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95. 하와이에서 생긴 일
로비에 나가자 근사한 리무진 한 대가 주차돼 있었다.
내가 나오자 연락을 받았는지 차에서 내려 곧바로 뒷문을 열어주셨다.
난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곤 차에 탔다.
"와, 시원하다."
에어컨 바람이 슝슝 나와 리무진 안은 상당히 시원했고 좌석도 엄청나게 편해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았다.
차는 내가 목적지를 말하지 않아도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아까 그 벨보이가 전달한 모양이네.'
내 예상은 정확했다. 엄마가 얘기했던 음식점에 정확히 차가 멈춰섰다.
난 감사를 표하며 팁을 그에게 주고는 차에서 내려 곧바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어, 왔네?"
"어떻게 잘 찾아왔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부모님과 언니의 모습에 난 한 자리를 차지하곤 털썩 앉았다.
"아니, 어떻게 나만 빼고 다 나가냐."
내가 입을 삐쭉이며 말하자 엄마가 미안하단 표정으로 말한다.
"몇 번 깨워도 안 일어나서 그랬어."
"야, 내가 너 몇 번을 깨웠는데. 네가 안 나간다고 했잖아."
"내가 안 나간다고 했다고?"
"그래."
"...."
내가 말이 없자 세연 언니는 실소를 흘리며 말한다.
"얘 기억 못 하네."
"내가 진짜 안 나간다고 했어?"
"그래."
난 세연 언니가 나한테 거짓말을 치는 게 아닐까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봤다.
그런 내 눈빛에 세연 언니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말한다.
"내가 굳이 그런 거로 거짓말 칠 사람으로 보이니?"
"뭐... 그건 아니지."
확실히 세연 언니가 그런 거로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긴 했다. 그럼 진짜라는 얘기인데... 와인 맛있다고 연신 홀짝이더니 아주 맛이 갔구나?
난 볼을 긁적이며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었고 아빠는 나를 무서운 눈빛으로 째려보신다.
난 그 눈빛에 움찔하며 아빠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피웠다.
"하와이까지 와서 애한테 레이저 좀 쏘지 마요!"
엄마의 타박에 아빠는 그제야 나를 쏘아보던 눈빛을 거두신다.
"와인 맛있다고 홀짝거릴 때부터 내가 알아봤다. 하연이는 어때?"
"뭐, 나랑 별반 차이 없던데."
난 하연이 생각이 나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지금도 자고 있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세연 언니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하연이 걔는 은근히 못 마실 것 같으면서 분위기에 취했는지 네가 따라 주니까 취했다면서도 계속 마시더라."
"아, 그랬어?"
솔직히 잘 기억이 안 난다. 하여간 어제 굉장히 뭔가... 재미있고 행복했던 기분은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래, 난리도 아니었어. 둘이 아주 좋다고 뽀뽀도 하고. 왜 이제야 나타난 거냐면서 아주 꼴값을... 어휴. 어제 그거 동영상 찍어 놨어야 했는데."
"그... 그 정도라고?"
술을 많이 마셔서 뭔가 진심이 나간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제 나 실수한 건 없지?"
내 물음에 세연 언니는 피식 웃더니 말한다.
"그게 이제야 좀 걱정이 되기 시작하니?"
"일단 세나 너 주문부터 해라. 우리들은 다 했어."
엄마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어.
난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것 위주로 주문하곤 다시 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여간 나 실수한 건 없지?"
"그래, 그런 거 없어. 하연이랑 쿵짝이 아주 잘 맞던데 뭐. 누가 보면 둘이 사귀는 줄 알겠더라. 서로 찰싹 붙어서는 아주 그냥. 난리도 아니었는데."
세연 언니의 말에 난 뭔가 점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찰싹 붙어서? 하. 적당히 마실 걸 그랬네. 왜 그런 기억은 하나도 없는 거야? 난 내심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어제 하연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초반에 기억과 살짝 취기가 돌았을 때 귀여웠던 하연이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 이후는 아무런 기억이 없네.'
난 입맛을 다시며 턱을 괴곤 음식을 기다렸다.
#
온종일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스위트룸으로 돌아왔다.
유라 언니는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저녁 늦게 들어와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왔다면서 룸서비스를 시켰다.
"어디 갔다 왔어?"
"네가 촬영한 곳 사전 답사."
"언니 혼자?"
"아니, Vog 쪽 관계자랑 같이."
