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무림대회, - 1 -
돈이 없다.
알거지가 된 건 아니지만 산적을 잡아서 채웠을 때와 비교하면 주머니가 아주 얇아졌다. 뒤늦게 떠올려보면 여태 머무는 곳마다 특실이었고 특식이었으니까. 게다가 하필이면 이 존만한 색마놈이 손버릇도 나쁜지 내 돈으로 특실도 모자라서 비싼 술까지 시켜버린듯 하고...
그게 내가 지나갈 때마다 벽보들을 읽은 이유였다. 혹시라도 현상금에 관한 벽보라도 없을까 해서. 지면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범하는 나쁜 사파고수라면 딱 좋겠는데... 혹여나 돈벌이가 없을까 기대하면서 마을을 둘러보는 동안 벽 여기저기에 같은 내용의 방이 보였다.
사천무림영웅대회 개최?
"아, 사천 무림 연합에서 개최하는 대회라오. 소저도 관심이 있소?"
벽에 붙은 방을 보고 있는 내 시선을 느낀 당과 상인이 대답해주었다. 동전을 내고 당과를 사먹으면서 물었다.
"음.. 이게 무엇인가요?"
"사천의 젊은 영웅들이 실력을 뽐내는 자리라오. 아닌 말로 사천에는 이런 게 없지 않았소이까?"
그랬나. 아니.. 사실 난 천검문이 사천 근처에 있는 것도 몰랐는데?
"어.. 그런가요?"
그러고보면 무림행을 한다고 튀어나와서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가령 내가 원래는 용씨세가(龍氏世家)의 후예라는데.. 그게 어디있는지도 몰랐다. 따지고보면 그냥 경황이 없는 상태로 사부를 따라 천검문으로 들어갔을 뿐이니까. 내가 당과를 하나 더 집으며 물어보자 그가 끄덕였다.
"그렇소. 무림맹(武林盟)은 호북에 있고 사도련(邪道連)은 강서에 있으니 보통 그 쪽에서만 대회가 열리지요. 그런데 이 대회라는 게 은근히 또 돈이 되는 일 아니겠소?"
그럴만도 하긴 하다. 현대에서도 올림픽을 유치하려고 난리가 났었는데.. 더 볼거리가 없는 이 세계라면야, 특히나 장풍 날리고 검기 날리면서 싸우는 걸 보고나면 다른 종류의 운동경기 따위는 눈에 차지도 않을 게 분명하다. 말인즉슨.. 사천 무림에서도 대회가 열린다는 거지?
"혹시 참가 조건이 있나요?"
내 물음을 못 들은 척, 헛기침만 하던 상인은, 내가 당과를 하나 더 집어들자, 정보상이라도 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어험, 듣기로는 이번 대회는 젊은 영웅들을 위한 것이라 들었소. 뭐.. 명시적으로 제한은 하지 않았지만 불혹(不惑)을 넘긴 고수들은 꺼리는 분위기라고 하오."
불혹이면 마흔 살인가? 의외로 기준이 널널하다. 무림의 평균 수명이 긴 거랑 관계가 있으려나. 그렇게 당과 값을 받으며 허허 웃는 상인의 얘기를 듣다 벽보를 보았다.
[우승 상품] : 금 삼십냥과 당가 비전의 승천단.
준우승 : 금 열냥
삼 등 : 금 세냥
상금이 상당하다. 금은 대충 은의 스무 배 가치는 됐으니까. 우승은 커녕 삼 등만해도 크다.
"대회에 참가하려면 어디로 가야하나요?"
"관심이 있으시오? 저기 사천무림연합 쪽에서 준비한 연무장으로 가서 심사를 받으시면 되오. 흠.. 기본적으로는 후기지수들의 대회라지만 이름 있는 고수들도 상금을 노리고 나온다는데 괜찮겠소?"
"고수..요?"
"뭐, 듣기로는 많은 고수들의 관심을 끈다고 하는데.. 양심이 있다면 말도 안되는 고수들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말이요."
위치도 들었겠다. 보상도 짭짤하겠다. 망설일 이유가 없으니까 가보자.
