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화 〉무림의 어딘가에서. (1/73)



〈 1화 〉무림의 어딘가에서.

"네 년! 이제 두목께서 오셨으니 날뛰는 것도 여기까지다!"

"흐흐, 완전히 발가벗겨서 천천히 즐겨주마!"

"누가  놈들 뜻대로  것 같아..!?"

투패왕(鬪覇王)은 시끄럽게 떠드는 부하들을 무시하고 눈 앞의 상대를 응시했다. 부하들의 음담패설에 새빨개진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는 소녀의 미색은 빼어났다.

"너로구나,  더러운 무리의 수괴가!"

검 끝으로 자신을 지목하는 소녀의 아름다움은 시골 도박장 따위에 있기엔 과분할 정도. 이제껏 무림사화니 하는 미녀들을 본 적은 없었지만 눈 앞의 소녀가 그보다 못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꿀꺽, 잊고 있던 음심이 동하기 전에 그는 말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오오오오! 두목님! 해치워버리십쇼!"


"네 년은 이제 질질 짤 준비나 해라!"


"킬킬! 그깟 칼을 백날 들어봐라! 두목의 철권에 통할지!"

투패왕은 이렇다할 말 대신에 주먹을 내질렀다. 인사하듯 가벼운 듯 보였으나 그 위력은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허나 정작 주먹을 휘두른 순간. 뒤늦게 보고 말았다. 소녀의 입가에 그려지는 미소를.

'.... 잘못, 건드렸다.'

그는 감(感)이 좋았다. 투패왕(鬪覇王)이라는 허명도 그렇게 얻은 것이다. 팔왕(八王)과 같은 위대한 칭호는 아니지만, 애매한 실력으로 작은 지방의 패주를 자처하는데에는 그런 연원이 있었다.

단 일수(一手)의 교환이었지만 그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렸다. 느껴졌다. 사신의 칼날 앞에 목을 들이민 감촉.

'어,어떻게.. 이런....'

방금 소녀는 자신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굳이 무언가를 했다면 맞아주었을 뿐.


'감'은 언제나 정확해 그를 지금까지 살아있게 만들었고, 지금도 반응하지 않는 자신의 감을 믿고 행동한 터였다. 그렇게, 이제껏 그 감을 살려 이길 상대에겐 강하게, 미묘한 자에겐 책략을, 강자에게는 시비를 붙지 않으며 지내왔다.

그런데.. 내지른 주먹이 채 다 거두어지기도 전에 공포에 휩싸였다.



실수했다. 실수했다. 완벽한 실수였다.


손 끝의 감각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의 손은 소녀의 몸에 닿았다. 그러나, 그 끝에 한 줌의 감각도 없으니.. 이것은 검이 물을 베지 못하고(劍不斬水), 주먹이 안개를 부수지 못하듯(拳不破霧), 폭력(爆力)을 무력(無力)으로 만드는 극강의 화경(化經).

'절대..고수...!'


전신에 소름이 쫙 퍼져올랐다. 머릿속의 경종이 미친듯이 울리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상대는 자신으로선 감히 올려볼 수도 없는 존재라고. 도주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기에 저항의 의지조차 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투패왕은 까마득한 고수에게 섣불리 손을  대가의 참혹함을 각오하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예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눈을 떠보니 소녀의 반응이 이상했다.

"크흐윽..! 잡배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나 강할 줄이야..."

...?

객관적으로 자신이 내지른 것은 엄청난 일장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그것을 맞은 소녀의 옷은 새 것처럼 멀쩡하지 않은가? 하지만 소녀는 견딜 수 없다는 듯, 쓰러진  원통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 설마.. 권기점혈(拳氣占穴)?"


'뭐?'

투패왕은 황당해졌다. 아니, 무슨 짓을 하긴 개뿔. 권기점혈은 커녕 내공이 달려서 그냥 점혈도 못하는데... 요즘 점혈은 조상님이 해준단말인가?


