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85. 스프링 결승전
쇼메이크 선수가 출전하지 않는 게 확실시 되면서 스프링 결승은 사실상 김 빠진 콜라가 됐다.
그만큼 LOM에서 미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페이크라는 이름에 눌려 아마 량준 선수가 제대로 된 기량을 보이지 못할 거라는 게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그건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스프링 결승전에서 데뷔전을 갖는 신예 선수가 데뷔전 상대로 페이크를 만났다.
그 이름만으로도 상현 오빠는 LOM에서 살아있는 전설이자 신이나 다름없었다.
최근 부진했던 시간을 폐관 수련을 통해서 이겨내고 본래의 폼을 되찾은 상현 오빠를 상대로 량준 선수가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밴픽 구도에서 이런 상황이 나올 수도 있어."
경기장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도 감독님과 코치님들은 끊임없이 토론과 분석을 거듭했다.
마지막, 또 마지막 순간까지 어떠한 변수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그들이 몫이라곤 하지만 그 몫을 제대로 해내려면 얼마나 많은 힘이 들어가는지 잘 알고 있기에 정말 순수하게 감독님과 코치진들이 대단해 보였다.
'부담감이 장난 아니시겠다.'
따지고 보면 Y1이란 팀에서 갖는 첫 결승전이다. 이 Y1이라는 팀의 감독이란 위치에서 또 코치라는 직책을 갖고 결승전을 준비한다는 건 보통의 마음가짐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저렇게 해주시는데 지면 안 되지.'
난 미소를 지으며 재파 코치님께서 나눠주신 자료들을 빠짐없이 읽기 시작했다.
"누나 건 엄청 많네요."
옆에 앉은 우재가 자신에 비해서 상당히 두꺼운 종이 뭉치들을 보며 말하기에 난 종이를 옆으로 세워 두께를 한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적은 양은 아니지."
난 몇 장 없는 우재의 종이를 보면서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찬동이가 다시 폼을 되찾자 자연스럽게 우재의 출전 빈도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경험이 적기 때문에 잦은 실수를 저지르거는 경우가 많았고 가끔은 경기의 흐름을 잘 읽지 못해서 합류가 늦다거나 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또한 슈퍼 플레이와 트롤은 한끗 차이라고 하던가? 젊은 혈기에 과감한 결단을 내려 좋은 결과를 얻어내기 보다는 좋지 않은 결과가 많아져 악플도 많아졌고 그로인해 자신감이 떨어져서 그런지 장점이라고 여겼던 피지컬적인 부분도 심리적 요인으로 인해 많이 떨어진 모습들이 보였다.
찬동이도 나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두툼한 종이 뭉치를 들고 읽고 있었지만 우재에게 주어진 서류는 굉장히 단출했다.
'경기에 나갈 확률이 그만큼 적다는 거겠지...'
다른 스포츠와 달리 멘탈적인 부분이 더 크게 경기력에 미치기 때문에 찬동이가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선 교체를 당할 일은 없었다.
그건 사실 어느 포지션이나 마찬가지였다. 쇼메이크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선 축구나 농구처럼 부상을 입어서 교체를 당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부럽냐? 우재 누나 뒤를 이어 메인 오더 한번 해볼래?"
내 말에 우재가 펄쩍 뛰며 엄청 당황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제가 무슨 메인 오더를 해요!"
"왜? 너도 킬각 잘 보잖아."
내 말에 우재가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어후, 아니에요. 전 그런 거 못해요. 그리고 킬각 잘 본다고 해서 오더 잘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킬각 잘 보는 게 기본이긴 하지. 어차피 전체적인 판을 짜는 거니까."
"전 탑 말고는 볼 줄 몰라요. 누나처럼은 절대 못해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있냐? 해보지도 않고 꼬리를 마네? 우재 실망스러운데."
내 말에 우재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죠. 전 그런 쪽으론 재능이 없어요. 누나가 하는 게 가장 베스트에요."
