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화 〉무림대회 - 2 - (15/73)



〈 15화 〉무림대회 - 2 -

삼차전을 치루고 나면 해가 중천에서 약간씩 기울고 있었다. 과연, 관객석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족히 수 백은 되던 인원이 이젠 오륙십 정도다.

그러니까 16강..? 즉, 지금부터가 진짜 본선과 다름없는 상황. 주위를 둘러보면 좌석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차있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 그냥 미소지어주었다.


"와아아! 용세린! 용세린!"

"우오오오!!! 사.랑.해.요! 우.윳.빛.깔! 용.세.린!"

"분.홍.앵.두! 용.세.린!"

이 자식들, 대체 무슨 구호를 외치는 거야?

와아아아!!!


다음 시합, 나는 주최측의 '여벌의 옷이 없다'는 속보이는 변명과 함께 주최측에 지급받은 붕대로 가슴을 가려서 여민채 비무장 위로 올라섰다. 그 모습에 쏟아지는 함성과 시선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우와아아아아!!!!"

"복장 최고다!!"

"휘이이익!!!"


이 자식들.. 무림인 맞아? 내가 생각한 것보다  음란한 것 같은데.. 뭐.. 좋은 게 좋은 건가? 관객들의 환성을 들으면서 맞이한 이는 적수공권의 상대. 즉, 이번 상대는 권법가였다.


"네. 이번에는 상당히 이름난 실력자가 나왔군요. 군문 격투술의 달인으로 상대의 갑옷을 부수는 독특한 권법(拳法)으로 유명한 부위파괴(部位破怪) 탈의신(奪衣神) 대협 대 천검문 용세린 소저의 승부입니다!"

시작 전 나는 마주 포권을 했는데, 탈의신은 공손해보이는 태도와 달리 작지만 똑똑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후후.. 어린 계집아. 알량한 무공을 믿느냐? 내 손을 안타본 곳이 없어지고 싶지 않다면 어서 기권하는  좋을거다. 뭐.. 하지 않는다면, 더 재미있을 것 같지만 말이지.. 큭큭.."

낮은 목소리로 뇌까린 탈의신은 포권이 끝나자 씨익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어떻게 남들한테 안들린다고 이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끈적한 성희롱을 던지는 거야? 사파인가? 심지어 노리는 곳이 가슴도 아니고 허벅지. 정확히는 가랑이 사이인게 뻔히 보인다.

가슴이라면 모를까, 내가 거기까지 치녀는 아니야!

...뭐, 성의가 있으니  대 정도는 맞아보겠지만.


"우..웃기지 말아요! 그런 말에.. 굴복하리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에요!"


"좋소. 나는 경고했으니 소저가 바라는 대로 해주리다!"


"자... 비무의 개시를 선포합니다!"


"와아아아!!!"


비무가 시작되자마자 탈의신은 정말로 대놓고  복부 밑을 노려왔다. 갑자기 함성 소리가 커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읏....!"


하지만 차마 거길 만져지는 건, 치녀나 다름없으니까.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고, 녀석은 노렸다는 듯 주먹을 내질러. 내 배를 쳤다.

파앙!


"아흐윽..!!"

"아,아앗..! 역시 탈의신! 상대의 방어를 분쇄하는 강렬한 일권입니다!"

대체 어떻게 쳤는지 무복의 배 부분이 터져나가며, 배 안쪽까지 찌릿찌릿한 통증이 전해졌다. 이, 이거 뭐야. 배빵이야? 탈의신은 낄낄 거리는 웃음소릴 내면서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소저.. 타격이 있으신 듯 한데, 지금이라도 기권하는 게 어떻소?"

개뿔이, 녀석은 은근히 항복을 권유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은 내 가슴이다. 대놓고 가슴을 노려주겠다는 선언.  자식.. 생각보다 더 굉장한 녀석이잖아.

"기권 같은 건.. 하지 않아요!"

"그러시다...면!"

녀석은 씨익 웃더니 말을 하다말고 내게 근접했다. 동시에 빠르게  가슴 쪽을 향해 붕대를 노리듯이 쳐왔다.


"꺄아앗?!"


