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46. 챌린저
"수영은 나중에 배워야겠어요."
말을 무척이나 또박또박 하고 있었지만 꽤 취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눈을 감고 얘기하면 100%라고 봐야지.
'나도 꽤 취했으니까...'
나도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는데 와인이라고 얕본 감이 조금 있었다. 거기다 와인은 왜 이렇게 맛있어? 연거푸 홀짝이던 게 갑자기 확 밀려온 느낌이 들었다.
정리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분들 덕분에 거의 다 끝나가는 상태였다. 세연 언니는 이미 잔뜩 취해서 방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유리 언니도 취기가 어느 정도 오르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방에 들어가 쉬겠다며 들어갔다.
술이 약한 연두는 와인 몇 잔에 홀라당 정신을 잃어버렸고 한철 오빠는 물 만난 고기가 따로 없었다. 아직 남아 있는 먹거리와 와인을 정말 원 없이 먹고 있었는데 오늘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눕혀주고 올게."
정후의 말에 난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봤다. 내 시선에 정후는 어이없어하며 헛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
"그럼 뭔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정후의 말을 무시하곤 풀장 옆으로 마련된 썬 베드에 말 그대로 널브러져 있는 연두를 쳐다봤다.
난 가늘게 한숨을 내쉬곤 썬 베드 끝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정후를 쳐다보곤 말했다.
"내가 업을 테니까 좀 도와줘. 내가 방에 눕혀줄라니까."
내 말에 정후는 가만히 날 쳐다보기만 하고 있어 말했다.
"뭐해?"
"내 생각엔 너도 꽤 취한 것 같은데. 가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냐."
"오, 나 걱정해 주는 거야?"
확실히 변했어. 뭐, 당연히 변할 수밖에 없겠지. 남자인 나를 대하는 태도와 여자인 나를 대하는 태도. 그게 같다면 그것도 좀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하나?
"1타 2피라는 말이 있지."
정후의 말에 난 고개를 갸웃했고 정후는 그런 나를 보며 말한다.
"한 방에 둘 다 다치면 고생은 내가 한다는 얘기다."
"...."
음... 그러니까 내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가다가 혹시나 우리 둘 다 다쳐서 뒤처리로 고생할 자신을 걱정한다는 얘기?
"하..."
난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어부바 자세를 취했던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네가 업어. 내가 도와줄 테니까."
내 말에 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감동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한다.
"그래, 그게 옳은 선택이다."
정후는 무릎을 굽혀 어부바 자세를 취하고 앉았고 난 그런 정후의 등판을 소리나게 한 대 때려줬다.
짜악!
"아악!"
찰진 소리와 함께 정후의 비명이 퍼졌다. 정리를 하던 직원들이 놀라 정후와 나를 쳐다봤지만 역시, 무진 호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자신들의 일에 열중한다.
"갑자기 왜 때려!"
정후는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어떻게든 등을 매만져 보려고 해봤지만 다년간의 남동생 생활로 몸이 저절로 터득한 등짝 스매싱이다.
한과 정수가 서린 내 등짝 스매싱은 손이 닿지 않는다.
"아호.. 닿지도 않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미없는 몸부림을 치는 정후를 보며 다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일으켜 세울 테니까 업을 준비나 해."
난 그렇게 말하며 연두를 조심스레 일으켜 세우는 척을 하면서 기회를 엿봤다. 정후는 굉장히 경계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조심스레 어부바 자세를 취했다.
'이 때다.'
난 눈을 번쩍이며 한 손으론 연두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정후의 등짝을 후리려는 찰나 벌떡 일어나 앞으로 뛰어나가 뒤를 보는 정후가 보였다.
내 손은 허공을 갈랐고 굉장히 민망한 상황이 됐다. 정후가 나를 죽일 듯 노려봤고 난 그런 정후의 시선을 피해 연두를 보며 말했다.
"아이고, 연두야. 괜찮아? 안 추워? 너무 많이 마셨네. 와인이 도수가 낮아 보여도 계속 마시면 훅 가는데."
"죽는다, 아주."
정후의 말에 난 손짓을 하며 말했다.
"알았어, 안 할게. 안 해. 빨리 업어. 아니면 내가 업는다?"
내 말에 정후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연두를 업었다.
"옳지."
난 연두를 제대로 업게 만들어 주고는 나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안 들어가?"
"나? 흠... 아직 저러고 계신 분이 있는데 들어가긴 좀 그렇지 않을까?"