"내가 없으면 어쩌려고?"
내 말에 우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날 쳐다본다.
"누나가 왜 없어요?"
"그럼 내가 천년, 만년 프로게이머 할 수 있겠냐? 알지? 누나 스물 둘이다. 스물 둘."
프로게이머로서 스물 둘이면 상당히 많은 나이였다. 물론, 팀에 스물 여섯인 페이크 오빠나 전성기가 지난 스물 넷인 진선 오빠도 있었지만 여전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도 아마 나이가 먹어도 능력 때문에 좋은 폼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야 높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른 넘을 때까지 계속 프로게이머를 할 생각은 없었다.
"에이, 스물 둘이 뭐가 많아요. 상현 오빠는 스물 여섯인데도 선수 생활 하시잖아요."
"그거야 상현 오빠니까 하는 거고."
앞에 앉은 상현 오빠는 나와 우재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고개를 미어켓처럼 내밀더니 뒤에 있는 우리 둘을 쳐다본다.
난 그런 오빠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뭐야?"
"오빠 짱이라고."
내 말에 상현 오빠는 싱겁다는 표정으로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제 생각엔 누나도 상현이 형처럼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서포터가 오히려 더 선수 생활은 길지 않아요?"
상대적으로 다른 라인에 비해 피지컬적인 요소가 적게 필요한 포지션은 많지만 그렇다고 경험이나 뇌지컬 가지고 선수 생활을 길게 가져가는 게 쉬운 포지션도 아니었다.
"뭐, 엄청 길지도 않지. 반응 자체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반응 속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서포터 중에서도 길게 선수 생활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판단력도 점점 떨어질 거고 메타에 적응하는 것도 아무래도 점점 늦어질 게 뻔할 테니까. 그러니까 서포터라고 무조건 선수 생활을 길게 가져갈 수 있다는 건 틀린 말이었다.
"그거야 그렇긴 하죠."
어쨌든 피지컬적인 부분이 어느 정도는 받춰줘야 이 생활도 할 수 있는 거였다. 다른 게 다 좋아도 피지컬이 딸리면 사실 선수까지 되기는 힘들었다.
'아마추어에서 최고는 될 수 있겠지만.'
남들은 없는 다른 한 가지가 프로게이머에겐 필수였다. 그래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최상위권의 솔로 랭크 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재를 보며 위로를 좀 해줄까 싶었는데 뭐, 우재도 프로였고 말하는 걸 보니까 자기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다고 해서 실의에 빠져있거나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게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걸수도 있지만 어쨌든 멘탈이 나쁜 친구는 아니었으니까.
"우재야, 조금만 기다려라. 곧 네 세상이 올 테니까. 차근차근 서두르지 말고 준비해."
내 진심 어린 조언에 우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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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엄청나게 많은 LOM 팬들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고 대기실에 있는 우리에게도 다 들릴 정도였다.
엄청난 함성 소리와 함께 경기 전 진행하는 각종 행사와 연예인들의 무대로 점점 열기가 고조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우린 대기실에서 마지막까지 분석하고 준비하고 토론을 끊이지 않고 했다.
정말 마지막이었고 이 마지막 스프링 결승이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수확의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반 년 농사를 한 결과가 오늘로서 결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스프링 시즌 1위로 마감한 것 역시 대단한 농사고 수확이지만 그건 정말 말 그대로 수확이고. 오늘의 경기에 따라 그 수확한 결과물의 씨알이 어떤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경기였다.
'이왕이면 튼실하게 수확하는 게 좋잖아.'
선수들은 각자 나눠져서 상대방 경기를 보면서 토론을 나누기도 했고 정글들은 정글들끼리 모여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나 또한 경기에 출전하게 된 진선 오빠와 다각도로 얘기를 하며 경기 전에 합을 맞추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감독님께서 내게 다가오시더니 말한다.
