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88. 스프링 결승전
마지막 경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해서 그런지 담언은 조심스러웠고 우리는 반대로 너무나 자유로웠다.
한 번 져도 상관이 없는 사람과 한 번만 지면 끝나는 사람의 심리를 보면 당연히 한 번만 지면 끝나는 사람이 압박이 클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더 악착 같이 경기에 임할 것이고 져도 상관없는 팀은 나태한 마음으로 플레이하다가 물리는 경우가 생길 수 있었다.
비기기만 해도 올라가는 상황을 맞이한 강팀이 상대적으로 약팀에게 지는 이유가 아마 이런 부분 때문일 것이다.
'방심.'
그 어떠한 적보다 강력한 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사실 별로 무섭지가 않다.
"작전인가?"
찬동이는 굉장히 의심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플레이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보기엔 너무 어이없는 다이브 아니냐?"
내 말에 다들 아무런 말이 없다. 다들 그렇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멘탈 나간 모양인데?"
진선 오빠의 말에 상현 오빠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진짜 완전 나간 것 같은데? 아까 미드 다이브 때문에 느낌이 좀 이상하긴 했어."
담언은 무척 잘하는 팀이었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잘하는 팀은 아니었다.
그런 팀은 없다. 그렇게 완벽한 팀이 있다면 세상에 단 한 번도 지지 않는 팀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러한 팀은 전 세계를 뒤져도 없었다.
"이거 그냥 싸우면 이길 것 같은데?"
내 말에 다들 큰 반발이 없었고 난 용을 찍으면서 말했다.
"이거 용에서 한타 각 보자. 그냥 줘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올 것 같거든?"
내 말에 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용으로 모이기 시작한다.
"하와이 가나요?"
진선 오빠의 들뜬 목소리에 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스프링 시즌에서 우승을 하면 선수단 전원 일주일간 하와이로 여행을 보내줬기 때문이다.
심지어 원하는 가족까지도. 최대 5인까지 가능하고 추가적인 인원은 50%로 해준다고 하니 무척 좋은 조건이었다.
게다가 회사 덕분에 데이터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자자, 집중하세요. 하와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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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 시즌 우승! SKY Y1!"
우렁찬 캐스터님의 목소리가 경기장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우린 우승컵에 다가가 함께 들고 흔들었고 찬동이는 어디서 난 건지 샴페인을 가지고 와서 선수들에게 뿌렸다.
특히나 그간 나한테 쌓인 게 많았는지 노골적으로 나를 쫓아다니며 뿌려댄 터라 유니폼이 흠뻑 젖었다.
어깨는 하얀색이고 나머지는 빨간색이라 다행히 속옷이 비치진 않았지만 몸에 딱 달라붙어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게다가 POG에 선정돼 그 상태 그대로 인터뷰까지 해야 했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프로게이머로서 많은 불신을 받았지만 당당히 내 실력으로 우승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라고 스스로 자부했다.
"어, 일단 너무 좋고요. 스프링 시즌 우승은 단순히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Y1은 그래야 하는 팀이니까요. 더 높은 곳까지 팬 분들과 함께 올라가고 싶습니다. 더 많은 응원 부탁드릴게요."
정신없이 인터뷰가 끝나고 우린 대기실에 돌아와 피드백을 했다.
우승한 경기에서조차 잘못된 부분을 찾아 피드백을 하시는 감독님도 코치님들도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실수가 하나라도 나왔다면 우승한 경기라도 피드백을 해야 한다는 감독님의 말이 굉장히 멋있게 들렸다.
"다들 수고 많았고, 정말로 진짜로 축하한다. 다 너희들 덕분이다."
"저희가 감사하죠."
"감독님이 제일 고생 많으셨죠."
"우리 우승 시킨 건 9할이 감독님, 코치님이죠."
마지막 김찬동의 말에 감독님은 피식 웃더니 말한다.
"김찬동은 마음에도 없는 말 잘 하네."
"제가 좀. 헤헤."
바보처럼 웃는 김찬동의 모습에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그런 날 보며 김찬동은 뭐! 하고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럼 회식 해야지?
