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화 〉거친 짓은 산적에게, - 1 - (8/73)



〈 8화 〉거친 짓은 산적에게, - 1 -

아침에 일어난 소소는 대뜸 무릎을 꿇고 고개를 처박으며 외쳤다.


"사,살려주세요!"

"..응?"

얘는 간밤에 뭐 잘못먹었어? 얼굴이 시퍼래서 겁에 질려있는  보였다. 흥분했을 땐 창든 조자룡처럼 용감하게 달려들어서 박더니 지금은 초선한테도 쥐어터질 정도로 비굴하게 떨고 있었다.


"저,저.. 같은 게 누나랑 했다고 해도 아무도  믿을거에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소소는 내가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사실 양민들에겐 정파니 사파니 해도 무기를 들고 다니는 무서운 사람이라는 느낌이니까.

"야,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거든..?"

"저,정말로요..?"

"그래도 비밀인 건 알고있지?"

"네! 평생 누나와 저만의 비밀로 간직할게요!"

...음, 나 사실 누나 아닌데... 뭐, 아무래도 좋나?


"그래, 그걸로 됐어."


....



산적처리를 계획하고서 방에서 나와 아침 식사를 했지만 도움이 될 정보는 없었다. 그냥 요즘은 무림맹이 잘나간다던가, 국경 밖 이민족이 심상찮다느니, 산에서 이무기를  사람이 있다던가 하는 얘기를 귀동냥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나오기 전 소소에게 물어봤더니, 이 근처에 있는 산채의 위치를 대략적으로나마 들을  있었다. 무슨 유명한 관제묘랑 사당이름까지 짚어주면서 말했으니.. 잘 찾을 수 있겠지?

천검문에 있을 때엔 주변에 산적 같은 건 하나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땅이 원체 넓고,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있기는 있는 듯 했다. 산 봉우리를 향해 걸어가기를 삽십 분. 그러니까 이각(二刻). 허름한 산채가 드러났다. 산채라기보다는 산중의 낡은 모옥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나는 딱히 숨길 생각이 없어서 바로 정면에서 검을 들고 들어갔다.

"웬놈이냐..!"


수염이 덥수룩한 장한이 칼을 뽑아드는 것을 시작으로, 고기라도 구워먹는 건지 둘러 싸고 있던 남자들 넷이 함께 일어났다. 아무말도 안하기도 그래서 검을 뽑고 준비해왔던 대사를 외쳤다.

"너희가 사악한 청경채(淸景寨)의 악적들이렷다! 당장 나와서 나의 검을 받아라!"

"계집이 주제도 모르고 나타났구나!"

....라는 대사를 기대했다. 솔직히, '건방진 계집년에게 이 어르신의 몽둥이 맛을 보여주마!' 라던가, 뭐 그런 거 있잖아? 하지만 나를 마주한 산적의 반응은 좀 달랐다. 수전증처럼 검을  손을 부르르 떨더니 한 발자국씩 물러섰다는  깨닫고 흠칫, 다시 발을 내민 상태로 물었다.


"시,실례지만 어느 파에서 오신 고인이시오..?"

뭐야 왜 존댓말이야. 요즘 산적은 유교 과외라도 받고 있어?


"천검문(天劍門)."

"천..검문?"


산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음.. 우리 문파가 알려진 적이 별로 없을만 하긴 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는지, 수염 장한의 질문에 옆에 있던 두더쥐처럼 생긴 부하가 귓속말을 했다. 다 들리지만.

"그.. 저기  쪽 산에 조그만 문파 있잖습니까."

"조그만 문파? 우리보다 약하냐?"


"그건 모르지만.. 문하제자가 몇 명 밖에 없다고 합디다."


"아!  또 뭐라고.. 감히!  이 년!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부는구나!!"


 녀석들 왜 이렇게 필요한 부분에서만 딱 알맞게 용감해? 두목의 외침에 뒤늦게 굳어있던 녀석은 언제 굳어있었냐는 듯 크게 소리치면서 도를 뽑아들었다.


"오늘 이 검왕객(劍王客) 어르신이 오늘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겠구나!!"