그런 마음으로 쭉 걸어가면 연무장이 예상 이상으로 커다랬다. 사천무림연합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만큼 장원하나를 빌릴 재력은 되었는지, 널찍하게 뻗은 사각형의 장원이 인산인해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렇게 장원 안 쪽으로 들어가면 실력 있는자들을 검증하는 듯이 보이는 학사풍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짐을 싸고 있었다?
뭐? 잠깐, 벌써 끝인거야?
"저,저기.. 사천무림영웅대회에 참여하고 싶은데요?"
내 말을 무시하려던 남자는 내 얼굴을 보더니 잠깐 손을 멈췄다. 복장과 얼굴을 쓸어보고는 물었다.
"혹시.. 소저께서는 어느 문하신지?"
"천검문(天劍門)이요."
"..일반 모집은 방금 끝났소만.."
와, 바로 말투 바꾸는 거 보소. 그런데 방금 끝났다고?! 확실히 주위를 보면 그의 말대로였는지 모여있던 사람들의 상당수는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렇게 참가 못하는 거야..?
"저기 그럼.. 참가할 방법이 없나요?"
"오대세가의 일원이거나, 무림맹 소속의 추천장이 있으면 특별 모집에 합격할 수 있지만. 소저께서는 둘 중 어딘가에 해당 되시오?"
"..아니요."
"그럼 아쉽지만 무리요."
"정말로.. 방법이 없나요?"
나는 준비된 탁상에 몸을 기울이며 옷고름을 살짝 풀었다. 가슴이 아슬아슬하게 비쳐보일 만한 위치로.
"이렇게 부탁드려요. 전 꼭 참여해야해요. 어떻게.. 안될까요?"
"어허! 아무리 그렇게 얘기하신다고 해도...오..우.. 야.."
봤구나 이 녀석, 한 번 본 뒤로는 시선이 점점 내 앙가슴쪽으로 모이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앙탈을 부리듯 몸을 흔들어 노출의 폭을 넓혀주었다. 얼굴이 벌개지고 있었다.
"그것이.. 소저의 딱한 사정은 알겠으나..."
알겠으나, 라고 하면서도 내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제발요.. 사문의 명예를 빛내야 하는 걸요."
"어허어엄.. 저한테 말씀하셔도 추천장은.. 오우.. 오오.. 읍.."
"정녕.. 방법이 없나요?"
"그,그게 그..으흐으으으음..!! 크흐으음! 끄끄흠..."
"네...?"
내가 달뜬 목소리로 속삭이며 가슴을 더 기울이자 고민하던 그의 얼굴이 한층 더 벌개졌다. 거기서 슬그머니 몸을 기울이자 몸 이기고 일어나려던 사내는 귀까지 빨개져서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아,알았소! 알았소.. 사전 합격자 중 불참을 알려온 참가증이 아직 남았을테니.... 으,으흠.. 읏흠.. 믓흠!"
"테니..? 주시는..건가요?"
"바로.. 이것이오. 만약 소저가 본인과 하룻... 헉?! 어느새?"
나는 재빠르게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받아들고 고개를 숙였다. 세상엔 친절한 사람이 많다니까?
"감사합니다! 덕분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네요!"
"아, 아니 그──!?"
나는 그대로 거기에 내 이름을 적어서 통에 넣고 날래게 빠져나왔다. 당장 내일 대회라니까 객잔을 찾았다. 참가자들인지 이전과는 달리 지나가는 곳마다 형형색색의 복장을 입은 무림인들이 보였다.
..비무대회라. 조금은 기대되는 걸?
이른 아침, 객잔을 빠져나왔다. 이젠 방을 구할 돈도 없다. 반드시 이겨야해! 참가자의 증표라고 하는 하얀 나무 조각 같은 것을 보여주니.. 장원 앞을 지키고 있던 무사가 나를 들여보내주었다.
예선 수준의 경기니 보러 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주위는 한산했다. 커다란 장원에 잡초처럼 자라난 몇몇이 하품이나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기긴 이겨야하는데.. 그런데 너무 강하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그럼 마음껏 지고 다닐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내공을 최저한으로만 쓰고, 상승무공은 펼치지 않고 해보자.
그렇게 마음먹은게 무색할 정도로, 각오를 다진게 민망해질 정도로 처음 마주한 일차전의 상대는 너무나도 약했다.
