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84. 스프링 결승 준비
고단했던 스프링 결승 준비가 끝나고 우린 담언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조금씩 실감하고 있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된다더니 결국 잰지가 밑에서 올라온 한하를 만나 다시 밀어내고 결국, 담언과 붙게 됐다.
담언과 잰지는 치열한 혈투를 벌였고 그 혈투의 승리를 가져간 건 역시나 담언이었다.
"역시 담언이 올라오네."
담언과 잰지의 경기를 보던 감독님께서 담담하게 적막을 깨웠다. 선수들도 지금까지 수많은 담언의 경기를 봤지만 확실히 다른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진짜 결승이구나.'
나도 새삼 결승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생각이 드니까 감회가 새로웠다. 프로게이머가 되고 처음으로 맞이한 결승전이었다.
'이기고 싶다.'
데뷔를 하자마자 우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오만하다고 할 수 있지만 Y1은 그럴 수 있는 팀이었다.
우승하고 싶어서 온 팀이고 지금까지 내 실력을 정말 유감없이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여자라서 받았던 그 의심의 눈초리들이 이제는 많이 사라졌으니까.
'뭐, 여전히 여자는 안 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LCK에 여자 선수가 나 혼자라서. 아니, LCK라는 이 판에 여자라는 존재가 나 혼자라서 받는 관심은 언제나 기대보다는 의심이었다.
내가 남자였으면 조금 달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자로서 얻은 게 더 많은 것 같아서 감수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예쁘고, 몸매가 좋아서 얻는 것도 많았지만 불쾌한 부분들도 감내해야 했다. 그래도 확실히 내가 남자였다면 받을 수 없는 주목들에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내가 남자였다면 이런 관심을 과연 받을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잘생긴 프로게이머가 이 바닥에서 솔직히 얼마나 먹힐 수 있는지.
한 가지 확실한 건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 프로게이머는 확실히 이 바닥에서 잘 먹힌다는 거였다. 굳이 이 바닥이 아니라도 알게 모르게 내가 예쁘고 몸매 좋은 젊은 여자라서 얻는 이득이 많다고 느껴졌다.
'뭐, 과분한 친절이라든가...'
남자였을 땐 전혀 느끼지 못한 몸둘바를 모를 정도의 과분한 친절들이라던가 어느 그룹에 속하더라도 집중적으로 조명 받고 관심을 받는 건 당연히 좋았다.
다만, 그러한 것들 때문에 시기나 질투를 받는 건 1+1처럼 늘 따라왔고 몸매가 좋아서 가슴이 커서 받는 성욕이 가득한 시선들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으, 목이야, 어깨야, 허리야."
너무 집중해서 담언과 잰지의 경기를 봤는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난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 있던 우재를 향해 등을 돌리며 어깨를 툭툭 때렸다.
Y1에서 나보다 나이가 어린 선수는 우재와 준현이 민영이 딱 셋이었는데 그 중에 철저하게 내 안마사로 키운 건 우재였다.
나이는 제일 어렸지만 덩치는 제일 커서 그런가? 아니면 손이 제일 커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가장 시원하게 잘 풀어줬다.
"땡큐."
말하지 않아도 이젠 행동으로 알아서 안마를 실시하는 기특한 우재에게 미리 감사를 하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다른 선수들도 이젠 그 모습이 익숙한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처음에는 노동력 착취니 직장내 괴롭힘이니 뭐라고 했지만 내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자 이젠 그냥 그러려니 했다.
"우재야, 누나 목도."
"네."
우재는 야물딱진 손으로 내 어깨와 목을 안마해 줬는데 너무 시원해 나도 모르게 중간중간 야릇한 교성을 냈다.
"아앙."
"뭐, 뭐야?"
담언과 잰지 경기에 대해 피드백을 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시던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내 간드러지는 교성에 기겁하며 날 쳐다봤다.
"얘 이거 일부러 이래요."
찬동이의 고자질에 난 찬동이를 째려봐주곤 입을 막고 새침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죄송해요. 너무 시원해서. 이건 진짜로 나도 모르게 나온 소리에요. 우재 잘못이죠."
사실, 감독님이나 코치님이 없고 팀원들만 있을 때 일부러 반응들이 재미있어서 야릇한 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이번엔 진짜 아니었다.
"이걸 우재 탓을 한다고?"
