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49. SKY Y1
중간에 휴게소를 들려서 배를 채우고 군것질거리를 사서 버스에 타선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을 보냈더니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속초에 도착했다.
"아앙! 다 못 봤는데!"
수정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우는소리를 했고 난 아주 조금 남아서 빠르게 건너뛰기 신공을 사용했다.
정후는 버스가 멈추자마자 곧바로 내려 우리의 마음을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좀 천천히 내립시다. 천천히."
"그래.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나와 수정이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며 정후가 내리는 걸 방해했지만 깔끔하게 무시하곤 기사님에게 우리 둘을 고자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쟤들 안 내리고 계속 TV만 보는데요."
기사님은 정후의 말에 목을 길게 빼고 우리를 쳐다보시더니 웃으시며 말한다.
"학생들 다 왔어요."
"아, 네."
"네에..."
우리 둘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버스에서 내렸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신나게 정후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뭐, 정후는 다리를 땅에 박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바다는 바다네."
정후의 말처럼 속초에 온 게 확실히 느껴졌다. 매서운 바닷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는데 확실히 서울보다 추운 것 같았다.
'온도는 낮은 것 같은데 바람이 불어서 그런가?'
난 코트를 여미고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엄마의 가게가 있는 곳은 갯배가 있는 중앙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가기엔 가깝고 걸어가기엔 조금 먼 거리였다.
수정이는 오랜만에 온 속초가 좋았는지 밝은 표정이었고 정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쫄래쫄래 나를 쫓아왔다.
버스를 타고 엄마가 운영하시는 식당에 도착했다. 큰엄마가 나를 제일 먼저 알아보시고 환하게 웃으시더니 반겨주셨고 엄마도 주방에서 날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나왔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우리 세나 왔네. 세나 왔어. 친구들이랑 같이 왔구나? 점심은 먹었어?"
"네, 휴게소에서 먹었어요. 엄마!"
"왔어?"
엄마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더니 곧바로 나를 지나쳐 정후와 수정이에게 다가간다.
"아이고, 우리 정후랑 수정이도 너무 오랜만이네. 다들 잘 지냈어? 우리 세나가 속 썩이진 않고?"
아니, 누가보면 내가 친구고 정후랑 수정이가 아들, 딸인 줄 알겠네.
"네, 어머니. 제가 잘 관리하고 있습니다."
정후의 말에 난 기가 차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관리는 무슨."
수정이는 우리 엄마와 포옹을 하며 환하게 미소를 짓더니 여기저기 쳐다보며 말한다.
"어머니는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지셨네요."
"얘는, 다 늙었는데 예뻐지긴. 수정이야말로 이제 숙녀 태가 나네. 시집가도 되겠다."
"엄마, 우리 이제 겨우 스물둘이거든요. 시집은 무슨."
난 그렇게 툴툴거리며 의자를 하나 빼고 앉아서 말했다.
"나 할 얘기 있어."
비교적 상대하기 편한 엄마를 먼저 공략할 생각으로 얘기를 꺼냈더니 큰엄마도 내 말에 금방 알아차리시고 엄마를 자리에 앉힌다.
"그래, 그래. 자리에 앉아. 너희들도 다 자리에 앉아."
큰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얼른 음료수와 잔을 꺼내서 자리에 앉으셨다.
"무슨 할 말?"
엄마는 자리에 앉으며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으셨고 난 핸드폰을 꺼내 엄마에게 사진 하나를 전송했다.
"방금 보냈어."
내 말에 엄마는 나를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이 보더니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내가 보낸 사진을 보신다.
미간을 잔뜩 좁히시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소리를 내서 읽어보신다.
"E스포츠 선수 표준 계약서?"
난 고개를 끄덕였고, 엄마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계약서 내용을 집중해서 읽어보신다. 다 읽어보신 엄마는 날 쳐다보더니 말한다.
"윤세나."
역시나 예상했던 낮은 톤의 목소리가 엄마의 입에서 흘러나오기에 난 얼른 손을 번쩍 들면서 말했다.
"최후 변론하겠습니다. 어머니."
내 말에 엄마는 눈을 가늘게 뜨곤 팔짱을 끼시며 날 쳐다보신다. 승낙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한국대 법대의 힘을 보여드리겠어.