저기.. 검왕객이라면서 왜 도를 쓰는거야?

자칭 검왕객이 도를 들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까의 떨던 자라고는 상상도   없는 패기. 그럼 어디 한번, 가볍게 상대해줘볼까? 그대로 출수한 검왕객의 도가 내 검과 허공에서 부딪혔다.


스캉!

"...어?"

"..어어..?"

나와 자칭 검왕객은 서로가 놀라서 입을 벌렸다. 나는 당연히 이 사악하고 악랄한 산적놈을 징치할 셈... 이 아니라, 싸우는 척만 하다가 범해질 거니까 일 성 공력도 못 되는,  반의 반 정도를 담아서 쳤다. 적어도 내기(內氣)는 일으켜야 여협같잖아? 그런데,  일 합만에 검왕객의 도가 부러져나갔다. 녀석은 설마 내가 이 정도일 줄 몰랐는지 놀랐고, 나도 설마 녀석이 이 정도 밖에 안될 줄 몰라서 놀랐다.

털썩!


갑자기 자칭 검왕객이 무릎을 꿇었다.

"아,아이고! 협사님.. 여협님! 선녀님! 제,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저희 청경채는 아직까지 중죄를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투항이 빨라? 심지어 그 뒤의 녀석들도 낫질에 맞은 짚단처럼 같이 죄다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더니 소리쳤다.


"마,맞습니다! 저희는 통행세만 받았지 나쁜짓도 안하고 지냈습니다! 돈도 조금만 빼앗았습니다!"

"정말입니다! 함부로 사람도 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요!"


"흐음? 하지만.. 너희들.. 이제부터 날 쓰러트리고 데려가서 마구잡이로 겁탈하려고 했잖아?"

"...예에에?!!!?"

...여기가 놀랄 부분이었나? 하지만 깜짝 놀란 검왕객과 산적들은 미친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낸다며..? 벗겨서 엉덩이 때리고, 교육하겠다면서 이리저리 돌려서 겁탈할 셈이었잖아?"

"아이고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그런 끔찍한 짓은 상상하지도 않습니다! 따끔하게 혼을 낸다는 건 말 그대로 혼을 내는 겁니다! 함부로 협객 놀음을 하지 말라고 설교... 아, 아 물론 여협님께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그렇습죠! 저희가 산적이긴 해도 그 정도 도리는 압니다! 겁탈이라니요! 무서운 말씀은 그만둬주십시오!"

도리는 개뿔! 마귀도 도망갈만큼 흉악하게 생겨서는.

"흥, 돌려말해서 피할 생각하지마. 결국 벗겨서 여기저기 쑤시면서, 몸의 설교를 하려했다는 거지?"

"히이익.. 여협.. 어,어찌 그런 파렴치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런 짓을 하면 마누라한테 맞아 죽습니다!"


"듣기만 해도 무서운 소리입니다요... 관군한테 잡혀갈 일 있습니까?!"


관군이 여기서 왜 나와!?

"끄으으...."


"여,여협...?"

다들 잔뜩 굳어서 어색하게 쳐다보는데..  얼굴만 빨개졌다. 이래선 내가 당하고 싶어서 온 사악한 색녀고, 착한 녀석들을 괴롭히는 것 같잖아. 으으.. 뭐야 너희 산적이잖아...!


....망했다. 심지어 이제와서 '크윽..! 너무 강하구나 검왕객!' 이라고 하면서 무릎을 꿇은 채, '차라리 죽여라! 날 더럽히지 마!' 같은 소리도 할  없고.. 이런 상황에서  덮치게 해봐야 치녀 혹은 색녀로 알려질 게 뻔하다.

"하아..."

대체 이 놈들은 왜 이렇게 약한거야?

"허,억.."


산적들은 내 한숨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몸이 굳었고 손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부디 목숨만은..!"

"착하게 살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집에 봉양해야할 노모가 있습니다! 자식도 있습니다!"

"하,한 번만! 딱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정말 개과천선 하겠습니다!!"

으으..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만해도 골이 아프다. 자연히 이마에 손이 갈 정도다.