"상황 보고 가능하면 첫 번째에 아예 뽑아 버리자."
감독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에 난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1경기에 바로요?"
"응. 왜? 자신 없어?"
감독님이 살짝 도발 섞인 표정과 눈빛으로 묻기에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 윤세나에요."
내 말에 감독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너 윤세나인 거."
진선 오빠도 첫 경기부터 조커 픽을 뽑으라고 감독님께서 지시할 줄 몰랐는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감독님 첫 판부터 세게 가시네."
"이거 다시 처음부터 가야 될 것 같은데?"
내 말에 진선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감독님도 우리에게 일찍 말씀해주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무난한 조합의 플레이 운영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으니까 다시 얘기할 필요성이 있었다.
난 내가 꺼낼 수 있는 조커픽을 얘기했고 진선 오빠도 그런 내 조커픽과 상대방이 들고 나올 수 있는 챔피언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변수들을 최대한 줄여나갔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감독님의 피드백이 있고 우리들은 대기실에서 나가기 전에 화이팅을 외쳤다.
"자자, 진짜 마지막이다. 신나게 놀고 미친듯이 놀자. 지금까지 했던 고생들이 아깝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경기에 임하는 거야. 경기에 임하든 임하지 않든 우린 모두 Y1이라는 거 잊지 말고. 이곳까지 끌고 온 건 우리 모두의 힘이라는 것도 잊지 말고. 절대로 방심하지 마라. 자, Y1!"
"화이팅!"
힘차게 화이팅을 외치고 우린 환성을 내지르며 긴장을 풀었다. 감독님은 차분한 표정으로 정장 차림의 옷을 점검한 뒤 대기실 문고리를 붙잡으신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시며 사악한 악당처럼 미소를 보이시며 말한다.
"가자! 우승하러."
그리고 문이 열린다.
경기장에 점점 다가가자 심장이 쿵쿵거렸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심장 박동을 더 울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팬들의 함성 소리가 귓가에서 점점 크레센도가 된다.
"자, 이쪽에서 대기해 주세요! Y1 선수!"
처음에는 선수단 전원이 나가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우승컵을 놓고 원형으로 마주본 상태로 서게 된다.
이곳에 와서 몇 번의 리허설을 가졌기 때문에 떨리거나 긴장되는 건 없었다.
해설을 맡으신 분의 자기 소개가 이어지고 곧 선수단 입장이라는 소리가 들린다.
담언 선수들과 Y1 선수들이 호명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페이크, 이상현!"
"꺄아아아악!"
"와아아아아!"
"오빠, 사랑해요!"
"Y1! Y1! Y1!"
상현 오빠의 이름이 호명되자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커진 팬들의 함성에 상현 오빠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여유로운 걸음으로 나간다.
저런 거 보면 확실히 베테랑은 베테랑이다. 전혀 떠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 난 떨리지 않는다고 생각은 하는데 몸은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괜찬핬는데 이상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난 심호흡을 하고 5번 째, 상대 서포터인 담언의 배릴 선수와 함께 호명되며 안으로 들어간다.
배릴 선수는 살짝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를 했고, 나도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배릴 선수와 인사를 했다.
'원래 여기서 인사를 하는 건가?'
뭘 알아야 하지. 리허설 때는 인사를 하지 않았던 터라 뭔가 좀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내 자리에 멈춰섰고 리허설 때는 없었던 스프링 시즌의 우승컵이 보이자 심장이 다시 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후우..."
조금씩 떨려오는 가슴에 난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가만히 감고 심장에 손을 얹었다. 기분 좋게 떨려오는 심장 박동에 미소가 흘러나왔다.
즐거운 고양감이었다. 이렇게 시끄러운 환호성 속에도 귓가에 내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와, 장난 아닌데?"
옆에 있던 진선 오빠의 말에 난 의아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오빠, 뭐라고?"
그러자 다시 진선 오빠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세나, 너 인기 장난 아니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