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22. GOAL 어패럴
집에 오자마자 계약서부터 꺼낸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천천히 읽어봤다.
"어때? 네가 이런 거 전문이잖아."
세연 언니의 물음에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냥 뭐, 평범한 전속모델 계약서야. 우리한테 불리하게 작용하는 조항들은 하나도 없고, 연장 계약도 상호 동의가 있어야 되고."
"그러니까 문제 될 거 없는 계약서다?"
난 언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 대답에 언니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김주원 대표가 절대 우리에게 장난칠 사람이 아니다 하는 표정이었다.
하여간 계약서엔 문제가 없었고 우리를 상당히 배려한 느낌이 들었다.
"근데... 좀 많이 받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내 물음에 세연 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많이 받는 편이지. 방학 기간에 천만 원인데. 거기다가 우리가 전문 모델도 아니고 일반인이나 다름없는데."
확실히 적은 돈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다 방학 기간에 신상품의 반응이 좋으면 전속모델로 채용한다고 했으니 그렇게 되면 페이가 훨씬 높아질 거다.
학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촬영 일정을 잡는다고 했으니 전속모델이 된다고 해서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건 없었다.
"조금 걱정이네."
"왜? 난 재미있을 것 같은데."
"언니야 그렇겠지만 난 조금 걱정되는데."
어쨌든 돈을 받고 남의 물건을 홍보해 주는 일이다. 옷이 많이 팔린다고 해서 우리한테 더 많은 수익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허투루 할 순 없다.
우릴 믿고 맡겨준 김주원 대표님의 얼굴을 봐서라도 대충 할 순 없다.
"흠, 잘 하고 싶은데."
내 말에 언니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럼 연습하면 되지."
"연습? 어떻게?"
"너튜브."
언니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너튜브에 없는 게 없지. 분명히 우리에게 도움이 될만한 영상이 한 개쯤은 있을 거다.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가 생판 초보라는 거 그쪽에서도 알 거고. 충분히 감안해서 준비할 거야."
"그거야 그렇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미숙한 것보다 능숙한 게 좋잖아."
내 말에 언니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그거야 그렇지."
"그럼 지금부터 연습 좀 할까?"
"그래, 우리끼리 한 번 해보자. 아예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것보다는 간접 경험이라도 해보는 게 좋지."
난 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계약서를 확인한 나와 언니는 김주원 대표님에게 긍정적인 의견을 전했고 김주원 대표님은 우리 결정에 굉장히 고마워하셨다.
나는 방송과 병행하며 남는 시간을 쪼개 GOAL 어패럴에서 나온 의상들을 언니와 함께 쭉 훑어봤고 너튜브를 통해 피팅 모델들의 영상을 찾아보며 공부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김주원 대표님께 전화가 왔고 우린 생전 처음으로 피팅 모델 알바를 하게 됐다.
"잘 지내셨습니까?"
이번엔 기사님께서 직접 우리 집 앞까지 픽업을 하기 위해 오셨다. 역시나 과분할 정도로 좋은 차를 가지고 오셨기에 자연스레 주변의 시선이 모였다.
"아니요."
언니는 우는소리를 내며 말했고, 나 또한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우리 둘의 모습에 기사님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아...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죽을 만큼 운동했죠."
언니의 말에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기사님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제가 봤을 땐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두 분 모두 충분히 아름다우신 몸매를 가지신 것 같은데요."
"아름다움에 끝이 어디 있나요. 하아... 빨리 끝내고 뭐든 집어넣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그럼 얼른 모셔야겠군요."
기사님은 부산스럽게 움직이시며 얼른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셨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우리 둘은 예의 바르게 기사님께 인사를 드리곤 뒷좌석에 올라탔다. 기사님은 문까지 닫아주시고 얼른 운전석에 올라타셨다.
"출발하겠습니다."
"네."
"넵! 잘 부탁드립니다."