챙!
딱 일검.
"아아악?! 내, 내! 횡단보도(鐄斷寶刀)가아아아!!!"
"황금파 왕불운 장외패! 승자 천검문의 용세린!"
"엥..?"
그래도 대회니까, 썩어도 실력이 있겠거니 하고 검을 휘두른 게 실수였다. 단 일검에 상대의 검이 잘렸고, 상대는 잘려나간 황금색의 검조각을 주우러 내려가 장외패로 승리.
"호오.. 잘 베는 걸. 후기지수들 경기도 제법 실력이 있구만."
"천검문이랬나? 기초는 제법 잘 잡아주나보는데...?"
...일차전은 그게 끝이었다.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서 묘해졌다. 아무리 후기지수 들 모임이래지만 그래도 명색이 대회인데.. 이거.. 정말 기술을 펼치지 말고 그냥 검만 휘둘러야하나..? 대기실이 따로 없이 좌석에서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 뒤 담당자가 나를 불렀다.
"용세린, 있소? 용세린?"
"아.. 여기요."
"..음, 당신의 차례요."
승부가 빨리난 건 나만이 아니었나보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니 호협한 인상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으로 벌써 이차전의 시작이었다.
"천검문의 용세린 소저 대 다수문의 강찬호 대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허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좋은 비무를 해봅시다."
"네.. 한 수 배우겠습니다."
내가 포권하자, 상대는 마주 포권하며 웃었다.
"허허.. 한 수라고하니 생각나는 게 있는데.. 본인이 아직 강호초출이고 후기지수일 시절, 사천에서 비무가 성행했었소. 그때 당시에는 모두가 자신의 실력을 알아보고자 하는 혈기가 넘쳤었고 일상적으로 비무가 벌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웠다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문의 제자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었고, 안타깝게도 당시 본인은 좋은 문파 출신이 아니었고, 여기저기에 널리고 널린 평범한 후기지수에 불과했던..."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인상도 호협하고, 태도도 나쁘지 않아 어지간하면 다 듣고 시작하려고 했는데, 도무지 얘기가 끝나지 않았다. 결국 주먹이 먼저나갔다.
퍼억!
"크허어억!!"
"아앗..! 틈을 노린 재빠른 공격! 요,용세린 선수의 승리입니다!"
...으,음.
맞으면서도 설마 설명하는 중에 공격할 줄은 몰랐다는 상대의 배신당한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어쩐지 반칙을 저지른 것 같지만.. 그걸 다 들어주는 건 무리였어....
"후우..."
"다음 비무가 시작될 때까지 대기해주시오."
"..네에."
으윽. 큰일이다. 뭐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 회전이 지나가버렸다. 적당히 실력을 숨긴다고 숨겼는데 강하다고 소문나면 곤란하다. 이러다간 나쁜놈들한테 져주고 몸도 주는... 아, 아니! 져주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패배한 결과 굴욕적이고 수치스럽게도 범해지는 상황과 멀어지는 걸.
다행히 다행히 아직까지 고수라고 불릴만한 이는 안 나오는 듯 싶지만.. 그래도 다음에는 반드시 열세로 이겨야한다. 아주 힘들게.. 간신히, 운이 좋아서 이긴 느낌이면 괜찮으려나?
대기석에서도 경기를 볼 수 있었기에 삼차전이 올 때까지 다른 이들의 비무를 지켜보았지만, 역시나 고만고만하다. 후기지수 대회라 그런가..? 고수 소리듣기도 힘든 이들이 대부분. 하품이 나올 것 같다... 한동안 앉아있으니 또 이름이 불렸다.
"화무경 대협과 용세린 소저는 나와주시오."
"아!"
그렇게 삼차전이 시작되었다.
비무대에 올라서자 검을 들고 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검수가 보였다. 바늘이 나를 찌르려는 듯한 감촉이 든다. 고수라고 불리는 수준인지는 몰라도 아까까지의 어중이 떠중이와는 다른 기세임이 틀림없다.
"섬전검객(閃電劍客) 화무경 대협 대 천검문의 용세린 소저의 대결입니다!"