가슴을 감싸서 어떻게 막았지만, 노림수는 다른 쪽. 벗길듯 하던 손 끝이  유두를 잡아당긴 채 좌우로 흔들었다. 뒤늦게 떨쳐내긴 했지만... 가슴  쪽으로 파고드는 찌릿한 감촉에 경기 중에 유두가 서버렸다.

"으..읏..."


"이런, 실수였소. 소저?"


가슴을 노려졌음에도 하지만 해설은 예상과 달랐다. 해설까지 고개를 들이밀고, 보고 있다..

"..바,방금 봤어?"

"보..  거 같아..!"

좋은 귀 덕분에 쑥덕거리는 소리가 저절로 들린다. 그리고 내 몸을 치고 지나간 탈의신은, 내 붕대를 가리켰다.

"이런 이런.. 무척 죄송하오만, 본문의 무공이 이런터라. 이 이상하게 되면.. 소저의 옷이 더 상할지도 모르오만,"


"탈의신! 탈의신! 탈의신!!"

"지금이라도.. 기권하시는  어떻겠소?"

히죽거리는 미소를 보니, 녀석은 이 이상도  게 분명하다. 그 눈이 향하는 곳은... 내 허벅지 사이, 장난이 아니라 음부를, 노릴 셈이다.  녀석.


꿀꺽...

....그럼.. 어디.. 조금만 도와줄까?

나는 보법을 극성으로 펼쳐 달려들었다. 가랑이 사이는 원래 양 허벅지로 보호되고 있기에 실력차가 압도적으로 나지 않으면 노리기 힘들다. 그렇다는 건, 각법이나 동작이 큰 공격으로 틈을 만들어주는 게───

""어, 어어어..................!!?""

갑자기 사람들은 경악한 듯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쿠직.


"..아.. 아?."


털썩.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탈의신이 쓰러졌다. 거기엔 있었다. 하필 좋지 않은 곳이 내 무릎과 부딪힌 녀석이.


"어,어어...?"

"앗, 아아..... 이.. 이런, 일이.. 일어나도 되는 겁니까? 우연이라기엔, 너무도 잔인한.. 상황...!"


"워어어어어........."


관객들 대다수가 술렁이며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게거품을 물고 부들부들 떠는 탈의신은 더는 서지 못했다.

"아아.. 오늘, 너무도.. 큰 비극이 일어나버렸습니다..... 결국... 일어서지 못하는 탈의신 선수.. 이젠 더는 서지 못할지도 모르는.. 탈의신 선수의 패배입니다!"


에에에...


아아아....

장내는 갑자기 초상집이라도 된 것처럼 숙연해졌고, 나도  때 가졌던 사람으로서 무척 미안해졌다. 탈의신은 피맺힌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얼마나 아팠는지 말도 하지 못하고, 입에서 계속 거품을 뿜고 있었다.

다들 승패와 무관하게 충격이 너무 컸는지 아무말도 없었고 황당한 분위기 속에서 승리를.. 선언받았다.

"...으으으..."

저 녀석, 나름 기대가 컸는데... 허탈한 마음으로 앉아 있으면 해설이 변동사항을 공지해왔다.

"아.. 용세린 소저의 다음 시합은 심영 선수가 개인사유로 기권함에 따라 부전승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을 기능부전으로 만들고 얻은 부전승이라 더욱 의미가 깊군요..."

뭐?

"방금  다른 경기가 끝난바, 마지막까지 남은 고수들의 우열을 가리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침울한 목소리를 냈던 해설이 외쳤고, 이제 결승전 직전, 네 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 상황에 사람들이 마구 들떠 소리를 질렀다.

와아아아──!!

햇빛이 내리쬐는 가운데 흑요석 같은 채찍을 들고 나타난 남자. 그의 기세는 이제까지와 달랐다. 화무경이나 탈의신이 고수행세를 하는 정도라면.. 눈 앞의 남자는 정말로 고수라는 감촉이 느껴졌다. 찌릿찌릿, 피부가 떨려올 정도의.. 상대. 검은 독사 같은 편(鞭)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남자.