감독님은 그렇게 말하더니 주머니에서 카드를 하나 꺼냈고 선수들은 곧바로 그 카드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설마 그거 법카입니까?"
찬동이의 말에 우재는 벌써부터 침을 흘리기 시작했고 민영이는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우찬 오빠와 앨림은 얼싸안고 좋아했고, 준현이도 배시시 웃음을 터뜨린다.
'하여간 먹는 거라면 그거 좋지.'
난 작게 웃으며 감독님께 말했다.
"무조건 소고기죠?"
내 말에 감독님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엄지손가락을 비장한 표정으로 치켜세웠다.
옷을 갈아 입고 선수단 전원은 숙소 근처에 있는 소고기 집으로 이동했고 미리 예약을 해뒀기 때문에 도착하니 바로 세팅이 돼 있었다.
회식 장소에는 이전 Y1의 서포터였던 올프 오빠도 있었는데 TV를 통해 자주 봐서 그런지 굉장히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거 라이브 방송이에요?"
내 물음에 제완 오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제가 Y1 유튜브 촬영을 오늘 맡아가지고."
"아아."
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 씨도 유튜브 하시잖아요."
제완 오빠가 굉장히 내게 정중하게 얘기를 했는데 아무래도 초면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나를 굉장히 어려워하셨다.
그 모습에 팀원들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한 소리씩 했지만 그때마다 제완 오빠는 붉어진 얼굴로 '초면이라 어색해서 그렇다고!' 또는 '너무 예뻐서 그래!'라고 번갈아 가며 말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제완 오빠는 내 말에 못 이기는 척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럴까?"
"네. 저보다 나이도 많으시고 Y1도 선배신데."
"에이, 뭐 게임단에 선배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군대도 아니고."
제완이의 말에 상현 오빠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너 군대 안 갔잖아."
"너도 안 갔잖아."
서로에게 극딜을 넣는 둘을 보며 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며 맛있는 소고기를 먹었고 술도 한 잔씩 곁들이며 모처럼 정말 편하게 식사를 한 것 같았다.
포만감이 가득해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나오는 선수들의 얼굴이 다 행복해 보였다.
감독님은 곧장 그 자리에서 선수들을 살피셨다.
"술 그렇게 많이 마신 사람은 없어 보이네."
감독님의 말처럼 적당히 조절해서 마셨기 때문에 술에 취한 사람은 없었다. 다들 회식이 끝나면 숙소가 아닌 집으로 돌아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그럼 다들 고생 많았고 이틀 푹 쉬고 공항에서 보자. 다른 건 다 두고 와도 여권 챙겨오는 건 다들 잊지 말고."
감독님의 말에 우린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선수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난 정말 오랜만에 집으로 향했고, 적당한 취기에 기분이 좋아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안 그래도 언니에게 회식을 할 때 언제 집에 오냐고 전화가 왔던 터라 더 서둘게 됐다.
"언니!"
난 벨을 누르며 언니를 불렀고, 벨이 끝나기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어?"
문이 열리자 보이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세미 언니와 세아 언니의 모습에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왜 엄마랑 아빠가 여기 있어? 어? 큰언니랑 둘째 언니도 왜 여기 있어?"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세연 언니가 말했다.
"너 우승했는데 그럼 당연히 모여야지."
우리 집에 장녀인 세아 언니와 둘째 언니인 세미 언니까지 다 와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언니들 바쁘지 않아?"
"그 바쁜 시간 쪼개서 왔다."
세미 언니의 말에 세아 언니도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승 축하해."
"우승 축하한다, 우리 딸."
엄마의 말에 난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상금이 제법 되던데 그건 N/1이냐?"
아빠의 말에 난 헛웃음을 짓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이는 축하한다는 말은 안 하고 쓸데없이 그런 걸 왜 물어봐?"
"쓸데없긴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아빠의 말에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아빠와 눈빛을 주고 받는 모습에 언니들과 엄마는 실소를 흘렸다.
"얼른 들어와. 회식은 잘 했어?"
엄마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소고기 먹었어."