"소저의 실력이 제법 매서운듯 하나.. 본인은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요."
"저 역시, 만만하지 않을거에요."
간단한 인사가 끝났고, 고개를 끄덕인 화무경이 돌연 비쾌와도 같이 빠른 검격을 날려왔다.
샤악!
과연, 삼차전 상대쯤 되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화무경이 내지른 재빠른 쾌검 덕에 옷고름이 베어져나갔다. 너무 압도적으로 피하지 않으려고 대충 피한 탓일까. 가슴 부분을 여민 끈이 베어서 떨어져버렸다.
"아,아앗!? 이게 무슨 일인가요. 화무경 선수 과연 실전적이군요. 보통 여성의 가슴을 노리는 것은 금기인데요. 망설임 없이 행해버리는 군요?!"
오오오오오!!!!
..갑자기 비무보다 행상들이 팔고 있는 음식들에 집중하던 관객들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정작 화무경은 충격이 컸는지 뜨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소,소저..! 오해요! 나,난 거길 노리지 않았소!"
음 물론 그렇겠지. 내가 비틀어 피했으니까.
"..상관없어요. 그 또한 실전이었다면 있을 수 있었겠죠."
"시.. 시간을 드릴테니, 옷섶을 여미시오."
옷의 일부가 잘려나간 탓에 앙가슴이 살짝 비쳐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화무경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를, 여자라고 우습게 보시는 건가요?"
"그,그게 무슨...!"
"실전에는 그런 행운이 따르지 않아요. 저를 여자라고 얕보지 말아주셨으면 싶군요..!"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검을 내질렀다. 아예 무초식으로 내지르는 것도 그랬기에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파괴력은 약한 천상검무(天上劍舞)의 초반구결을 간단히 풀어내어 공격했다. 이내 수십개로 불어난 검영이 햇빛을 맞아 일제히 산란했다.
차차차차차차앙!!
"아아.. 용세린 선수, 대범하군요. 과연 삼차전까지 오른 여협! 대결에 동정은 필요없다! 가슴 따윈 보여주겠다! 그런 투혼입니다!! 아, 이야기하는 도중 두 선수의 공세가 이어집니다! 아! 화무경 선수의 검격에 용세린 선수의 검로가 끊어집니다!"
해설의 말대로, 하늘 위에서 흩날리는 수십결의 금빛 비단처럼 유려한 검격이 화무경의 호쾌한 연격에 닿을 때마다 토막난 것처럼 튕겨나간다.
칭! 치잉! 스팍!
그리고 다시 검을 나누었을 때, 또 다시 가슴 쪽이 베어졌다. 방금 전까지는 슬쩍 앙가슴만 보이던 것이, 이제 움직일 때마다 베어진 상의가 훌렁훌렁 흔들리며 깜빡거리는 옷자락 사이로 가슴의 살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이건 좀 부끄러운데.. 이렇게 유도한게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우와아아아앗!!
와아아!!!
"아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화무경 선수.. 정말 양심이 없는 건가요?!"
"아,아니... 난 그럴 생각이 아니라!!"
이제 화무경은 내지르던 쾌검도 멈춘 채 손을 꽉쥐고, 미친듯이 고개를 비틀었지만.. 나는 눈은 웃지 않은채 최대한 싸늘하게 입술만 생긋 미소지었다.
"...괜찮아요.. 덕택에 실전에선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경험할 뿐이니까요. 정말 세상에는, 다양한 분들이 있군요."
"아,아니! 그러니까.. 나는, 나는..정말!! 으읏! 끄으윽!"
화무경은 뒷걸음질치며 변명하려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천락화우(天落花雨)의 초식을 펼쳤다. 꽃이 비처럼 내리듯 유려하지만 화려한 검광이 주위를 수놓으며, 공간을 장악해간다. 화무경이 눈 앞에서 쏟아지는 연격에 말을 멈추고 황급히 검풍을 펼쳐냈다.
솨아아악!
천락화우의 검격 앞에서 벌집이 되고 싶지 않다면 검풍의 수법은 꽤 괜찮은 방법이다. 다만, 그걸 내가 예상했다는 게 문제지. 그가 쏘아낸 검기는 스치듯이 내 가슴팍을 찢어내었다. 내가 튕겨낸 그의 검기가 화선지를 찢듯이 또 다시 상의를 북북 그어버린 것이다.