"히익! 저, 저 동작은..탄지신통(彈指神通)?!"

"이,일사천살(一射千殺)?!"

"혈우환(血雨丸)?! 으헉!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아니야 이 멍청이들아! 나는 한층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누르면서 녀석들을 노려봤다.

"좋아,. 그럼 살려줄테니 이 주변에서 가장 강하고 사악한 산채를 얘기해봐. 내가 무명을 빛낼만한.. 그런 아주 강한 산채로."


그들은 긴장한 듯 서로를 바라보다가 꿀꺽, 침을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대물채(大物寨)입니다."


"대물채? 거긴 어디지?"

"잠깐!.. 여협께 죄송하지만.. 협의지심(俠義志心)도 좋지만 거긴  가시는 게 좋습니다. "


응? 산적 주제에  걱정해주고 난리야? 언제부터 좋은 녀석들이었다고.. 인상을 쓰고 쳐다보자, 옆의 좀도둑 같이 생긴 남자가 손을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거기는 뒤,뒷소문이 안 좋습니다! 특히 여협 같은 여성이라면.. 더더욱 위험합니다!"

"그렇습니다. 산적이라고 다 같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상습적으로 근처의 마을을 털어가는데.. 여자들을 납치해서 강제로 범하기까지 하는 악독한 놈입니다!"

"게다가 한 놈이 그런 게 아니라 몇 놈이나 달라 붙는다고도 합지요. 그 놈들은 같은 도적이라지만 인도를 버린 패악무도한 짐승 들이 틀림없습니다요!"


그래! 바로 그게 내가찾던 놈들이야!


"그래...? 그래서 어디에 있는데?"

나는 어서 말하라는 듯이 턱짓을 했지만 자칭 검왕객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되오!! 비록 여협이 우리 산채를 치러온 적이었으나.. 지금은 새로운 삶을 살도록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기도 하니, 그곳으로는 보낼 수 없소!"


"맞소, 여협! 몸을 보중히 하시오!"

"말해. 어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럴  없소! 차라리 이 장모의 목을 베고 가시오!"

아 진짜!


"지랄하지마! 빨리 알려달라고!  안해!?"

쿠과과과광!

"으아악!  죽습니다요!!"

"으하아악! 여협이 노하셨다! 우리를 죽이려 하신다아아!!"

"두목! 그냥 말해줘버려요!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럽니까아!"


"끄억.. 저,  쪽으로!! 저 쪽으로 쭉 삼십리 정도 가셔서 보이는 봉우리의 아랫편에 있습니다!!"


결국 내가 살기를 있는 족족 흩뿌린 뒤에야 순순히 불었다. 자식들이 빨리 말할 것이지.. 이상한 흉내를 내고 있어. 녀석들의 설명에 따르면 대물채의 위치는 여기서 한나절은 걸릴 거리였지만 경공을 사용하니 반 각이면 충분했다.


 앞의 풍경이 빠르게 바뀌던 중 아무리봐도 산채이다 싶은 곳을 발견했다. 산에 있기에는 상당히 크고 웅장한 건물. 대물채는 첫 인상 부터가 딱 봐도 도적의 소굴이었다. 목책들을 산채 주위에 둘러놓았고, 심지어 그 안의 건물에는 담장을 둘러놓고 있었다. 대문 앞에는 무기를 들고 경계를 서는 이들도 있었다.

"호오... 이 산중에 이 정도 미색의 계집이라니."

"뭔 헛소리야. 여기에 계집이 어딨... 헛!"


내가 걸어나가자 나를 본 두 문지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보아하니 산 길을 헤매는  같은데.."


"고 년, 미색이 죽여주는구나.. "

할짝, 혀로 입술을 핥는 둘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아, 조금 불쾌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상상되잖아.

"맛있게 생긴 년인데.. 보고하면 우리한테 까지 안가겠지?"

"당연한 얘기를."

둘은 눈빛만으로 벌써 합의가 됐는지 둘은 무기를 빼들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방가야. 이건 우리끼리 처리하자. 먼저 잡은 놈이 앞구멍을 먹는 거다."