차가 미끄러지듯이 움직이고 나와 언니는 마지막까지도 수많은 피팅 모델들의 너튜브 영상을 보면서 이동했다.
기사님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GOAL 어패럴 내부의 스튜디오는 이미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 그 옷은 이쪽으로 모아 두세요. 마지막에 촬영할 옷들이에요. 아, 그 옷들은 이쪽으로. 조명 팀 여기 조명 비는 것 같은데요?"
기사님은 우릴 스튜디오 중앙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여자분에게 데려갔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커리어 우먼처럼 보이는 여자 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스튜디오 곳곳을 바라보며 지시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그분과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곧바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반가워요. 이번 의상 총괄 매니저인 이소라에요."
시원하게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난 가볍게 붙잡곤 내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윤세나라고 합니다."
내 소개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재빨리 나를 위아래로 스캔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곤 곧바로 세연 언니에게 뻗는 손.
"이쪽이 그럼 윤세연 양인 가요?"
"아, 네. 윤세연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역시나 언니도 빠르게 훑어본다.
"흠, 대표님께서 큰소리치시는 이유가 있었네. 두 분 다 대단한 미녀신데요? 몸매도 좋으시고... 올해 스물둘, 스물셋이라고 했나요?"
"네."
"아, 네."
우리 둘이 동시에 대답하자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지으시며 말한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인사는 차차 나누도록 해요."
그녀의 말에 우리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델들 왔어요! 메이크업 팀 빨리 준비해 주세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메이크업 팀이 다가와 우리를 데리고 이동했다. 우린 의자에 앉히자마자 곧바로 헤어와 메이크 업을 받았다.
생전 처음으로 제대로 꾸미는 거였기 때문에 거울을 통해 본 내가 조금씩 변하는 게 신기했다. 화장을 했다고 해서 엄청나게 예뻐지는 건 아니었는데 확실히 화장을 안 했을 때보다는 더 예뻐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 피부 좋은 것 좀 봐."
"어린 건 못 이기지. 피부가 진짜 깨끗하게 좋네."
"이 아가씨는 화장 안 한 게 더 예쁜 것 같은데?"
"둘 다 머릿결도 너무 좋네요."
사방에서 나와 언니에게 쏟아지는 칭찬 세례에 우린 감사를 표했다.
생각보다 긴 시간에 조금 지루해질 무렵 다행스럽게 모두 끝났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린 메이크업과 헤어를 끝내자마자 곧바로 의상을 입기 위해 이동해야 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
내 말에 언니도 고개를 끄덕이며 정신없이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나와 언니는 쥐어준 옷을 갈아 입었고 곧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너튜브 영상을 통해서 봤던 옷과는 확연히 차이가 보이는 옷들이었다.
"예쁘다."
옷을 처음으로 본 언니가 내게 말했고 나도 언니와 같은 생각이라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러네. 우리가 봤던 옷이랑 완전히 다르다."
"그냥 일반적인 옷이랑 비교해도 별로 차이가 없는데?"
"그러네. 확실히 이쪽이 거부감이 덜 들긴 한다."
우리가 옷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촬영 감독님에게 다가갔는데 우리 둘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확실히 대표님께서 떼쓰실만했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이번 GOAL 어패럴 신상품 촬영을 맡은 엄승용입니다."
그는 자신의 카메라를 들어 보이며 인사를 건네며 웃었고 우리도 그를 보며 미소를 짓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려요!"
우리의 예의 바른 인사에 엄승용 씨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이번 신상품에 대표님이 목을 잔뜩 매고 계시거든요."
엄승용 씨의 말에 난 난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대표님께서 그렇게까지 사활을 걸고 계시는 줄은 몰랐네요."
"우리 회사의 아킬레스건 아닙니까.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엄승용 씨의 말에 언니는 의욕을 더욱 불태우는 모습을 보여줬고 난 그런 언니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촬영이 시작됐고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촬영은 생각보다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엄승용 씨는 특유의 밝고 익살스러운 농담으로 우리의 긴장을 풀어줬고 의상을 갈아입을 때마다 도움을 주시는 의상팀과 중간중간 화장을 고쳐주시는 분들도 우리에게 너무 잘해주셨다.