"지금까지 계속 그럼 사전 답사한 거야? 이 밤까지?"
"밤에 촬영해야 하는 곳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유라 언니는 배가 고픈지 배를 움켜쥐면서 울상을 짓는다.
"배에서 자꾸 소리 나네."
"오늘 뭐 하나도 못 먹었어?"
"아니야, 중간에 점심은 먹었는데 저녁을 못 먹었어."
"아이고... 고생 많았네."
"고생은 무슨, 내가 해야 할 일인데."
밥도 못 먹고 일을 했다는 유라 언니의 말을 들으니 뭔가 굉장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같이 따라갔으면 저녁이라도 챙겨주고 그랬을 텐데. 그쪽에 맞춰서 유라 언니야 움직이기 바빴겠지.
"그러고 보니까 얼마 안 남았구나? 촬영이."
"응, 뭐 되도록 빨리 끝내려고 그쪽에서도 굉장히 노력하는 것 같더라. 네가 휴가 중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일을 아주 열정적이게 하더라고."
"뭐, 휴가야 만국 공통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겠어? 촬영은 뭐... 크게 힘들거나 하진 않겠네."
"응, 웬만하면 다 너한테 맞춰줄 것 같아. 촬영 당일 가봐야 알겠지만 네 눈치를 많이 보지 않을까?"
유라 언니의 말에 솔직히 잘 적응이 되진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Vog에서 내 눈치를 본다니...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됐지?"
Vog에 메인 모델 표지로 들어간다는 것도 여전히 어리둥절한 일이지만 그런 곳에서 내 편의를 최대한 봐주려고 노력한다는 것도 신기했다.
유라 언니도 색다른 경험을 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그런 건 생전 처음이었어. 나한테 엄청 친절하더라. 이번에 내가 너 전담 매니저 됐잖아."
"응."
"그래서 소개를 그렇게 했거든 내가 윤세나 전담 매니저다. 그렇게 말하니까 눈빛부터 달라지더라."
미국에서 전담이라는 말과 우리나라에서 전담이라는 말의 무게가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Vog에서 그런 태도를 보였다는 게 이해가 갔다.
"내가 무슨 촬영 감독 같았다니까."
유라 언니의 말에 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몸은 고되긴 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게 일을 하고 온 것 같아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룸서비스가 왔고 난 유라 언니를 보며 말했다.
"일단 먹고 얘기하자."
내 말에 유라 언니는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긴 엄청 고팠던 모양이다.
하여간 정신없이 식사를 하면서도 내게 브리핑할 것들을 정리하는 유라 언니를 보며 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좀 먼저 보고 있어도 괜찮지?"
"아, 그럼 나야 좋지."
난 고개를 끄덕이곤 촬영 장소와 콘셉트 그리고 착용할 의상들을 쭉 훑어보면서 자체적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난 유라 언니가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궁금한 점들을 한꺼번에 물었다.
"이동은 어떻게 해?"
"Vog 쪽에서 차량 준비해 준다고 했어. 당일에 호텔 로비에 대기하고 있을 거야. 그러면 우린 그냥 그거 타면 돼."
유라 언니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러면 나도 그렇고 언니도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상 갈아입는 장소는?"
"그것도 차 안에서. 의상 차량 한 대가 우리를 따라다닌다고 했거든. 그 차 안에 탈의실도 마련돼 있다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차가 뭐 좀 큰 차야?"
"응. 캠핑카처럼 개조한 차량이라서 갈아입는 게 불편하진 않을 거야."
확실히 미국이 다르긴 다르네.
"내가 이것저것 다 확인해 봤는데 우리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더라. 그쪽에서 알아서 다 해주는 게 많더라. 진짜 넌 그냥 촬영에만 신경 쓰면 될 것 같아."
"진짜 딱 그렇게 만들어주는 느낌이네."
"미국은 미국이야. 확실히 뭐든 환경이 우리보다 좋아. 우리나라도 좋아지긴 했는데 확실히 미국에 비하면 멀었다는 생각이 들더라."
유라 언니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나라가 분명 미국보다 더 우수한 부분도 있긴 하지만 확실히 아직 이런 분야에서 미국을 따라잡으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영화나 드라마 촬영 같은 부분에 있어서 우리나라와 미국의 환경 차이는 무척 크다는 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럼 언니도 일 좀 그만하고 좀 쉬어. 피곤했을 텐데 스파라도 하던가."
