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90. 하와이에서 생긴 일
이하연은 나와 동갑이었다. 같은 한국대에 다녔고 나이도 동갑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다른 선수들의 가족들보단 편했다.
"와, 대단하다. Vog라니. 엄청 유명한 잡지 아니야?"
"난 잘 모르겠는데, 들어보긴 한 것 같아."
"얘가 패션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거 잘 몰라. Vog에서 그것도 메인 표지 모델로 나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애한테 맡기다니..."
세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세연 언니를 보며 유라 언니는 키득거리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Vog 관계자세요?"
"Vog 구독잔데요."
그럼 좀 할 말이 없긴 하네. 난 내 입을 스스로 손가락으로 잡으며 손을 들어 보이곤 쿨하게 사과의 제스처를 보냈다.
언니가 보던 수많은 패션 잡지 중에 Vog가 있던 모양이군.
"세나, 너무 귀엽다. 언니도 너무 귀여운 거 아니에요?"
하연이의 귀엽다는 말에 세연 언니는 기분이 좋았는지 잔뜩 높아진 톤으로 말했다.
"진짜 예쁜 애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기분이 좋긴 하네."
"에이, 저보다 언니랑 세나가 더 예쁘죠. 세나는 화면으로 처음 봤는데 질투 날 정도로 예쁘더라고요. 몸매도 좋고."
하연이는 정말 질투라도 난 것처럼 입술을 삐쭉 내밀며 얘기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자기도 예쁘면서 뭘 그래? 솔직히 여기서 안 예쁜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유라 언니가 매니저라고 하면 사람들이 믿겠냐고. 어떨 땐 내가 매니저고 유라 언니가 연예인 같다니까."
내 말에 유라 언니는 펄쩍 뛰면서 말한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니라고 난리를 치면서도 은근히 얼굴을 붉히는 걸 보니까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예쁘다고 하는 데 어느 여자가 싫어할까?
난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언니도 SN 연습생 출신이라면서요?"
내 말에 놀란 유라 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본다.
"그거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죠."
"어쩐지 딱 봐도 SN 상이긴 해. 매니저도 얼굴 보고 뽑는 줄 알았잖아."
세연 언니의 말에 하연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유라를 쳐다본다.
"확실히 유라 언니도 보통 예쁜 게 아니란 생각은 했는데. SN 연습생이신 줄은 몰랐네요."
"그냥 잠깐, 아주 잠깐 한 거야. 연습생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짧았어."
노래를 못 한다고 해도 연기나 배우 그것도 아니면 모델을 했어도 내가 봤을 땐 잘했을 것 같은데 왜 매니저가 됐을까?
"아아. 나도 몰랐는데 무대 공포증이 엄청 심하더라고. 카메라 울렁증도 심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없어지지 않아서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아, 그랬구나."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 새삼 언니에 대한 얘기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왜 매니저가 됐어요?"
"이쪽에 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아. 무엇보다 연예인도 마음껏 볼 수 있고 방송국이나 좋아하는 예능 촬영 현장도 가볼 수 있고. 재미있을 것 같았거든."
"확실히 그런 메리트인 것 같다."
세연 언니의 말에 나도 동감하는 부분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되고 군대 안 가는 게 가장 좋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건 여자 연예인을 볼 수 있다는 거였다.
물론, 아직까진 별다른 접점이 없긴 했다. 프로게이머 생활하느라 사실 소속사도 몇 번 안 가봤고... 하여간 SN은 미녀들이 많기로 소문난 소속사였기 때문에 잔뜩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흐흐... 여성시대도 있고 함수도 있고. 블루벨벳도 있으니까.'
언제고 만난 일이 있겠지? 만나서 밥도 먹고 놀러도 가고 목욕도... 목욕은 좀 너무 갔나? 흐흐... 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웃었는데 그런 내가 좀 이상했던 모양이다.
"세나 징그러운 표정 짓는다."
하연이의 말에 난 정색하며 말했다.
"징그러운 표정이라니. 내 얼굴로 그런 표정 짓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내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는데 다들 인정한다는 분위기다.
내가 봐도 내가 너무 예뻤다. 정말로 거울을 볼 때마다 여전히 신기했다. 뭐, 이제 많이 적응했다고 하지만 이미모는 언제나 사람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이건 해외도 마찬가지네.'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들에게 몰려드는 시선이 상당했다. 단순하게 동양인이 신기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예뻐서 쳐다보는 것 같았다.
