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50. SKY Y1
"허락을 구하러 온 게 아니라 통보를 하러 왔구나."
서류를 모두 읽어본 아버지는 그렇게 입을 떼셨다.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아버지도 똑같이 생각하시는 모양이다.
난 입술을 감추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날 쳐다보시더니 말한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었던 일이었니? 아니, 게임을 좋아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을 정도로 좋아했었니?"
아버지의 말에 난 정공법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내 말에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러더니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표정이셨다. 나는 숨죽이며 눈치를 봤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들고일어나 반대하시면 사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할 수 없다. 그 정도로 아버지 고집은 대단했으니까.
'아닌 건 아니신 분이니까.'
여기서 내가 뭔가 믿음을 주는 말을 한 마디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움이 될까? 머리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랬구나."
아버지의 말에 난 가만히 눈치를 살폈다. 허락해주시는 건가? 아니면... 난 숨을 죽이고 아버지를 쳐다봤는데 아버지가 날 보시더니 물으셨다.
"한국대 법대에 들어간 거. 혹시 후회하니?"
아버지의 물음에 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버지는 그런 날 보더니 고개를 저으시며 말씀하신다.
"아니, 질문을 다시 하마. 한국대 법대에 들어간 게 네 가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간 거니 아니면 우리가 원해서 들어간 거니?"
아까 내가 했던 고민에 대해서 아버지가 물어보실 줄은 몰랐다. 난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둘 다인 것 같기도 하고... 둘 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내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말한다.
"알겠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을 자신 있니?"
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할 자신이 있어요. 1년이 아니라... 어쩌면 더 길지도 몰라요. 팀에서 절 원할 수도 있잖아요."
내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신다.
"프로에겐 행복한 일이지. 1년 후에 결과가 좋지 못하면 어떻게 할래?"
"열심히 학교나 다녀야죠."
내 말에 아버지는 피식 웃으시곤 고개를 끄덕이신다.
"오늘 자고 갈 거지?"
아버지의 말에 난 그게 승낙이라는 걸 알아차리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내 대답에 아버지도 미소를 지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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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서 편안한 하룻밤을 보냈다. 가게에서 정후와 수정이랑 함께 엄마 일을 돕고 맛있는 돼지갈비와 술을 마셨다.
집에 와선 옹기종기 거실에 모여 함께 잠이 들었고 아침엔 엄마가 끓여준 콩나물 북엇국으로 해장을 했다.
"크어엉... 맛있다."
내 과도한 리액션에 다들 깜짝 놀라서 날 쳐다보기에 난 손을 들어 보이며 미안하다는 시늉을 했다. 정후와 아버지는 어제 꽤나 달려서 그런지 컨디션이 나빠 보였는데 그래도 젊은 게 좋다고 정후는 좀 나아 보였다.
"하여간, 적당히 드시지. 아버지가 아직도 이팔청춘인 줄 아세요?"
하여간 남자들의 쓸데없는 자존심이란. 은근히 서로 주량을 가지고 보이지 자신들만의 리그를 연 아버지와 정후를 보며 여자 셋이서 얼마나 흉을 봤는지.
남자였을 때 난 아버지가 담배를 많이 피셔서 그런지 담배고 잘 피지 않았고 술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물론, 한 여름에 한강에서 바람을 맞으며 시원하게 맥주 한 잔을 마시는 거나 치킨에 맥주를 마시는 건 좋아했지만 소주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크흠, 흠. 난 멀쩡하다. 정후는 괜찮니?"
"전 해장술도 가능합니다."
"해장술 좋지!"
아버지의 말에 엄마가 무섭게 째려보신다. 그 시선에 아버지는 얼른 꼬리를 마신다.
"아니, 그냥 좋다고 했지. 마신 다곤 안 했어."
아버지의 말에 엄마는 그제야 눈을 풀며 자신의 국을 담아 자리에 앉으시더니 말한다.
"너희 아버지 담배랑 술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아냐? 진짜 골초에 술은 매일 드시지. 엄마가 진짜 못 살겠다."
"지금까지 잘 사셔 놓고 왜 그러세요. 아직도 살아갈 날이 더 많은데. 우리 엄마 파이팅!"
난 양손을 들어보이며 엄마에게 응원을 해주곤 콩나물 북엇국에 밥을 말아 술술 넘겼다.