"읏, 날.. 어떻게 할.. 셈이야?! 설마.. 날 범하려고...?"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상황에 투패왕은 눈을 깜박였는데 분위기 파악할 줄 모르는 부하들이 소리쳤다.

"우와아아!!! 역시 형님! 급수는 영원하시구만요!"


"키얏호! 외쳐! 투패왕! 투패왕!"


"어이어이! 한방이냐고오!  잡더니 꼴 좋구나 계집아!"


아니, 좀 닥치고 있어봐 새끼들아!


그의 다급한 마음과 달리 대가리에  거라고는 여자랑 돈 밖에 모르는 부하놈들이 킬킬거리며  이긴듯, 소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멈춰! 접근하면 죽는다!'

라는 경고의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지만 나오진 않았다. 그가 말하기 전에 소녀가 또 다시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아아.. 이대로..! 무너진 가문과 부모님의 원수도 못 갚고.. 무림맹에 투신하겠다는 목표를 이루지도 못한 채, 이런 곳에서 쓰러질 수는... 흐으윽.."

마치 뒷배가 전혀 없다고 광고하는 듯한  말을 남기며, 소녀는 갑자기 풀썩 몸을 숙여 쓰러졌다. 자세가 나빴는지, 옷고름 붙잡은 채로 넘어져 가슴과 치마속이 은근히 드러난 상태였다.

'....?'

투패왕은 다시 눈을 깜빡였다. 크다. 어려보이는 인상에 맞지 않게 크다. 게다가 뽀얗다. 아니, 그런 걸 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왜 분명 무시무시한 고수일 터인 소녀가 저러고 있냐는 것이다.

아니면 혹시... 이게  유명한 환술(幻術)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자신은 환술의 무서움을 이해할  있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이라니... 누가 들으면 자신을 미쳤다 할테니 그 위력이 참으로 두렵다.


"요  살결이 굉장히 야들야들해보입니다!"

"흐흐.. 그것 뿐입니까? 엉덩이가 무척이나 실해보이는 게 과연 벗겨놓고보면 어떨지..."

"당장 방으로 옮길까요?! 흐흐흐..."


투패왕은 부하랍시고 달고 다니는 잡배 놈들의 말을 들으면서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혹시 지금 상황이.. 자기만 이해가 안되는 건가?


만에 하나라도 착각했나 싶어 조심스럽게 소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바위도 한번에 부순다는 자신의 파쇄장(破碎掌)에 맞은 흔적따윈 없이 평온한 표정. 고통은 커녕 안마라도 받아 혈색이 좋아진 것처럼 볼에 홍조도 돈다. 게다가 어쩐지 아까보다도 치마 사이가 약간 더 벌어진 것 같다.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착각...이겠지? 착각이어야 한다.

스슥.

그의 추측을 부정하듯 보고 있는 동안 가랑이 사이의 틈이 더 벌어졌다. 아직 손을  놈도 없는데 이제는 그 안의 속곳이 감싼 윤곽이 그대로 보일 정도.

 쯤 되면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수준이다.

'이 년... 대체 뭐지?'


"어허, 이것봐라? 요 년, 단정치 못하게 속곳을 보이고 자빠질 게 뭐냐. 아무래도  어르신들이 도와줘야겠구나!"

"우키키킥!? 가슴도 그런데? 이것 참! 문란한 계집에게 따끔한 훈계가 필요하겠구만!"

"그래! 몸으로 하는 훈계 말이지. 키히히히히... 오늘 계집 하나가 죽어나겠구나!"

'아니야 그러다가 니가 죽어...'

투패왕은 머리를 싸매고 싶었다. 이 자식들이 단체로 미쳐버린 걸까? 목적도 의도도 불명한 절대고수가 범해달라는 듯이 가랑이를 벌리고 있다. 그런 존재가 심상치 않다는 건, 결코 똑똑하지 않은 자신도 알았다.