내 말에 언니는 살짝 마음이 동하는지 반색하며 말한다.
"그럴까?"
"그래."
난 그렇게 말하며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핸드폰을 액정을 봤다.
뜻밖의 인물에 난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어, 하연아. 너 괜찮아?"
[응, 이제 조금 괜찮아...]
"목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에 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전화를 했을 때 이미 10시 넘었을 때였는데 아마 더 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더 잤지? 내가 전화하고 나서도?"
[응. 2시에 일어났어.]
하연이의 말에 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니, 술도 약하면서 뭘 그렇게 많이 마셨어. 지금은 이제 좀 괜찮아?"
[응, 이젠 진짜 좀 괜찮아. 근데 속이 안 좋아서 뭐 아무것도 안 먹었어.]
"아, 진짜? 레스토랑은 문 닫았고 룸서비스라고 시켜서 먹어. 아니다. 지금 내 방으로 올래?"
[지금?]
"응. 우리 방에 와서 룸서비스 시켜. 어차피 돈은 다 회사에서 반반 내 거든. 스위트룸에서 룸서비스 시키면 굉장한 요리사들이 요리해 주는 거 알지?"
[알지, 알지.]
"유라 언니도 방금 룸서비스 시켜서 먹었는데 그냥 삼키더라 삼켜. 나는 무슨 입에 블랙홀이 달린 줄 알았다니까."
내 말에 유라 언니가 조금 민망한 웃음을 짓는다.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이미지 신경 안 쓰고 급하게 먹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뭐, 내가 편하니까 그랬겠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내겐 더 예뻐 보였다.
[나 진짜 가도 돼?]
"그래, 오라니까. 너 이런 기회 흔치 않다? 너 오면 나도 간단하게 디저트 같은 거라도 먹어야겠다. 저녁 먹었는데 유라 언니 먹는 거 보니까 뭐가 좀 당기네."
"야, 너 이 시간에 뭐 먹으려고?"
"응, 그냥 간단하게... 난 먹어도 크게 상관없던데?"
유라 언니는 내 말에 내 몸을 훑어보더니 굉장히 부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휙휙 내젓더니 말한다.
"그래, 먹어라. 먹어. 디저트 좀 먹는다고 망가질 몸이 아닌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다."
난 유라 언니의 말에 수화기에 대고 하연이에게 말했다.
"들었지?"
내 말에 수화기 너머에서 하연이의 웃음 소리가 넘어온다.
[알았어, 그럼 나 지금 갈게!]
"응."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연이가 왔고 난 곧바로 룸서비스를 시키라고 줬다.
"와... 확실히 좀 다르네."
호텔 객실에서 묵으면 누구나 다 룸서비스를 24시간 제공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객실을 이용하냐에 따라 차이는 있었다.
스위트룸에만 제공하는 요리들이 따로 있는 걸 보고 하연이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더니 말한다.
"나 이거 시켜도 돼?"
"시켜."
난 쿨하게 대답하곤 곧바로 하연이가 고른 것과 디저트 그리고 괜찮은 와인 하나와 와인과 함께 먹기 좋은 것도 하나 더 올려달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돌발 주문에 당황한 것처럼 들리긴 했지만 어쨌든 어렵지 않게 룸서비스를 마칠 수 있었다.
"세나, 영어 잘 한다."
하연이의 말에 난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뭐 그런 걸 가지고..."
영어야 뭐 요즘에 할 줄 아는 사람도 많은데 뭐. 여기에도 뭐 유라 언니도 영어할 줄 알고 세연 언니도 잘 하고.
"하연이 너도 하잖아."
"난 엄청 잘하는 건 아니야. 그냥 겨우 의사소통할 수 있는 정도?"
"그거면 됐지. 뭐 더 필요해?"
난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읽기나 쓰기 같은 건 잘 못 하니까. 진짜 생존을 위해서 회화만 할 줄 아는 거라서."
"원래 회화가 제일 어렵잖아. 읽기나 쓰기야 뭐 우리나라 사람이라면야 어느 정도는 다 하잖아."
내 말에 하연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깨를 으쓱인다.
"그거야 뭐... 주입식으로 배우니까."
난 넌지시 하연이에게 말했다.
"그럼 내가 나중에 한국에 가서 영어 가르쳐 줄까?"
내 물음에 하연이가 눈을 빛내며 날 쳐다본다.
"어, 정말? 나야 좋지!"
나도 좋아.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