살짝 손길에서 우재도 당황한 모습을 보여 슬쩍 고개를 들어 우재를 쳐다봤다.
우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 입을 가리고 웃어야 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정말 순진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우재를 보면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 보다 더 괴롭히는 맛이 있었다. 뭐, 준현이도 조금 맛이 있지만 조금 거부하는 느낌이 들었고 민영이는 위로 누나가 많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렇지도 않아 해서 재미가 없었다.
안마의 스킬로 보면 확실히 민명이가 뛰어나긴 했다. 누나들에게 철저하게 교육 받은 티가 난다고 할까?
안마를 해달라고 했을 때 무척 당황하던 우재나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준현이와는 달리 민영이는 푹 한숨부터 내쉬며 능숙하게 안마를 해줬으니까.
'내 심부름에 몸이 반응하는 건 그래서인가?'
이상하게 좀 안 좋은 쪽으로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민영이었는데 그래서 심부름을 제일 많이 시켰다.
이젠 익숙해진 날짜 계산으로 때 맞춰서 생리대를 사오는 심부름이라던가 숙소 근처에 있는 여자 속옷 매장에서 속옷을 시켜오는 거라던가 그런 걸 시키는 게 민영이가 제일 편하기도 했다.
'나도 많이 당하기도 했고... 난 속옷까지 빨았는데 뭐...'
갑자기 민영이한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민영이는 자신을 쳐다보는 나를 보며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황급히 시선을 돌린다.
내가 안마나 또 심부름을 시킬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난 그 모습에 피식 웃고는 우재가 안마하기 편하게 고개를 숙여줬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자연스럽게 목을 안마해주기 시작한다. 그렇게 몸이 좀 풀어지자 미소를 지으며 우재에게 자리를 권했다.
"됐어, 우재야. 그만해. 여기 앉아. 아주 시원했어."
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미소를 지었고 우재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앉는다.
나는 왜 동생이 없을까... 나는 왜 막내일까... 부모님한테 지금 부탁하기엔 너무 늦었겠지? 아니면 입양이라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난 헛웃음을 짓고 우재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우재 같은 동생 있었으면 좋겠다."
내 말에 찬동이가 얼른 딴지를 건다.
"넌 왜 네 생각만 하냐? 우재 생각도 해야지."
그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고 난 찬동이를 째려봐주면서 살벌하게 말했다.
"네가 요즘 안 맞아서 그렇구나. 등짝 스매싱 한 번 갈길 때가 되긴 했지."
내 말에 찬동이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몸을 내 정면으로 향한다. 자신의 등을 가리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며 웃음이 터져나왔다.
"가소롭군, 김찬동."
무도[B급]을 보유한 나의 능력으로 저 등짝 한 대 가격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프로게이머가 되고 뭐 딱히 써먹을 때가 없었지만 내 몸 하난 지킬 수 있어서 배우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게 찬동이의 등짝을 후리는데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어서 더 좋기도 하고.
하여간 내가 여자라 내게 맞아도 나를 때리긴 힘들었기 때문에 일방적인 구타가 이어지고 있었다.
"자자, 다들 이제 집중하자. 결승이 진짜 코앞이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됐는지 감독님이 우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난 찬동이와 날카로운 눈빛 교환을 한 번 해주곤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처럼 담언이 올라왔고 덕분에 우리의 우승 가능성은 그 어떤 때보다 높아졌다."
감독님의 말에 선수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감독님께선 담언만 팬다 작전을 구상하셨기 때문이다.
우린 오로지 담언을 상대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고 담언의 경기만 봤고 그 경기만 분석하고 담언 선수들의 특성만 파악했다.
그게 결승에서 당연히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뭐, 담언도 우리처럼 할 수 있는 입장이긴 했지만 밑에서 올라오는 두 팀의 전력이 비슷했고 또 담언과의 경기력 차이도 얼마 없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 우리에게만 촛점을 맞춰 준비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는 담언보다 편안한 위치에서 준비할 수 있었다. 준비해야하는 경기도 없었고 누가 담언과 붙게 되고 주관적으로 봐도 객관적으로 봐도 전력이 무조건 담언이 높았으니 그런 과감한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거다.
"자, 그럼 마지막 담언 피드백 들어간다. 잰지가 잘 상대해줘서 생각보다 많은 약점을 파악할 수 있었어. 확실히 지금 담언이 거의 완벽한 팀이라고 볼 수 있지만
100%는 아니야."