난 내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엄마를 설득시키기 위해 준비한 변론을 시작했다.
"우선...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홀로 결정했다는 점에 대해서 사과의 말씀 올립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실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생각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난 환기 차원에서 손뼉을 가볍게 치며 시작했다.
"자, 제가 만약 남자였으면 군대를 갔겠죠. 요즘 군대 18개월 복무합니다. 그에 반해서 제가 프로게이머를 하는 기간은 겨우 1년. 단 1년. 게다가 연봉 6천 만 원!"
난 입을 과도하게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연봉이 무려 6천만 원! 대학교를 다니면서 들어가는 비용 전부를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 소녀 혼자 오롯이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난 손가락을 하나 펴며 말했다.
"게다가 어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제게 그러셨죠? 안 하고 후회하느니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 맞습니다. 전 프로게이머라는 꿈이 있었으나 부모님께서 요구하시는 현실이란 길로 걸어갔습니다."
솔직히... 한국대 법대라는 게 내가 원해서 간 것 같지는 않다. 어어... 하다가 보니까 와 있는 느낌이라서...
뭐, 검사, 판사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긴 했지만 그게 내가 되고 싶어 한 건지 부모님께서 원하시니 나도 그렇게 된 건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어머니, 겨우 1년입니다. 1년. 1년에 6천만 원 벌 수 있고 1년을 휴학한다고 해서 소녀 뒤처지는 일 따윈 없을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닮아 머리가 똑똑하지 않습니까."
적절한 아부와 논리적인 변론으로 엄마의 마음을 조금 그래도 가져온 느낌이긴 했다. 게다가 옆에 있는 수정이와 정후도... 물론, 정후는 좀 불친절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를 열심히 돕고 있었다.
특히나 큰엄마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그래. 잠깐 군대 갔다 온다고 생각하면 되겠네. 그리고 혹시 알아? 얘가 프로게이머로 크게 성공할 수도 있는 거잖아."
난 큰엄마의 말에 고개를 힘 있게 끄덕이면서 말했다. 게임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아무래도 부모님 세대에겐 좋지 않으니까 어쩌면 극구 반대하실지도 몰랐다.
"그 좋은 머리를 이렇게 써? 이거 계약 파기하면 위약금 엄청 물어야 하네. 원래 계약이 이렇니? 아니면 네가 추가한 거니?"
엄마의 말에 난 흠칫 몸을 떨었다. 역시... 우리 마미...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렸을 때부터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배웠기 때문에 난 시선을 회피하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내 모습에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계약서를 쳐다본다.
"프로 1군 계약이라 이거지? 2군이 아니라. 주전 선수인 거야? 대회에도 나가고 그러는 거지?"
엄마의 말에 난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지! 엄마 내가 데뷔전할 때 꼭 와야 돼!"
"아직 허락 안 했거든!"
"아잉, 엄마. 허락해 주세요오~"
막내의 필살기라고 할까 난 잔뜩 엄마에게 애교를 피우며 말했고 엄마는 오랜만에 보는 내 애교에 피식 웃으신다.
"그런데 원래 프로게이머 연봉이 이렇게 높니? 널 뭘 보고 6천만 원이나 준다니?"
"하... 엄마. 나 엄청 잘하거든요. 대한민국에서 0.001%에 들어간다고요. 엄마 딸이."
내 말에 엄마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수정이를 쳐다보며 묻는다.
"이 말 진짜니?"
"그럼요, 어머니."
수정이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그렇다고 대답했고 난 그런 수정이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줬다.
그런 내 모습에 수정이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숨기더니 내 손을 슬쩍 내린다. 난 엄마의 눈치를 살짝 보고는 딴청을 피웠다.
"너 정말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아니면 돈 때문에 하는 거야."
엄마의 진지한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당연히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돈도.. 뭐 전혀 이유가 안 된다고 할 순 없고. 6천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잖아. 거기다가 순수하게 연봉만 그 정도고 다른 부가적인 수입도 있고 하니까."
난 허공을 응시하며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우승하면 상금이 2억이고. 스트리밍 수입도 있을 거니까 우승을 못해도 1억 이상은 벌 수 있지 않을까?"
내 말에 엄마가 조금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본다.
