 배교 놈들을 쓸어버려라!!"
"여기가 어디라고 정파의 개들이 왔느냐!!"
날 여기까지 조교해서 옮겼던 노인의 목소리. 아무래도 바깥에선 혈투가 벌어지는 중인지 창칼 소리가 점점 요란해지고, 폭발음이 울려퍼졌다. 정파에서 아예 노는 줄 알았는데 가끔은 일도 하는 구나..
"너희의 사악한 계획은 이미 맹주께서 간파하셨다! 오늘이 너희의 마지막이다!"
"흐흐.. 간파? 이미 늦었다. 지금쯤 그 분께서는 이미 대법을 시행하셨을 것이다."
"뭐,뭣이!?"
"큭큭.. 위선자놈들의 기만을 본교가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했느냐? 이제 곧.. 용제께서 강림하여 전 무림은 피로 물들 것이다!!"
뭔가 진중한 대화가 되어가는 것 같은데... 음. 용제라는 게 반만 남은 얘..를 얘기하는 걸까?
"키이.. 키이이.."
"아, 참."
청취 좀 하고 있느라 본의아니게 잊고 있었는데, 짭룡이가 낑낑거리며 나를 불러댔다. 마치 자기는 어떻게 하냐는 표정.
"너.. 여기 길 알고 있다고 했지?"
끄덕,끄덕.
"그럼 비밀 통로 같은 것도 알아?"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넌 그 길로 가, 음... 내가 시켜놓은대로 영단 찾으면, 저어어기. 천검문이라고 있거든? 거기 가서 뱉어놓으면 돼. 일단은 세 개 정도?"
"...시이이..?"
"응? 네가 어째서 영단을 줘야하냐고?"
"시익, 시이익."
아무래도 뱀이라서 이해가 느린 것 같으니 설명해주자.
"자, 생각해봐.. 나는 지금 너에게 영단 두 개를 줬어. 살려준데다가 죽이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이자가 있으니까 세 개. 이 정도면 뱀대가리라도 이해했지?"
"키이이익!! 키에에엑!!"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줘?"
"끼이잉.. 낑.."
살짝 짜증 좀 냈더니 바로 수긍해버리는 짭룡이. 역시, 영물은 영물이네? 그래. 다들 그렇게 사채를 쓰는거지.
"가 봐. 이자도 있으니까 늦지 않게 갖다줘야해?"
"키이이이..."
그렇게 짭룡이가 통로 한 켠의 길을 따라 스륵스륵 꼬리를 끌며 사라졌다. 저렇게 꿈틀꿈틀 요동치면서 움직이는 걸 보면 왕꿈틀이 같은 이름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들키지 않게 조심해서 가! 아 참.. 그리고 만약 내가 문파에 돌아갔는데 영단 소식이 없으면 알지?"
"키이잉....키익. 키..이.. 키이이.."
내 친절한 배웅에 짭룡이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다가 사라졌다. 투덜거리는 것 같은데 그럴리가 없겠지?
나가는 길을 향해 몸을 반대로 틀었다. 그냥 가버려도 괜찮겠지만, 사부와의 약속도 있고 찾아서 협행을 하진 않아도 협명을 날릴 수 있는 기회까지 져버리면 안되니까.
내 손으로 열고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석문을 여는 장치는 대충 예상이 갔다. 그대로 눌렀더니 석문이 드르륵 거리며 열리기 시작했고, 입구를 나가려는데 입구 앞을 부채꼴로 포위하고 있던 백의무복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차차창!!
"마녀의 출현이다! 방심하지 마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