"크큭.. 좋지! 이 년, 순순히 가랑이를 벌리거라. 그럼 나쁘게는 안하마."


아무래도 제대로 찾은 것 같다. 방가라고 불린 놈이 슬슬 내 오른편으로, 부른 놈이 왼편으로 나를 둘러 쌌다.


사부와 약속한 불살의 조건이 있으니 죽이지 않고 무력화하는 게 힘들지도 모르지만, 다행히 무림인이 상대라면 최고의 개과천선 법이 있다. 누구든지 단전만 때려주면 슥삭!

"..?!"

"..!"

터억! 턱!

"커헉!"

"끄하아악?! 끄..륵.. 왜. .나 만...?"


이미 쓰러진 놈 옆에서 억울한 표정으로 쓰러지는 녀석. 익숙치가 않아서 명치를 친다는 게, 낭심을 쳐버렸다. 으.. 음, 촉감이 좀 안 좋았는데. 설마 싶지만.. 터진 건.. 아니지?

푸슈슈슈...


 바람빠진 소리가 나는 거 같지..?


"내. 가... 고..자라니....! 마,말도 안... 꺼억...!"

미,미안...! 그..래도 죽이진 않았잖아...? 변명을 중얼거려보고 지나가면 대문 앞이다. 산채 주제에  대문의 규모는 웅장해서 누가 보면  속에 지어진 부자들의 별장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근데  놈들.. 기세만 봐선 아까의 자칭 검왕객이랑 차이를 못 느끼겠는데.. 아예 내공을 쓰지 말던가 해야하나? 나는 일단 대문을 걷어차고 들어가서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간악한 대물채의 도적들은 나와서  값을 받아라!"


좀.. 많이 부끄럽지만 아무튼 외쳤다. 그러자 안에서 경계를 서던 놈들과, 건물의 크기에 비해 쓸데없이 커다란 창호지 문이 열렸다. 잔치를 벌이고 있었는지 안에는 술상들이 여기저기 깔려 있었는데 시선이 나와 마주친 산적들이 떼로 일어났다.

"크큭, 또 주제도 모르고 협객행을 하는 애송이가 왔구나!"

"큭큭, 채주님.. 제게 맡겨주시지요. 제가  년의 가랑이를 아주 잘 찢어놓겠습니다!"

아주 좋아, 이런 분위기. 채주라고 불린 호랑이 가죽의 거한은 의자에 앉은 채 무게를 잡으며 나를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네 놈의 톱칼로는 상처가 입지 않겠느냐? 게다가 계집의 몸뚱이를 봐라. 저런 미색에 상처를 입힐 수는 없지.. 그러니 이 거근왕이 직접 애첩으로 삼아주마!"

"누가 네 녀석의 애첩이 된다는거야?"


"되는지 아닌지는.. 곧 알 것이다. 계집!"


경공을 익혔는지 끝자리에서 빠르게 거리를 좁혀서 뛰쳐나온 거근왕이 귀두도를 휘둘렀다.

채앵!


도와 검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휘둘러졌다. 그렇지만 부딪혔다는 걸 소리를 듣고나서야 알 정도로 허접한 경력(經力)... 역도(力道)를 중시하는 도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약하다.

"크흐음!!.. 본좌의 수라파천도(修羅破天刀)를 받아내다니 제법이로군!"

수라파천도? 설마.. 방금의 휘두르기를 말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진지한 표정은 순수한 감탄 뿐이었다. 으으.. 어쩐지 불안불안한데.

"이것도 받아보아라! 본좌의 도는 혼조차 베느니! 수라참혼격(修羅斬魂激)!"


차앙!


"큿.. 제법.. 한수가 있는 년이구나!"

이거... 큰일났다. 방금 부딪힌 두 번째 수로 검을 부서버릴 뻔했다. 직접 검을 부딪혀본 녀석의 표정이 굳었다. 아아, 심장이 떨려온다.  놈이 주변에서 제일 흉악한 녀석이라는데 실수로라도 쓰러트려버리면 안되는데.. 어떻게든 사용하는 힘을  줄이지 않으면.. 일부러 손의 힘을 더 약하게 쥐며 녀석의 도를 막아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머리카락 한 올과 두 올 정도의 무게는 알기 어려운데.. 으으, 얼마나 줄여야하는 거지? 다행히 몇 번  초수를 나눠보던 녀석은 갑자기 신이나서 도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러면 그렇지! 기세가 좋았던 것은 처음 뿐이더냐!"