도끼 병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느껴지는 게 그랬다. 하연이도 그렇고 세연 언니, 유라 언니 그리고 나까지. 솔직히 어디를 가도 시선이 끌릴만한 몸매에 외모들을 가지고 있었다.
"자자, 그만 떠들고 각자 방에 올라가서 짐 풀고 1시간 뒤에 내려오세요."
감독님의 말에 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1시간 뒤에는 왜요? 각자 알아서 시간 보내는 거 아니에요? 설마 여기서도 팀 스케줄 있는 건 아니죠?"
"팀 스케줄이 왜 있냐? 나도 휴가 왔거든?"
"그럼 왜 다시 다 모여요?"
"그래도 다 같이 만났는데 식사는 한 번 해야 하지 않겠어? SKY에서 마련해 준 자리니까 그냥 넘기기도 그렇잖아."
감독님의 말에 난 그제야 다시 모이는 게 이해가 갔다. 하긴 선수들과 친하긴 했지만 가족들은 오며 가며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던 게 다였다.
부모님들도 같은 일을 하는 자식들을 둔 다른 부모들과의 만남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지 다들 좋아하시는 눈치였다.
그래도 서로 안면은 있어서 그런지 엄청 어색하거나 거북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자, 그럼 1시간 뒤에 다시 이 호텔 로비로 모이겠습니다."
감독님이 고생이 많으시네. 여기까지 와서 가이드 노릇을 하고 있으니. 코치님들이 옆에서 잘 도와주셔서 크게 힘들어 보이진 않으셨지만 휴가까지 와서 선수들 챙기는 것도 힘든데 부모님과 가족들까지 챙겨야 하니 보통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따 봐, 하연아."
"응."
우린 스위트 룸을 이용해서 그런지 숙소의 위치 자체가 달랐고 대우도 달랐다.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에워 싼 수많은 벨보이들이 짐을 들고 이미 가버려서 한결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거기다 굉장히 잘 차려 정장 차림의 남자가 우리를 직접 안내해 줬는데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걸 보니 이 호텔에서 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이쪽입니다."
우린 그의 안내를 받아 호텔에서 가장 비싸다는 스위트룸에 도착했는데 이게 집인지 궁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거 길 잃어버리는 거 아니야?"
부모님 두 분, 세연 언니, 유라 언니. 그리고 나를 포함해서 겨우 5명 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넓어도 되나 싶을 지경이었다.
"그거 농담처럼 안 들리네."
부모님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스위트룸을 보며 입을 쩍 벌리셨다.
쉴 새 없이 눈을 굴리시며 구경하기 바쁜 모습에 웃음이 나와 말했다.
"아이고, 눈 돌아가시겠어요."
내 말에 부모님은 조금 민망했던지 헛기침을 하시며 나를 흘겨 본다.
"곳곳에 위치한 호출 버튼이 있고 24시간 대기하고 있으니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부르시면 됩니다."
그의 말에 유라 언니는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혀를 굴리며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정장 차림의 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밖으로 나갔고 우린 짐을 푸는 것도 잊은 채 각자 돌아다니며 스위트룸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세상에. 어쩜 이렇게 좋니?"
다 따로따로 구경하고 있어서 여기저기서 나는 탄성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와! 여기 진짜 죽인다!"
아빠의 탄성 소리에 난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네?"
그럼 난 이 기회를 노려 방을 선점하겠다. 다들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 난 빠르게 먼저 방을 선점하기 위해 움직였다.
방 위주로 열심히 돌아다니던 도중 난 괜찮은 방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 그렇지. 무조건 여기다."
창문을 열면 바로 야외 테라스가 있는 곳이었는데 바다가 보여서 그런지 더 마음에 들었다.
난 곧바로 짐을 옮겨 방을 차지해 짐을 풀기 시작했다.
"어, 뭐야? 벌써 짐 풀고 있어? 와! 이 방 뭐야? 진짜 좋네?"
뒤늦게 들어온 세연 언니가 나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 방을 둘러본다.
"딱 자기 같은 방 골랐네."
세연 언니는 간단하게 내가 고른 방에 대해 품평했다.
단색으로 정말 심플한 디자인을 하고 있는 방이었는데 딱 내 취향과 맞는 방이었다.
게다가 저 테라스. 창을 열면 무조건 뭐가 있어야 했다. 테라스든 발코니든 그것도 아니면 수영장이든. 하여간 뭐가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경치. 이걸 빼놓을 순 없다. 무조건 경치가 좋아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걸 충족하는 그런 방이었다.