"무시무시한 투혼으로 파란을 불러일으키며 싸워온 천검문의 용세린 소저... 대(對)! 말이 필요없는 그! 서장 무림의 전설!! 편왕(鞭王) 대협의 대결입니다!"


편..왕? 왕(王)..? 아니  별호가 그래? 거기에 서장무림의 전설? 너무 센 거 아니야?

내 떨떠름한 표정을 본 중년에 가까운 사내는 무척이나 세상을 다  노강호의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위의 반응을 보면  대회에 나오면 안되는 인물인  틀림없다. 편왕도 그 사실을 아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급하게 승천단이 필요하다네.. 그래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후배 앞에 주책맞게 참가하게 되었네."

"편왕! 편왕! 편왕!"

"우오오오오!!! 편왕 대협이다!!!"


확실히 이름값에 걸맞는 명성이 있었는지, 이제까진 입장하면  이름만 부르던 관객들이 편왕을 연호했다. 아무래도 주위의 반응들을 보니  정보가 부족해서 모를 뿐, 이미 이름이 나있는 고수인게 분명했다. 그야 그렇겠지. 무림에서 감히 왕(王)이라는 칭호를  정도면 못해도 대단한 고수라는 의미일테니까.


"이제 갓 강호에 출도한 후배를 상처입히고 싶지는 않군. 이 자리는 양보해줄 수 없겠는가...?"


편왕을 살펴보면 기세부터가 남다르다.  이길 것도 없지만 이겼다간 편왕급 고수가 되는 건데...결국 져야할 것 같다. 이왕 질 거 시원하게 기권해버릴까...?

그런데 저 검고 굵직한 유선형의 물건이 내 시선을 끌었다. 뱀의 머리처럼 끄트머리가 뭉쳐진 순백색의 유광이 도는 채찍은 보는 것만으로도 움찔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저걸로 맞으면 어떤 감촉일까? 아, 아니..! 저런 무기랑 싸우면 어떨까 궁금해진 거니까...


역시 해보지도 않고 패배를 인정하는 건, 나쁜 거겠지? 그렇죠? 사부님?

나는 마음 속 사부님이 답변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기에 사문의 긍지를 걸고, 검 손잡이를 붙잡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편왕께서는 벌써 저를 다 이기신 듯이 말씀하시는 군요. 정 그러시다면 제게 한 수 가르쳐주시는  어떠신가요?"


"오오오오! 용세린 소저, 당돌합니다! 새외팔왕(塞外八王)의 일좌로 군림하는 저 편왕 대협에게 기세싸움에서 한치도 밀리지 않고 있어요! 참고로 편왕 대협은 그 중에서도 수좌를 다툴 정도의 고수죠!"


새외팔왕..? 엄청 센  아니야!?


이 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풍문으로 들었었다. 서열매기기 좋아하는 무림인들이 만든 천하십대고수에는  들어가도, 이십대고수안에는 반드시 들어가는 존재. 그 새외팔왕 중 한명의 눈썹이 무척이나 매서워졌다.


"그럼.. 내 채찍이 무정타 탓하지 말게나!!"


슈아아악!

편왕은 사람 키보다도 훨씬  채찍을 마치  발, 아니 손가락을 펴고 쥐듯이 자유자재로 다루기 시작했다. 같은 크기의 독사가 휘둘러지는 것보다도 훨씬 흉험하고 위험한 일격. 다행이라고 할  있는 점이 있다면, 편(鞭)은 어디까지나 타격무기. 목 등에 대기만하면 이겼다고  수 있는 검과 달리, 맞아도 괜찮다고 우기면 충분한 타격을 주지 못했다고 보일 여지가 컸다. 그럼 그 점을 노리면 되겠지.

챠악!

"흐읏..!!"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종아리를 맞았다. 스쳐맞았는데도 빨간 실선이 그어졌고 옷이 터져나갔다. 조금이지만 내공으로 보호하는 중이었는데..!


...빨라.


강호 경험이 많다고는 할  없지만 출도한 이래로 방심할  없을만큼 빠른 속도는 처음이다.. 명불허전, 애초에 허명일 수가 없는 위치인 것 같긴한데.. 내 망설임을 본 것처럼 편왕이 지그시 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소저, 경고는 여기까지일세.. 일단 시작하면 내 채찍은 용서를 모른다네!"