여전히 한자리 차지하고 먹고 마시고 있는 한철 오빠를 보며 말했다. 정후는 한철 오빠를 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완전 술 고래네. 술 고래야."
"피곤하면 먼저 들어가."
"눕혀주고 올게."
"그래."
정후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정후의 등에 수영복 차림으로 업혀 있는 연두를 보며 정후에게 손가락질 하곤 말했다.
"너 허튼짓할 생각하지 마라."
"신문 1면에 날일 있냐?"
정후의 말에 난 피식 웃곤 고개를 끄덕였다. 무진이라는 이름이 가장 강력한 이성의 끈이긴 하겠다.
"그래, 얼른 눕혀주고 나와. 한 잔 더 하자."
내 말에 정후도 날 따라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옮긴다. 연두가 정후의 등에 업혀 가면서 괴상한 소리를 간헐적으로 내서 정후가 움찔거리긴 했지만 어떻게 잘 업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정리가 거의 끝났네."
바비큐를 굽던 기구와 그밖에 필요 없는 것들이 모두 깔끔하게 정리가 끝났다. 테이블의 숫자도 줄었고 온풍기만 그대로였다.
따듯한 온기가 가득한 테이블에 난 다시 앉았고 한철 오빠는 그런 나를 보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셔도 되는데. 저 때문에 괜히 앉아 계실 필요 없습니다."
난 한철 오빠의 말에 손가락질하며 눈을 흘기며 말했다.
"술 들어가니까 다시 존대를 하시네."
내 말에 한철 오빠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순박한 웃음을 짓곤 뒷머리를 긁적인다.
"미안합니다. 아니, 미안해."
"미안하실 것까지야."
난 그렇게 말하며 내 잔을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그런 내 모습에 한철 오빠는 센스 있게 내 잔을 밀어줬다.
"아. 이게 내 잔이에요?"
"응."
난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짠! 하죠."
내 말에 한철 오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 말한다.
"진짜 괜찮아?"
한철 오빠의 말에 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음... 자가 진단 결과 남자일 때보다 오히려 술이 더 잘 받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괜찮은 것 같네요."
내 말에 한철 오빠가 피식 웃고는 내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친다.
"말하는 거 보니까 괜찮은 것 같네. 천천히 마셔. 와인도 은근히 도수가 있으니까."
"네."
난 한철 오빠의 말대로 와인을 홀짝였다. 와인과 함께 나온 음식들이 너무 맛있어서 취하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오빠는 술 진짜 잘 드시네요."
내 말에 한철 오빠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살아온 환경 자체가 술과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다 보니까. 살려고 늘어난 거지 뭐. 나도 처음에는 못 마셨어. 소주 반 병에 기절했다니까."
"에에! 오빠가요? 그 몸에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몸이 좋았던 건 아니야."
"오. 자기가 몸 좋은 거 아네."
내 말에 한철 오빠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본의 아니게 자랑이 됐네."
오빠의 말에 난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쳐다봤다.
"어렸을 때 난 엄청 몸이 허약해서 애들한테 괴롭힘을 많이 당했거든."
"뭔가 좀 상상이 안 간다."
"지금이야 운동도 하고 체중도 늘리고 그래서 그렇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비리비리했어."
"그래요?"
"응. 아, 사진 보여줄까?"
한철 오빠의 말에 난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철 오빠는 사진을 찾아 내게 보여줬는데 진짜 마른 체형의 중학생이 오빠와 꼭 닮은 얼굴은 하고 있었다.
"딱 오빠 얼굴이네."
내 말에 한철 오빠가 웃는다.
"진짜 말랐네. 와... 그럼 언제부터 운동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응.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부모님한테 말씀드렸지. 솔직하게. 중학교 때 싸움 잘하는 친구들한테 맞고 살았다. 그런데 부모님이 마음 아파하실까 봐 말씀을 못 드렸다. 고등학교 때도 똑같이 맞고 다니고 싶지 않다. 운동을 배우고 싶다."
"아이고... 부모님 마음이 안 좋으셨겠다. 오빠도 그렇고."
내 말에 오빠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펑펑 우시더라. 아버지도 내색은 하지 않으셨지만 언짢아하셨고."
"당연히 그렇죠. 자기 자식이 학교를 친구들한테 맞으면서 다녔다는데. 그런데 어떻게 용케 숨겼네요."
"얼굴은 안 때렸거든."
"어휴, 하여간 요즘 어린애들이 더 무섭다니까. 아, 요즘 어린애는 아니구나."