"남들 구경 다닐 때 방부터 잡았냐? 하여간 이래서 똑똑한 것들이란."
세연 언니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곤 날 쳐다보기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자기도 똑똑하면서 왜 저래?
우리 집안에 안 똑똑한 사람이 있나?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 언니도 빨리 방 잡고 짐 풀어. 한 시간 뒤에 어떻게 나가려고 그래."
내 말에 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했다.
"난 그냥 안 풀래."
"왜?"
"방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어. 야, 아직 20%도 못 봤어. 다 보려면 30분은 더 봐야 할 것 같은데?"
세연 언니의 말에 난 웃음을 터뜨리곤 말했다.
"그래, 부지런히 봐라. 내가 봤을 때 30분보단 더 걸릴 것 같다."
세연 언니가 단순히 보기만 하면 모르겠지만 직업병인지 모르겠지만 인테리어에도 관심이 많아서 벽지 패턴이나 커튼의 재질 뭐 그런 것도 꼼꼼하게 보는 스타일이라 내가 봤을 땐 절대 30분보단 더 걸린다고 본다.
세연 언니도 스스로 그걸 아는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그것보단 더 걸리겠지? 지금부터 빨리 부지런히 돌아다녀야겠다. 그런데 유라 언니는?"
"구경 하러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그런가? 방이 좀 넓어야지. 아빠랑 엄마도 목소리만 들리고 어디 있는지 찾지를 못 하겠어."
세연 언니의 말에 난 작게 웃으며 옷을 차곡차곡 개거나 옷걸이에 정리하며 물었다.
"좋아하셔?"
"엄청 좋아하시지."
좋아하신다니까 나도 좋네. 난 미소를 지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 엄청 빨리 간다. 벌써 10분 지났어, 언니."
내 말에 언니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퍼뜩 정신을 차린 표정으로 내 방에서 쏙 나간다.
그리고 다시 들어오기에 난 쳐다도 안 보고 말했다.
"왜 또? 뭐 할 말 남았어?"
"응? 세나가 여기 있네?"
들려오는 목소리가 세연 언니가 아니라 고개를 들었더니 유라 언니가 문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 유라 언니구나. 난 우리 언니인 줄 알고. 아까 거기 있었거든."
"아아."
유라 언니는 굉장히 난처한 표정이었다. 보아하니 가방을 들고 있는 모습이 언니도 이 방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뭐야? 언니도 이 방에 짐 풀려고 했어?"
내 물음에 유라 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짐 먼저 푼 사람이 임자인 거 알지?"
내 말에 유라 언니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알지, 알지."
내심 아쉽다는 표정으로 방을 둘러보기에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기 침대 두 개이긴 한데. 어떻게 같이 쓸 거면 쓰고."
침대 두 개가 있는 방이었지만 그 침대도 가장 큰 킹 사이즈였고, 그 두 침대가 작게 보일 정도로 방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넓었다.
스위트룸에 엄청나게 많은 방이 놔두고 두 명이서 같은 방에 쓴다는 게 어떻게 보면 우스울 수도 있어서 유라 언니에게 의사를 물었다.
"진짜?"
유라 언니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언니만 괜찮으면 난 상관 없는데. 어차피 뭐 방도 넓고 여기 화장실도 두 개나 있으니까. 아까 보니까 테라스에도 화장실이 있더라. 바다 보면서 쌀 수 있겠더라고."
내 털털한 말에 유라 언니가 풋! 하곤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내 제안이 내심 반가운 눈치였다.
"진짜 괜찮아, 세나야?"
"어. 난 진짜 괜찮은데. 언니도 진짜 괜찮아? 여기보다 더 좋은 방이 있을 수도 있잖아."
"방 다 둘러보고 왔는데 여기가 제일 마음에 들더라."
"그래? 은근히 언니도 심플한 거 좋아하는구나."
"응, 이런 심플한 인테리어 좋아해."
유라 언니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 혹시나 몰라 다시 한번 물었다.
"언니, 진짜 괜찮아? 아,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혹시나 언니가 불편해하진 않을까 싶어서. 난 언니랑 같이 지내서 별로 상관없는데. 아, 나 코도 안 골아."
"나도 코 안 골아. 하나도 불편한 거 없어, 나 진짜 좋아. 너 진짜 괜찮아?"
"응, 나 진짜 괜찮아. 난 정말 좋아. 혼자만의 시간 뭐 그런거 딱히 가질 필요도 없고."
내 말에 유라 언니는 안심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진짜 좋아."
글쎄... 내가 더 좋을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