"꺄아아앗!!!"
그대로 물러서 드러난 가슴 일부를 감싸며 지른 외침에 뜨뜻하게 달아올라 있던 회장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이거...? 화무경 선수.. 이거 설마. 고의는 아니겠지요?!"
해설의 외침 한마디에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아니이이..!!!! 여협의 상의를 저렇게 난도질해놓다니이이!!!"
"우우! 화무경 변태 자식!!"
"졸렬하다!!"
"비겁하다! 그렇게 여협의 가슴이 보고 싶었냐!"
그런 반응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정작 그렇게 외치는 녀석들이 화무경이 아닌 내 가슴만 보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아니오!! 아니야!!.. 아니래도!!.. 제발, 제발! 믿어주시오! 소저!!!"
"..이렇게, 만들어두시고도.. 믿으라는 말씀이신가요?"
내 차가운 목소리에 화무경은 아예 죽을 상이 됐다.
"크으으윽...!! 으으으...!!! 일부러 그런게.. 아닌데.. 아닌데에... 으..끄으.."
화무경은 굴욕적인 표정으로 눈을 꾹 감고.. 싸우기 싫은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이러려고 비무대회에 나왔나 자괴감에 시달리는 듯 한데.. 반대로 관객들은 '보러오길 잘했어..!' 라던가, '아직.. 설 수 있구나..!'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게 들렸다.
관객석에서 뿜어지는 기대에 가득찬 시선... 조금,만.. 서비스할까..?
그래서 일부러 승부를 빨리 마무리 할 수 있을 듯한 서툰 검격을 가했다. 과연, 화무경은 내심 포기하며 망설이는 순간조차 검객인 것이다. 바로 쳐올리는 자세로 내 검을 쳐내며 헛점을 찔렀다!
...고 생각하겠지만 함정이었다. 나는 검로를 비틀어 빗나가게 하고는 그 검이 내 나풀거리는 상의 자락을 아예 베어버리도록 했다.
촤라라락──!
상의의 일부분이 개끗하게 베어지며 짧은 순간이었지만 흩날리는 옷깃속에서 마침내 내 가슴이 드러났다.
""우오오오오오?!!?!""
관객들이 섰다. 그리고 해설 녀석은 외치다 말고 내 가슴을 똑똑히 보았다. 다들 말도 안하고 보고 있는데.. 음.. 보여주려고 하긴 한거지만 막상 반응을 보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내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해설은 적막을 눈치챘는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아..아.. 음... 으흠, 으흠! 화무경 선수.. 세 번이나 똑같은 가슴 공격! 이건.. 인간이길 포기한건가요?"
"정파인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여협의 맨가슴을 함부로 드러내게 하다니!"
"한번 더! 한번 더!"
..방금 누구야?
아무튼 내가 가슴을 가리면서 굴욕적인 표정으로 물러서자 화무경은 문자 그대로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몸에서 영혼이 빠지기 직전인 것 같았다.
"소저, 소저, 이건 정말..!!"
"변명은 그만두세요! 색마!"
"새,색마라니.. 내, 내가 색마라니!"
"우우! 섬전검객은 무슨! 섬전색마겠지!"
"..아,아니야! 나는..!!"
"한번 더! 한번 더!"
잡소리는 제쳐두고, 색마소리까지 들은 화무경은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 그 때문일까? 화무경은 쾌검수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될 자세로 검을 꽉 움켜쥔채 억울함을 토로했고, 그 순간 나는 검을 휘둘렀다. 방비를 하려던 화무경은 내 손에 가려지지 않은 가슴을 보고는 한순간 굳어버렸다.
채엥─ 퍼억!
"아아! 검격을 막아서며 이어지는 유수같은 발차기! 화무경 장외!!! 검술을 물론 체술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은 용세린 소저의 승리입니다!!"
"와아아아!!!!!"
"최고다 용세린!!!"
"가슴 쩔어어어어...!"
뭔가 쏟아지는 찬사가 좀 다른 방향인 것 같은데... 뭐, 목적만 달성하면 됐..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