차앙! 차창! 챠카앙!


"흐하하! 어떠냐! 수라마참무(修羅魔斬舞)! 방금은 조금 봐주었지만 이것이 본좌의 진정한 실력이다!!"


"오오오.. 역시 채주님..!"


"신기에 달한 도법!!"


"귀두도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응 그거 참 굉장하네... 정작 눈 앞에서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게 거근왕의 도격이 쇄도했고, 나는 열심히 그것을 밀리는 척 막아냈다. 좀 빨리 쓰러트려줬으면 싶은데.. 처음에 잘 싸웠던 상대가 갑자기 쓰러졌다간 의심할지도 모르니까 어떻게 적절히 쓰러져야한다. 그러니 힘내라 거근왕!!

...

차차앙! 차앙! 차아앙!


벌써 겨룬 초수가 백을 넘어가도록 녀석은 날 못 끝냈다. 아니, 왜! 왜! 왜! 왜 아직도 못 끝내는 건데?! 나는 지금 내공도 봉인이나 다름없고 변변찮은 초식도 안썼는데 왜!

"크흠.. 제법이구나! 과연 이 몸에게 도전할 자격은 있다. 아주 오래간만에 조금 진심을 내볼 상대를 만났구나!"


알았으니까 이마에 흐르는 땀은 닦고 말해줘...

차라리 도격을 못 이기는  날아가줄까? 아니면 힘이 다한 척 풀썩 주저앉아줄까..? 그렇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퍼억!


"이 년!"


타이밍 좋게 나를 옆에서 걷어차는 산적 부하. 훌륭해! 너 뭘 좀 아는 구나.. 가 아니라, 아차, 넘어져줘야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전에 재빨리 넘어졌다.

털썩.

"아윽!!.. 무인의 승부에서 비겁하게 합공이라니..! 이, 이런 파렴치한.. 놈들.."


그대로 다리가 풀린척 주저앉으며 말했더니 산적들이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크게 비웃어댔다.

"크하하하! 비겁한 게 어딨나! 이기면 그만이지!"

"얘들아, 그래도 살살해라! 너희 사모님이 되실지도 모르는 분 아니냐!"


"아암, 그래야죠!"


"누,누가.. 너희들의 사모냐..! 윽.. 히,힘이..."

나는 엎어진 상태에서 지친척 검을 놓쳤다. 이건 놓은 게 아니라 놓친거에요. 사형? 그렇게 꼴사납게 쓰러진 나를 쓸어본 거근왕이 히죽 괴소를 지으며 웃기 시작했다.


"흐흐.., 계집치고는 제법 끈질겼지만.. 그 정도로는 이 파천수라 거근왕을 이길 수 없다 이 말이야! 알겠느냐! 으하하핫!!"

...누가 파천수라라는거야. 이 놈이 파천수라면 내가 들고 있는 싸구려 철검은 고금제일신검 쯤 되겠다. 대꾸해주는 것도 어이가 없어서 그냥 기절한 척 했다.


풀썩.

"크흐흐.. 이거야 원, 한계까지 힘을 써서 내 도격을 막아냈으니.. 기력이 다해 쓰러진 모양이로군, 얘들아, 뫼셔라!"

"예이!"


 말을 끝으로 누군가 나를 어깨 따위에 들쳐메는 감촉이 들었고, 일부러 눈을 뜨지 않았다.  발자국 걷는 듯 하더니 인기척이 잦아드는 도중 내 허벅지를 받친 손이 슬그머니 엉덩이 사이로 향했다.  손은 점점 은밀해져 슬그머니 엉덩이와 가랑이 안 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두목에게 당해서 너덜너덜해져버릴 거라면..."


뭐, 뭘..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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