"그 용서! 구하지 않겠어요!"


나는 달려들었고, 채찍이 검을 붙잡기 위해 휘감아들었지만,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며 찌르는 천류회풍(天流回風)의 초식을 역으로 펼쳐, 역회전으로 빠져 채찍을 떨쳐냈다.

하지만 고수는 고수, 순식간에 채찍을 틀어 빠지고 있는 검 대신 팔을 노려왔다. 거기서 나는 황급히 몸을 틀었다. 역시나. 죽일 위력이 아닌 견제타에 불과하다. 그리고 채찍을 피하자.


짜악!!


"꺄흐으읏..!!!"


채찍은 순식간에 방향이 바뀐 나의 가슴을 때렸다. 뒤늦게 살이 쓸리는 감촉이 터져나오면서 벼락에 맞은 듯이 찌릿거렸다.


"아,아니.. 편왕 대협이 가슴을 공격하시다니요!?"

"..라기보다 이건 손을 보호하기 위한 과정에서 일어난 불상사로군요. 팔을 노려 검을 탈취하려는 시도를, 용세린 소저가 몸을 돌려 받아낸 것으로 보입니다."


결승전이라 그런지 언제 추가됐는지 모를 나이든 노인이 해설을 돕고 있었다.

"아아, 그렇군요! 역시 대협! 여협을 상처입히지 않겠다는 그 마음가짐! 과연 대협은 대협입니다!"

"뭐 진짜 대협이면 편왕씩이나 돼서 이런 대회에 나오진 않았겠지만요."


수리검 같이 생긴 암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추가 해설은 편왕이 별로 마음에 안드는지 불만스러운 어조로 해설을 했다. 아무튼 내가 가슴을 맞고도 물러나지 않자 편왕은 불편한 기색이었다.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소저... 제발 그만하세! 이대로 하다간 귀한 몸에 상처가 남을 걸세!"


"그렇다면 비무에서는 제 승리인 것이겠지요?"

"끄응..!"

편왕은 내 대답에 얼굴을 굳혔다가도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었는지 이제 다리를 노려왔다. 검으로 채찍을 쳐냈지만 채찍은 요사스럽게 궤도를 바꾸어,  다리를 치러 들어왔다. 다리를 감거나 쓰러트려서 이길 셈인듯 한데.. 몸을 기울여서 피했고, 채찍은 그대로 엉덩이에 직격했다.

찰싸아악!!

"꺄흐윽..!!!"

엉덩이를 감싸면서 때리는  쫙쫙 감겨왔다. 우앗, 옷 위로 맞았는데.. 다리가 벌벌 떨렸고, 실린 경력이 옷의 일부분을 터트려서..  번만 더 맞았다간 맨 엉덩이로 싸울  같아..

""우오오옷?!""

"아아닛! 용세린 소저, 몸을 아끼지 않는 방어!! 피할  없다는 걸 깨닫고 아예 둔부로 파괴력을 줄여버렸군요!"

"그렇다곤 해도 너무하는 군요. 후배를 배려하는 거라면 무기를 노려도  것을 자꾸만, 몸을 노리니.. 이거 편왕 대협의 저의가 의심되는 군요."

추가 해설의 말에 편왕이 끄응, 하고 당황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무기를 노려봐야 내 천류회풍에 떨쳐내질테니 당하는 입장에서는 방도가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용세린 소저도 수상하군요. 왜인지 이전 경기에서부터 의아할 정도로 주요부위에 대한 타격이 잦지 않나 싶..."

"닥치고 해설이나 하세요! 몸을 아끼지 않는 여협에게 그 무슨 망발입니까?"


"옳소! 우우! 못난 해설은 닥쳐라!"


"힘내라! 힘내라! 우윳빛깔 용세린! 분홍앵두 용세린!!"


..이,  자식들 설마  알면서?

이제 슬슬 쓰러져야할 것 같지만.. 그러기엔 채찍이 주는 감촉이 너무나도 찌릿.. 찌릿하다. 허벅지 사이로 땀이, 고인다.

이거.... 조금만..  맞아볼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