"너무 맛있다."
"맛있어?"
"응. 엄청 맛있어. 그리고 이 깍두기도."
"깍두기 진짜 맛있어요, 어머니. 직접 담그신 거죠?"
수정이의 말에 엄마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럼. 당연히 직접 담근 거지. 사 먹는 건 맛이 덜하지."
엄마의 말에 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맞습니다. 파는 것보다 훨씬 맛있습니다."
정후의 칭찬에 엄마는 입을 가리며 호호! 웃으시더니 손을 휙 저으며 말씀하신다.
"정후가 깍두기 맛을 좀 아네."
단란한 아침, 맛있는 식사로 배를 든든히 채운 나는 엄마와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곤 서울로 올라갈 채비를 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겨우 하루 있다가 가는 나를 보고 무척 서운해 하셨지만 계약상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나를 더 붙잡지 않으셨다.
"방학이라고 늘어져 있지 말고. 운동도 좀 하고. 친구들이랑도 좀 놀러 다니고 그래."
아버지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럴게요. 아버지나 제발 올해는 담배 좀 끊고 술도 좀 줄이시고 하세요."
"그래요. 막내딸 말 좀 들어요."
"알았어."
"맨날 말로만."
엄마는 아버지를 흘겨보시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수정이와 정후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우리 세나 잘 좀 부탁한다. 너희들이 있어서 진짜 마음이 든든해."
"네, 걱정 마세요."
정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고 수정이도 내 팔을 끌어안더니 밝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나 걱정하실 거 하나도 없어요. 누구 따님인데요."
수정이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누구 딸인데."
내 말에 아버지와 엄마가 미소를 지으신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라고 손짓을 하시며 말한다.
"그래, 얼른 가라. 아빠 일해야 돼. 당신이 애들 잘 데려다줘."
"알겠어요. 엄마 차 빼 올게. 잠깐 기다려."
엄마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잠깐 나를 바라보시다가 몸을 돌려 일을 하러 가셨고 엄마는 능숙한 운전 솜씨로 차를 빼 오신다.
"타."
엄마의 말에 나와 수정이와 정후는 차에 탔다. 터미널로 가는 길이 얼마나 짧은지 엄마와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도착해 버렸다.
터미널 주차장에 엄마는 차를 세우고 우리 셋의 표를 직접 끊어주셨다.
"내가 사도 되는데."
"됐어. 갈 때 편하게 가라고 우등으로 끊었어."
난 엄마의 말에 살짝 웃었다. 우등이 제일 좋은 줄 아시지.
"고마워, 엄마."
"고맙긴. 난 우리 딸이 잘 할 거라고 믿어. 그러니까 잘 해."
"알았어. 엄마 내 데뷔전 때 꼭 와야 된다."
"어휴, 바빠서 모르겠다."
"아, 내 데뷔전엔 그래도 와야지."
"알았어, 알았어. 얼른 가."
내 투정에 엄마는 미소를 지으며 내 등을 토닥여준다.
"차 시간 얼마 안 남았네."
엄마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게 표를 건네주고는 터미널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시더니 금방 나오신다.
"가면서 먹어."
엄마가 건네준 봉투 안에는 버스에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료와 과자가 가득 들어 있었다. 거기다가 내가 좋아하는 삶은 달걀도 들어 있었는데 그걸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해왔다.
"잘 먹을게."
"그래, 천천히 먹고. 피곤할 텐데 가면서 좀 자. 얼굴이 어째 좀 푸석하다. 너도 술 좀 적당히 마셔."
"난 술 안 마셔. 그냥 어제는 기분이 좋아서 좀 달린 거야. 정후 못 봤어?"
내 말에 크흠, 흠! 하며 헛기침을 했다. 갑자기 자기가 왜 나오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기에 난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엄마도 정후를 살짝 보더니 내 귓가에 살짝 속삭인다.
"술 너무 좋아하는 남자는 엄마 별론데."
엄마의 말에 난 화들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뭐... 정후가 다 괜찮은데 그게 좀 그렇다고."
속삭이듯 말을 흐리며 정후의 눈치를 보는 엄마를 보며 정후도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모양이다.
슬쩍 나와 엄마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들으려고 하는 것 같기에 난 뒤로 가라고 손짓을 했다.