내 말에 한철 오빠가 웃음을 터뜨린다. 나도 따라 웃음을 짓고는 계속 얘기를 들어줬다.
"방학 동안에 열심히 운동했지. 그리고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운 좋게도 성장기와 맞물려서 키가 15cm나 크더라고."
"대박! 그래서요?"
"날 때리던 친구와 같은 반이 됐지."
"헐!"
이거 영화네, 영화야.
"그래서요!"
"분명히 나를 아는 눈치인데. 안 건드리더라고."
"풋! 큭큭. 쫄았네."
"쫄았지. 내가 괜히 쉬는 시간에 태권도 연습한다고 발차기도 하고 이종격투기 배운다고 여기저기 흘렸더니 안 건드리더라고."
난 손뼉을 치며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한철 오빠도 씩 미소를 짓더니 와인을 마시며 안줏거리를 하나 집어먹으며 손을 탁탁 턴다.
"그때 깨달았지. 내가 강해져야 하는구나."
"으음... 그래서 지금의 강한철이 있는 거구나."
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궁금한 점이 생겨서 물었다.
"근데 오빠는 가만히 뒀어요?"
"아, 나 때리던 놈?"
"네."
오빠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가만히 뒀지. 건드리면 콱 쥐어박아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3년 내내 안 건드리더라."
"큭큭. 내 생각엔 오빠 때린 그 사람이 더 조마조마했을 것 같아요."
"그랬을 거야. 걔도 나를 알았고 나도 걔를 알았으니까."
"어떻게 보면 더 지독한 복수 방법인데?"
내 말에 한철 오빠가 웃으며 와인을 마시려고 하기에 난 잔을 내밀었다.
쨍! 하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진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웃음소리가 객실 안까지 들리네."
정후가 내 옆에 앉더니 내게 잔을 내밀며 말했고 난 정후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면서 말했다.
"아, 오빠 중학교 때 얘기. 연두는 눕혀주고 왔어?"
"어. 네가 나중에 옷이라도 좀 갈아입혀주던가 해라."
"에에? 지금 수영복 입은 그대로야?"
"그럼 뭐, 내가 갈아입혀주리?"
"미쳤냐?"
"그러니까."
어... 그럼 내가 갈아입혀줘야 하나? 아니면 직원들한테 부탁을 해서... 아니지... 이게 무슨 소리야. 그렇다고 내가 갈아입히는 것도 좀 그런데... 아, 물론 나야 좋지만...
난 고개를 휙휙 젓고는 말했다.
"그냥 수영복 입고 자라고 해. 어차피 다 말랐잖아."
난 그렇게 넘기며 손을 휙 저었다.
"아, 몰라. 마셔."
난 그렇게 말하며 잔을 들었다. 정후는 그런 날 가만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괜찮은 수준이네."
정후는 잔을 부딪치곤 자신의 입술에 잔을 가져간다. 목젖이 꿀렁이며 와인잔의 와인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게 보인다.
"넌 무슨 와인을..."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와인을 물처럼 마셔? 난 눈살을 찌푸리며 부드럽게 와인을 넘겼다.
한철 오빠는 정후를 째려보는 나를 보더니 웃으면서 나와 정후를 번갈아 쳐다본다.
"둘은 무슨 사이야? 굉장히 친해 보이는데."
한철 오빠의 질문에 정후는 입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여자 친구예요."
"네, 여자인 친구요."
내 말에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곧 아! 하는 표정을 짓는 한철 오빠의 모습에 난 정후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 오해하시게 대답을 애매하게 하냐."
"여자 친구나 여자인 친구나. 나한텐 애인 아니면 다 똑같은데."
"아, 그러세요."
"네. 저러세요."
"어우, 뭐야?"
말도 안 되는 받아치기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얘 지금 이거 개그라고 한 거예요."
난 정후를 손가락질하며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한철 오빠에게 말했고 한철 오빠는 잔을 입가에 가져가려다 멈칫한다.
"에이, 설마..."
한철 오빠는 그렇게 말하며 정후의 눈치를 살폈다. 정후는 내게 괜히 잔을 들어보이며 평소보다 더 오버해서 말한다.
"야야. 잔이 비었잖아! 잔이!"
정후는 그렇게 말하며 뭔가 입이 근질근질하는 표정을 짓기에 손가락으로 척! 가리키면서 사전에 차단하곤 말했다.
"잔이 자니? 뭐 이런 거 하려고 했지 너."
내 말에 정후는 귀신이라도 본것처럼 날 쳐다본다.
이 망할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