감독님의 말에 동의했다. 그랬으면 저렇게 혈투를 벌이진 않았겠지. 잰지가 유리한 상황에서 잘못된 판단들이 조금만 적었다면 올라오는 건 잰지였을지도 모른다.
"우세한 상황에서 역시나 오더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 잰지는. 이 부분을 보안하지 않으면 사실 다음 시즌에도 더 좋은 성적을 거두긴 힘들 거야. 그에 반해서 담언은 역시 배릴과 쇼메의 역할이 크다고 보여지고 있어."
담언의 주요 장면 속에서 배릴의 오더가 이어진다. 정확하고 명확한 오더에 팀원들이 따른다. 그때마다 눈부신 활약을 하는 건 역시 명불허전 명품 미드 쇼메...
물론, 그 결과가 항상 좋은 건 아니었다. 좋기도 하고 나쁠 때도 있었지만 확실한 건 좋았던 경우가 더 많다는 거였다.
"확실히 판을 짜는 능력이 좋고, 개인 능력들이 좋아.
하지만 시즌 초반에 비해 깐의 폼이 확실히 떨어졌다는 건 분명해 보여."
감독님의 말에 칸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이걸 좋은 소식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양중인 감독님은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시기를 꺼려 하셨다.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쳐다보는 선수들도 있었고 어떤 얘기를 할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선수들도 보였다.
난 옆에 앉은 우재가 혹시나 아나 싶어 팔꿈치로 우재를 찌르며 물었다.
"뭔데? 너 알고 있어?"
내 물음에 우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내 귓가에 속삭인다.
"쇼메 선수 부상이래요."
뜻밖의 소식에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곤 우재를 봤고 감독님의 입에서도 우재가 했던 말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쇼메이크가 부상이라고 하더라. 아마 결승에 출전하지 못할 거야."
"에? 그럼 결승에 누가 나와요?"
"랑쥰이라는 선수가 나온다고 하더라."
"랑쥰?"
선수들은 들어본 적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감독님은 그런 선수들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신예 선수야."
스프링 결승에서 데뷔를 하는 그 친구도 참... 이걸 축하해 줘야 할지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모르겠다.
그것도 무려 쇼메이크 선수 대타로 출전한다는 거지?
'게다가 그 상대는...'
난 고개를 돌려 상현 오빠를 쳐다봤다.
감독님은 웅성거리는 선수들을 조용히 시키며 말했다.
"뭐, 생각보다 싱거운 경기를 할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직까지는 확실한 게 아니니까 쇼메 선수가 나온다고 가정하고 경기를 준비할 거야. 부랴부랴 랑쥰이라는 친구 데이터랑 경기, 솔로 랭크도 분석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할 건 없어."
감독님의 말에 우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예라서 오히려 뒷덜미를 물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그럼 그림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폐관 수련에서 돌아온 상현 오빠는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 어떤 미드라이너보다 준수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나 그 끝을 알 수 없는 노련함과 경기를 읽는 능력 무수히 많은 경험은 우리에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특히나 결정적인 순간에 내 오더에 늘 힘을 실어주는 게 상현 오빠였다.
"어디가 뭐 어떻게 안 좋은 건데요?"
상현 오빠가 궁금했는지 손을 들고 감독님에게 물었다.
"팔과 손이 심하게 떨리는 증상이 있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팔과 손이 문제면 경기에 나오기 힘들겠지."
감독님의 말에 상현 오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스치는 기색은 안도가 아니라 진한 아쉬움이었다.
'하여간 저 오빠도 못 말린다니까.'
난 작게 웃고는 어쩌면 예상보다 쉽게 우승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협곡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중단.
팀의 허리라고 할 수 있는 미드였다. 그런 미드에 신예가 기용된다니 사실 이미 청사진이 그려지고 있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쇼메이크 선수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우승은 꼭 우리가 차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이면 몰라도 손과 팔이면 스킬 적중도 자체가 떨어질 텐데. 거의 100% 못 나온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아요? 차라리 완전 배제하고 랑준이라는 신예에 촛점을 맞춰서 준비하는 게 어떨까요?"
내 제안에 감독님도 나쁘지 않게 받아들이셨다. 사실 거의 못 나온다는 게 기정사실화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도 그렇게 가닥을 잡긴 했어. 이번 승부처가 거기가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