수정이는 그런 정후를 보곤 웃음을 터뜨리며 고맙게도 헤드락을 걸고는 버스가 있는 쪽으로 손가락질을 한다.
난 고개를 끄덕였고 엄마는 수정이에게 끌려가는 정후를 보면서 말했다.
"왜? 정후면 괜찮지. 너희 둘 아직 안 사귀냐?"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정후랑 왜 사귀냐!"
"그래? 정후가 아직 고백 안 했어?"
"에에. 이상한 소리 자꾸 하시네. 정후가 나한테 고백을 왜 하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그래? 보기보다 정후가 용기가 없네."
엄마의 말에 난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아, 우리 그런 사이 아니라고."
"넌 그렇겠지. 엄마는 다 알아요."
"뭘 안다는 거야."
"잘 봐라 엄마 말이 틀린가 아닌가."
"정후가 지금 날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왜 아니겠어. 딱 보면 알겠는데. 하여간에 둔해 빠져가지고는."
엄마의 말에 난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둔한거로 치차면 엄마도 만만치 않았다고 알고 있는데. 아버지가 나한테 얘기한 게 있는데 이렇게 나오시겠다?
내가 그런 표정을 짓자 엄마는 입술을 감추더니 내 어깨를 붙잡고 뒤로 돌린다.
"얼른 가."
내가 다시 고개를 돌려 뭐라고 말하려고 하자 엄마는 내 입을 막더니 내 등을 떠민다.
"얼른 가라."
약간 이를 꽉 물고 말씀하시네? 난 피식 웃음을 터뜨리곤 순순히 떠밀려 버스에 올라탔다. 난 몸을 돌려서 엄마를 보곤 말했다.
"또 올게."
"오지 마. 귀찮아."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고 있네. 난 엄마를 심통이 난 표정으로 째려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엄마도 그런 내게 손을 흔들어줬고 버스에 이미 타 앉아 있는 정후와 수정이에게도 손을 흔드신다.
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연신 꾸벅 숙였고 수정이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흔들었다.
난 그런 둘을 보며 웃고 있는데 기사님이 날 보며 말씀하신다.
"출발하겠습니다."
"아, 네."
"얼른 들어가서 앉아. 안전벨트 꼭 매고."
"알았어. 엄마도 조심히 운전해서 가."
"그래."
난 마지막으로 엄마와 인사를 나누곤 버스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버스 문이 닫혔고 곧 출발하니 안전벨트를 착용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엄마는 버스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드셨고 나도 그렇게 했다.
생각보다 쉽게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다. 엄청 혼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는데 의외로 전혀 혼나지 않아서 느낌이 이상했다.
어떻게 보면 진짜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건데... 음... 진짜 자식이니까 믿어주시는 건가? 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긴 하지만...
"미션 성공이네."
난 수정이 옆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생각보다 쉽게 두 분 다 허락해 주셔서 솔직히 좀 놀랐어."
내 말에 수정이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 말이야."
"내 생각엔 내 덕분인 것 같다."
정후의 뜬금없는 말에 난 고개를 뒤로 돌려 정후를 쳐다봤다. 정후는 되게 재수 없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곤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뭐 했다고?"
"그런 게 있다. 넌 몰라도 돼."
정후의 말에 난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흘렸지만 더 묻지 않았다. 알고 싶지도 않고. 솔직히 허락을 받은 건 내 완벽한 최후 변론 덕분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친구들 앞에서 크게 혼내지 못한다는 약점을 내가 이용하기 위해서 수정이와 정후를 데리고 온 것도 있지만.
큰엄마도 엄청 밀어주셨고. 하여간 따지고 보면 판은 내가 다 깔았는데?
"하여간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돼."
"뉘에, 뉘에. 알겠습니다. 고마워서 돌아가시겠네요."
"뭐, 그렇게까지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정후는 굉장히 젠틀하게 손을 들어 보이면서 말하는데 그게 어찌나 꼴 보기 싫은지. 엄마는 도대체 얘가 뭐가 예쁘다는 거야?
이해가 안 간다니까.
"왜? 너무 잘 생겼냐?"
욕하느라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던 거였는데 아무래도 대단한 오해를 하신 모양이다.
"삐져나온 코털이나 뽑아라. 더러워 죽겠네."
내 말에 정후가 당황한 표정으로 코를 찡긋거리곤 손등으로 코털을 집어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