난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고 테이블에는 간단한 먹거리와 와인이 보였다.
"너 오면 같이 먹으려고 준비했어. 우리도 밥은 다 먹었어."
난 고개를 끄덕였고 마침 잘 됐다 싶어서 말했다.
"아, 아빠, 엄마랑 언니들 다 시간 있어?"
난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물었다. 둘째인 세아 언니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시간은 갑자기 왜?"
엄마, 아빠도 갑자기 내가 시간이 있냐고 하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난 시간 많지."
"세연 언니야 말 안 해도 알고."
"시간은 갑자기 왜? 얼마나?"
세아 언니의 물음에 Y1에서 보내주는 휴가에 대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딸만 넷이었으니 1명의 추가 비용이 더 들겠지만 50%로 갈 수 있으니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하와이? 너무 좋지. 일주일이나 공짜로 보내준단 말이야?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엄마의 말에 아빠는 고개를 장난이 아니란 표정을 지으시며 말한다.
"Y1이 대기업은 대기업이네. 한 선두당 5명이면... 야, 그게 다 돈이 얼마냐? 너희 선수단 인원이 10명 넘지 않아?"
"넘지."
내 대답에 아빠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시며 좋네, 좋아를 연발하셨다.
공짜로 하와이에 갈 수 있게 되자 큰언니는 굉장히 고민스러운 표정이었고 둘째 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직업이 검사, 의사라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운다는 게 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안 되겠다."
"나도."
역시나 세아 언니와 세미 언니는 갈 수 없다고 얘기했고 세연 언니는 벌써부터 어떤 짐을 꾸릴까에 대한 고찰을 하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도 이미 하와이에 가셔서 뭘 할지 얘기를 나누고 계셔서 웃음이 나왔다.
그럼 뭐, 딱 정해졌네.
우린 와인을 마시며 오랜만에 가족들이 전부 모여서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거실에 모여 영화도 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확실히 남자였을 때와는 다르게 세아 언니와 세미 언니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다르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원래는 약간 노예처럼 부렸는데 인간 취급을 해준다고 할까? 평소였다면 나한테 시켰을 일도 스스로 알아서 하는 모습이 굉장히 생경했다.
하여간 확실히 나한테는 좋은 일이었다.
아빠 또한 내게 한결 부드러워진 모습이었는데 역시나 남자였을 때와 나를 대하는 게 정말 판이하게 달랐다.
이게 막내딸의 위력인가?
난 피식 웃으면서 가족들을 천천히 오래도록 쳐다봤다. 영화에 집중해 그런 나를 신경도 쓰지 않아서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여자라는 것 이외에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진 것 말고는 나는 나였다.
여자라는 성별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거부감을 들지 않았다.
그런 내가 너무나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여자에 적응하는 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트랜스젠더도 아닌데...'
여자가 되고 싶었던 생각은 정말 단순한 투정이었다. 정말로 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성에 대한 이질감과 불쾌감을 느낀다고 하는데 난 살아오면서 한 번도 그러한 걸 겪지 못했다.
그래서 남자가 됐을 때 무척 당황했지만... 이상하게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그냥 신기했고 단순한 호기심이 들었다.
'그건... 남자일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내가 남자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나는 내가 남자다. 라고 의식하고 살지 않았다. 그냥 남자로 태어났으니 남자로 살았던 거였다.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내게 일어난 상황도 어떻게 보면 난 그렇게 속 편하게 받아 들였는지 모르겠다.
이젠 여자라고. 아마 내가 처음부터 여자로 태어났으면 아마 난 여자야 하고 생각하고 살았을 것이다.
물론, 그들처럼 중간에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일이 생길 수 있겠지만 어쨌든 아마... 그냥 성별이란 것 자체에 별다른 생각이 없이 살았을 거다.
'어렵네, 어려워.'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작게 웃었다. 내가 성별이 바뀌지 않았다면 아마 이렇게 성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하진 않았을 거다.
"왜 웃어?"
전혀 웃기는 장면이 아닌 부분에서 내가 웃자 세연 언니가 물었고 난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좋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