대부분 우리를 서포터 해주시는 분들이 여자분들이었고 그분들보다 한참이나 어린 우리 둘을 상당히 예뻐해 주셨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너무 고생했어요!"
덕분에 생각보다 촬영이 빠르게 끝났다. 대표님께선 촬영이 다 끝나서야 촬영 현장에 도착하셨는데 우리가 점심시간을 놓쳤다는 걸 들으시고 먹을 걸 한가득 가지고 오셔서 큰 환호를 받았다.
덕분에 우린 꿀맛 같은 늦은 점심을 먹고 거기다 디저트에 커피까지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
"고생 많았어요. 생각보다 결과가 훨씬 더 만족스러워서 너무 기쁘네요."
"대표님께서 기쁘시다니 저도 기쁘네요. 저희 진짜 노력 많이 했어요. 믿음에 부응하려고요."
세연 언니는 어느새 쪼르르 대표님에게 다가가 말했고 둘은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난 그런 둘의 모습을 커피를 마시며 보고 있었는데 내가 봤을 때 언니는 이미 김주원 대표님에게 넘어간 느낌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것 같은데..."
난 미간을 좁히며 혼자 중얼거렸는데 옆에서 누군가의 말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누군가 봤더니 기사님이셨는데 상당히 곱지 않은 시선으로 대표님을 바라보고 계셨다.
마치 나이 많은 도둑놈에게 자신의 딸을 뺏긴 아버지의 표정으로... 세연 언니가 아까워 미칠 것 같다는 그런 표정이셔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니, 기사님께선 대표님 편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전 언제나 미녀들의 편입니다."
기사님의 진지한 표정에 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굉장히 독특한 캐릭터라곤 생각했는데 막상 제대로 겪어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
"제가 보기엔 70%는 넘어간 것 같습니다."
"흠... 기사님께서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시는군요. 하긴, 저렇게 티를 내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요. 은근히 언니가 저돌적인 면이 있어요."
내 말에 기사님은 의아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난 그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하곤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저는 세연 씨를 말한 게 아니라 대표님을 말씀드린 겁니다."
기사님의 말에 한동안 이해가 가지 않아 멍하니 있다가 에에? 하곤 소리를 냈다.
"아이고."
난 나도 모르게 너무 큰 소리를 내서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막곤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아니더라도 스튜디오 안은 시끌벅적했기 때문에 다행히도 내게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난 기사님을 보며 말했다.
"대표님도 우리 언니한테 마음이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렇게 안 보이나요?"
기사님은 그렇게 말하며 대표님과 언니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난 그 둘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는 알겠는데. 솔직히 대표님은 잘 모르겠다. 그냥 귀여운 여동생한테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오빠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냥... 형식적인 것 같은데. 아닌가요?"
"제가 보기엔 언니 쪽이 형식적인 것 같은데요? 뭐라고 할까... 이쪽 업계에서 성공한 선배님께 열심히 조언을 구하는 여대생이라고 할까? 그 이상으론 안 보입니다만..."
내가 겪었던 언니는 저렇게 남자 앞에서 앙탈을 부리거나 교태를 부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아니요. 절대로 그런 건 아니에요. 마음이 분명히 있는 거예요. 언니가 대표님 얘기 엄청 많이 했거든요. 그 레스토랑에서 헤어진 이후로요."
"그건 대표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다만, 자기도 염치가 있는지라 적극적으로 대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난 기사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10살 차이는 내 생각에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세연 언니 위로 미혼인 언니가 두 명이나 있는데... 이거 족보가 꼬여도 너무 꼬이지 않을까?
"어떻게 황금 화살을 날리시겠습니까? 철 화살을 날리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