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어쩐지 그 소녀는 음란한 것 같다, - 1 -
얜 지금 뭐라는 거야, 상식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하나..? 내 의문과 달리 단리현은 내 손을 끌어당기며 열심히 자기 소개를 하고 있다.
"정식으로 소개드릴게요. 저는 단리세가의 단리현이라 합니다. 이렇게 보여도 소가주의 직을 맡고 있고..."
"정신 차리세요. 단리 소협."
"아...?!"
내가 차갑게 쏘아붙이자 단리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렇게 말할 줄 몰랐나.
"..말했잖아요. 어쩔 수 없었으니까. 죄책감 같은 거 가지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아, 으.. 그게.... 그런 게 아니라...."
"부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포장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정말로 아닌.."
"피치못할 상황이라는 거잖아요. 그런 것에 일일히 책임감을 느끼면 세상사가 어떻게 되겠어요? 아, 아랫집 마을이 홍수로 무너지다니 이건 내가 평소에 하늘에 치성을 드리지 않은 책임이다. 하는 수 없지, 우리 집을 나눠주도록 책임을 져야지!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에.. 그, 그.."
"다시 말씀드리지만, 괜찮아요. 정말, 괜찮으니까."
"...."
뭐라고 더 하고 싶은 것 같은 단리현의 손을 두 손으로 마주잡고, 몇 마디를 더 해줬다. 그래, 충동적으로 고백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알겠어?
"....네..."
이제야 좀 알아먹었다. 뭐, 가문의 후계자라는 놈이 일면식 밖에 없는 상대랑 그런 짓을 했으니까. 불안할지도 모르겠지만 걱정하지마. 임신 안하니까. 상황이 수습되어갈 무렵 뒤늦게 황보지은이 사람을 데리고 왔다.
"현아! 백리 공자..! 무사하신가요!?"
황보지은이 사람을 데리고 왔다. 삿갓을 쓴 검객이었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어...?"
설마 마진철이 당했을 거라곤 생각치 못했는지 황보지은이 입을 벌렸다. 그리고 왜 인지 같이 있던 검객도.
"아, 저희가.. 운이 좋아. 어떻게 쓰러트릴 수 있었어요."
"그...렇습니다.. 세린.. 소저의 도움이 컸습니다."
"아.. 새,생각하신 것보다.. 무공이 뛰어나셨군요..."
황보지은은 쓰러진 마진철을 보다가, 어색하게 나를 봤다. 아무래도 옷이 넝마짝이 되어 있었으니까. 미안한 거겠지. 그래도 나름대로 센스가 있어서.. 그녀가 들고 온 것은 한 벌의 무복과, 요상단이었다.
"이걸 받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희를 구해주셨잖아요?"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잠깐 갈아입고 나오면 주위에선 수습을 하고 있었다.
"일행분들 께서 마진철을 소탕하셨다니 다행이오. 그럼... 본인은, 가봐도 되겠소?"
"아.. 이것도, 인연이신데... 대접하고 싶습니다."
"아니오. 나는..."
"밝히고 싶지 않으시다면 묻지 않는 것이 도리겠지요. 보여주신 그 의기에 감사드립니다. 대협."
"...크흠! 그럼.. 이만."
"네 감사했습니다!"
검객이 그렇게 돌아가버리는데.. 어디선가 익숙한데, 그리고 왜인지 저 검객. 자꾸만 날 신경쓰고 있다. 아까야 원체 헐벗은 꼴이라 신경이 저절로 쓰였겠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는데. 뭐, 상관 없나. 신경 쓰이는 건 익숙하기도 하고...
"감사 인사가 늦었습니다. 용소저. 덕분에 저희 모두 무사할 수 있었네요..."
황보지은이었다. 뒤늦게 그녀를 따라 백리진운과 단리현도 인사해왔다.
"..감사합니다."
"감사드려요.."
아까의 일이 생각나는지 얼굴을 붉히며 떳떳하지 못한 둘과 달리, 황보지은은 무척 순해진 투로, 그리고 정말 기분 좋은 얼굴로 감사를 전했다. 회포를 풀고 이럴 마음은 없으니까. 마진철의 처리를 맡기기로 하고 자리를 파하기로 했다.
"아!.. 객잔까지라도 같이 가셨으면 좋을텐데, 벌써 가시는 건가요?"
"아쉽지만 그렇게 되었네요."
"그럼 혹여 산동(山東)에 오신다면 저희 황보세가를 들러주세요. 은의에 보답하겠어요."