"게임을 해서 그렇게 많이 버니?"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단순히 게임이 아니라 스포츠라고요. 올림픽 정식 종목이기도 하고요."
"올림픽 정식 종목이라고? 게임이?"
"그렇다니까요. 내가 언제 엄마한테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있어?"
엄마는 내 말에 옆에 있는 정후에게 묻는다.
"이거 정말이니?"
"네. 맞아요, 어머니."
정후의 대답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시며 믿으시는 것 같다. 난 어이가 없어서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도무지 내 말은 믿으시질 않는군."
하여간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거의 넘어온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우리 편을 들어주면 아버지야 일점사가 가능하니까 어렵지 않게 허락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가 끝판왕이라는 건 변함이 없는 사실이지만... 아버지가 끝까지 반대하면 어쩔 수 없이 접을 수밖에 없다.
흠... 어쩌면 많이 혼날지도 모르겠다. 막내 버프가 있다곤 하지만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도 모자라 계약서까지 이미 사인을 하고 왔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화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허락을 구하러 온 게 아니라 사실상 통보를 하러 왔으니까.
'위약금이 어마무시하니까.'
내가 스스로 족쇄를 채웠기 때문에 결국엔 1년 동안 시킬 수밖에 없을 거다. 다만, 기분 좋게 시켜주느냐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시켜주느냐는 조금 다른 문제겠지.
나도 이왕이면 두 분의 허락을 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으면 좋겠다.
"엄마가 좀 도아줘. 응? 아버지한테 허락 받을 때 옆에서 좀 도와줘. 아버지가 그래도 엄마 말은 듣잖아."
내 말에 엄마는 실소를 흘리며 말한다.
"아빠가 무슨 내 말을 잘 듣니. 네 말을 더 잘 듣지."
내가 막내아들이라 예뻐하시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내 말을 잘 듣는 건 아니었는데... 뭔가 이상하다.
여자로 변하고 관계의 변화가 아버지와도 있는 건가? 난 고개를 갸웃하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엄마는 그런 날 보면서 말한다.
"네가 잘 말씀드려봐. 그래도 학비 자기가 벌어서 쓰겠다고 하는 게 대견스럽네. 장학금도 꼬박꼬박 받으면서."
엄마는 대견한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봤고 난 가슴을 쭉 펴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럼. 나만큼 대견한 딸이 어디 있겠어."
내 말에 엄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아빠한테 너 왔다고 하니까 얼른 가게로 오신단다."
엥? 그 정도라고? 이상하다. 확실히 온도 차이가 좀 심하게 난다. 내가 왔다고 일을 하시다가 가게로 오실 정도는 아니었는데.
역시 아들과 딸의 차이는 큰 건가? 막내라는 버프에 딸이라는 것까지 더해져서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 같은데?
아버지가 언니들한텐 되게 엄했는데 유독 나한테는 약하셨다. 그게 아들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막내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다 써야지.'
엄마가 아버지가 고물상에서 출발했다고 하자마자 바로 가슴이 떨려왔다. 아버지가 어떻게 나올지 솔직히 예상이 안 간다.
'싫어하시려나...'
1년간 그냥 군대 다녀온다고 생각해 달라고 하면 먹힐까? 음... 남자였을 땐 먹혔을 것 같은데... 부모님 입장에서 별로 달갑게 생각되진 않을 것 같긴 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버지가 날 보더니 미소를 지으신다.
"왔구나."
약간 무뚝뚝한 듯하면서도 애정이 섞인 말에 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빠에게 안겼다. 아빠는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쓸어주면서 친구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정후랑 수정이도 왔구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버지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일을 하셨는지 한겨울에도 몸에 열이 가득하셨다.
"갑자기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아버지의 말에 난 일단 굳은 얼굴로 애교 섞인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가리켰다.
"일단 앉으세요, 아버지."
아버지는 내 말에 자리에 앉았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눈치를 보셨다.
"무슨 일 있어?"
아버지는 엄마에게 물었고 엄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가 보여드린 계약서를 아버지께 내밀었다.
"이게 뭐야?"
"한 번 읽어보세요."
엄마의 말에 아버지는 서류를 받아 들고는 천천히 읽기 시작하셨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