그럼  놈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함정을 판 걸까? 부하들의 격렬한 환호성 속에서 투패왕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소녀의 외모는 가히 경국지색(傾國之色), 건드리고 싶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사는 게 먼저였다. 그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그것이 그를 이때까지 살려둔 원동력이었으므로.


"돌아간다."

"""예?"""

"귀 먹었냐? 돌아간다고!!"

투패왕의 거친 고성에 부하들은 몸을 떨었다. 분위기가 올라가서 그렇지 투패왕은 무서운 자였다. 대드는 부하의 머리통은 그자리에서 쳐부수는 자였다.


"그,그럼..  계집은..?"


하마터면 투패왕의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지금 어디다가 손을 대는 거냐 미친놈이! 그 손 당장 떼라 이 새끼야!?

"안 오냐?!!"


"예,예!"


"가,갑니다요!"


투패왕의 으름장에 부하들은 입맛만 쩝쩝 다시며 벌어진 허벅지 사이를 바라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발을 떼려는데.


─왜... 안 데려가?

'전음입밀(傳音入密)...?'


아니다. 이건 그것보다 훨씬 고절한 것이다. 벽처럼 자신을 둘러싼 부하들을 뚫고 자신에게만 들렸으니까. 전설의 혜광심어(慧光心語) 쯤 될까? 그런데 목소리가 어디서 많이 듣던.... 저기 널부러져 있는 소녀의...?


─내 말 씹는거야? 죽고 싶어?


찌릿, 발끝이 칼에 찔린 기분에 몸이 굳었다..........덜덜덜덜, 투패왕의 손발이 사정없이 떨렸다. 이 느낌이 틀림없다면 자신은 방금 한 번 죽었다. 엄청난 고수라고는 생각했지만 기운만으로 죽음을 체감케하는 경지라니.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의형살인(意形殺人)이라고?

그런데, 그런 고수가 왜..?


─왜 안 데려가냐고.


이런 요구를..?


"무,무슨.."

"...? 두목님..?"

"왜 그러십니까?"


─데려가기 싫어?

아니.. 싫은 게 아니라 애초에 데려가면.. 할 일이라곤 뻔하다. 뻔한데 데려가란 말인가? 자신들의 거처는 무언가 비밀거점도 아니고, 먹고 자고 계집을 범하기나 하는데 쓰는 곳일 뿐이다.

저런 고수라면 털어서 나올 것도 변변찮은 곳이란 말이다. 투패왕이 울  같은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소녀는 여전히 쓰러진 그대로였다. 설마 이건 무림에 암약한 비밀세력의 계략인 걸까?

─빨리.

계략이든 뭐든 상관없다.  목소리, 망설이면 지금 죽을지도 모른다고 느껴졌다.

"으,으음...! 이런 멍청한 놈들! 계집은 챙겨야지!"

"오옷, 여,역시!"

"크흐으..! 믿고 있었다구요! 두목! 얘들아 잽싸게 챙겨라!"

"그럼 오늘 밤은... 으흐흐흐.."


투패왕은 오늘따라 생각없이 웃고있는 부하놈들이 부러웠다. 아무런 생각이 없으니 좋다고 그녀를 만져댈 것이고, 그 대가는 아마도...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볼 일이 있다. 그러니 너희들..."

─응, 쟤들끼리 하게 놔뒀는데.. 시원찮으면 어떻게 될까?


"기..기다렸다가 함께 하자!!"

"아아니?! 겸상을 해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여,역시 형님..! 크흑!!.. 충성을 다하겠습니다요!"


"우와아아아!!! 투패왕! 투패왕!"

저런 극상의 미녀를 공유하다니! 보통의 흑도놈들은 손대게 하긴 커녕 은자 하나 안 던져 주는게 현실인데, 역시 투패왕.. 그야말로  시대의 참 지도자였다. 그렇게 부하들의 사기가 충천한 가운데 그 혼자만이 끝없는 공포에 떨어야했다.

─기대할게?


'..씨발, 누가 나  살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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