"저, 저희 단리세가도요..!"
"보잘 것 없지만.. 백리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그럼...인연이 되면, 또 뵈어요."
"아..."
아까부터 우물쭈물한 얼굴로 날 바라보던 단리현은 뭔가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빠져나왔다. 그 이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단리현은 아주 으스러져라 주먹을 꽉 쥐는데, 저러다가 마진철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건물을 나와 길을 나서는데 묘한 기분이 든다. 느낌 같은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감각이 그렇다.
누군가 날 보고 있는 것 같은데...
흠.. 조금, 놀려줄까?
"아... 덥다."
* * *
화무경. 그는 강호에서 흔히 말하는 절정의 검수(劍手)였다.
젊은 나이에 귀주성 일대에서 쾌검수로 이름을 떨치며 섬전검객(閃電劍客)이라는 명호도 얻었다. 그런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자신만의 문파를 여는 것. 사천무림영웅대회에 참가한 것도 그 홍보를 겸할 생각이었다.
모든 건 순조로운 듯 보였다. 하지만 이게 웬 걸? 용세린이라는 소녀와의 경기로 모든 게 무너졌다. 이젠 진담반 조롱반으로 색마 취급을 받게 되어버렸다. 아직도 그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
촤악!
자신의 검이 믿기지 않게도 그녀의 상의를 찢어발기며 들은 한 마디.
─변명은 그만두세요! 색마!
"끄으윽..!"
제기랄.. 억울하다. 자신은 태어나서 색마라고 불릴 짓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고자라고 불릴 짓을 했으면 몰라도, 색마라니!
애초에 섬전색마.. 아, 아니, 섬전검객이라는 이름도 사파와 흑도의 무뢰배들을 척결하여 얻은 것인데.. 그런 자신이 자신이 농담으로나마 색마의 취급을 받는다니...!
경기장을 나가면서
'저 놈은 색마가 못 돼. 넣자마자 쌀게 뻔하다고~'
같은 비아냥을 들었을 때는 칼을 뽑을 뻔했다.
'안싸고 참을 수 있다고!'
아무튼 개파 직전에 결정적인 오점이 생겨서 그럴 수도 없게 됐다. 인상부터가 당장 정사지간 이하로 굴러떨어질 것이 뻔했다. 그 사건 때문에... 밤잠도 설치게 됐다.
결국 그는 개파의 꿈을 접고, 다시 귀주로 내려왔다.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아야한다. 이렇게 되면 행동으로 보이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귀주에도 그 사건은 퍼져서, 함께 동업하지 않겠냐는 제안까지 받았다.
'망할.....'
그래서 그 제안을 거절하듯, 더 열렬히 사마외도를 척결했다.
─이런다고 네놈이 협객 취급을 받을 것 같으냐! 이 섬전색...
─닥쳐라!
─끄악!
또 다시 한 명의 사파인을 징치하고 협명을 얻기 위해 싸우는 삭막한 나날, 덕분에 무공도 올랐지만 아직 이름을 되찾기에는 요원하기만 하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며 술을 걸치는데 술 맛이 썼다.
'..제길, 끄윽..'
그건 무척이나 힘든 나날이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모조리 그녀 때문이다. 사실 책임을 물을 순 없었다. 책임이 있다면 그런 식으로 피할 수 있을거라 예상치 못한 자신에게 있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 비슷한 고수라면 그렇게 피할 수가 없다. 자신의 속도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는 쾌검수이기에 느끼는 것이다. 그 섬격은 절대로.. 정면에서 그렇게 피할 수가 없는데... 없는데...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굳이 그렇게 피할 이유가 없다.'그냥 들어와서 자신을 치는 쪽이 깔끔하고, 이득이니까.
그럼에도 왜 그녀는 더 좋은 회피 방법 대신, 옷이 찢겨나갈 만한 행동으로 대응 한 거지..?
술이 쓰다.
"크으..."
제기랄..... 여기 있으면 물어보기라도 할텐데.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그건 오해라고, 풀어서 어떻게든 명예를 되찾을텐데... 하지만 그 소녀가 여기 있을리가 없다. 이 귀주까지 뭐 먹을 게 있다고..
"오오... 이거.. 용세린 소저가 아닌가?"
...?!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있었다. 정말로, 그녀가.
틀림없다. 복장은 다르지만 저 비현실적으로 청순가련한 외모, 목소리까지. 그럼 뭐라고 해야할까. 그런데 옆에 있는 놈의 상태가 좋지 않다.
뭐지? 미친놈인가?
추자명... 초일류 고수로 알려진 검수, 그런 추자명이 그녀의 곁에 붙어 희롱에 가까운 짓을 하고 있었다. 초일류? 좋다. 고수니까. 하지만 그 정도로는 자신이 본 그녀에겐 못 미쳤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용세린의 실력은 진짜니까.
'..저 녀석, 죽겠군.'
저 쪽의 문제가 끝나면 그 때 얘기해도 늦지 않다. 괜히 한패라고 오해라도 산다면 돌이킬 수 없어질 테니까...
그런데 반응이 이상하다.
"아.. 하앗... 자,잠.. 까..앗..!"
가슴을 붙잡힌 그 자태는 더 없이 유혹적이다. 어려보이는 외모와 달리 가슴은 꽤나 커서 손아귀에 움켜쥐어졌을 때, 젖봉우리가 손가락 사이사이로 솟구치는 게 절로 드러난다.
비음 섞인 신음과 수치심에 물든 야릇한 얼굴은 다른 사내들이 침을 삼키며 보고 있는 게 이해가 안되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왜...'
저 정돈 떨쳐낼 수 있을텐데..
그런데... 당하고 있다. 왜? 당장 추자명 따위는 절정고수인 자신 앞에서는 한수 접어야한다. 그걸 꺾은 게 그녀고, 그런데도...정작 그녀는 힘이 없다는 듯 당하고 있다.
조금씩 울먹이면서, 기운이 없다는 듯 손쉽게 제압당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강함은 티끌만큼도 찾을 수 없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가설.
'설마...'
일부러...?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나갔다.
아무리 그녀가 의심되고 미워한다고 한들... 그렇게 생각하다니.
아니, 아닐거야. 절대 그럴리가 없다.
마교의 색녀가 아닌 이상 그런 걸 좋아할 리가 없잖아?
사내가 여인의 몸으로 화하지라도 않은 이상에야...
달그락.
술잔을 기울였다.
결국, 지켜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일단의 무리에 의해서 해결되어버렸다. 결과는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다만 도움을 받고 나서 안심한 표정을 보면 비무 때의 내상이 낫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상대가 그 '편왕'이었으니까.
'..끄음..'
쓸데없는 의심이었을까?
하지만 아까의 표정이, 수치스러워하면서도.. 열락에 젖은 듯한 반응이 마음 속의 고민이 사라지지 않는다. 애초에... 귀주로 내려온 이유가 '수련..?' 보통 몸이 제대로 낫지도 않은 상태로 수련을 떠나나?
화무경은 섬전색마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쓴 삿갓을 조금 더 깊게, 눌러쓰며 그녀를 예의주시했다.
그리고 다음날, 황보가의 여식에게 도움 요청을 받아 갔을 때.. 익숙한 향기를 느꼈다. 전투를 치뤘으면서 몸에 제대로된 생채기 하나 없지만, 의복만은 파손된 기묘한 상황.
이거.. 어디선가 많이 보던 상황 아닌가?
그 앞에서 마진철이 나뒹굴고 있다.
마진철은 절정에서도 중입을 넘어선 고수. 일류 수준으로 보이는 세 일행이 잡기엔 요원하고, 자신조차 목숨을 걸어야한다. 그런데.. 용세린의 몸에는 제대로된 생채기 하나 없다
'역시.. 수상하다...'
순간적으로 정체를 밝히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럴 수는 없다.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그녀는 실력을 숨긴 고수... 어쩌면 초절정의 고수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몸을 숨기고 그녀를 추적하기 위해 기다렸다.
"아... 덥다."
'허억...'
화무경은 숨을 삼켰다. 벌건 대낮에 여인이 고작 더위를 이유로, 앙가슴이 드러날 정도로 상의를 잡아당기다니...
저 악명 높은 마교에서 희대의 색공(色功)인 반선음양공(半仙陰陽功)으로 천마(天魔)가 교주에 등극한 이후, 성에 대해서 개방적이 되었다곤 하지만...
"..아.. 더워."
저건 좀, 심하다. 사람이 안 보고 있다고 해서, 무복 치마를 잡아당기다니..! 방금.. 안.. 입은 것 같은.. 기분이..?
...그럴 리 없다.
화무경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초고수의 기감으로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저런 모략을 펴는지도 모른다.
꿀꺽..
이제부턴 정신을 바짝 차려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