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21. GOAL 어패럴
기사님은 2층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2층에는 홍대에서 봤던 그 남자가 우릴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언니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고 나도 따라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기사님과 대표 이사는 언니와 나의 겉옷과 가방을 받아주시는 건 물론이고 의자까지 매너 있게 빼주셨다.
나와 언니는 의자에 앉았고 기사님은 대표 이사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자리를 피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오시는데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과분한 대접을 받아 너무 편하게 왔습니다."
내 말에 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고 언니도 나를 따라 고마움을 표현했다.
"감사드려요. 덕분에 정말 편하게 왔어요."
"본래는 집까지 차를 보내드리려고 했는데 저 친구가 극구 말리더군요. 이미 충분히 부담스러울 거라면서."
기사님이 나간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에 나도 고개를 돌려 기사님이 나간 방향을 바라보다가 다시 대표 이사를 보며 말했다.
"유능하신 분이네요."
내 말에 그가 작게 웃는다.
"정식으로 소개드리겠습니다. 저는 GOAL 어패럴의 대표 이사를 맡고 있는 김주원이라고 합니다."
그의 소개에 언니가 자신의 소개를 한다.
"한국대 의류학과에 다니고 있는 23살 윤세연이라고 합니다."
의류학과에 잔뜩 힘을 줘서 말하는 언니의 소개에 난 작게 웃으며 간단하게 내 소개를 했다.
"윤세나에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을 줬다. 누구에게 눈짓을 주는 건가 싶어서 고개를 돌렸더니 점원이 메뉴판을 다소곳이 들고 있었다.
"메뉴판 드리겠습니다."
고급 레스토랑에 온 게 처음이라 메뉴판을 본다고 해서 뭘 고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받아 들기는 했다.
"너무 비싸..."
언니가 메뉴판을 보더니 기겁한 얼굴로 내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가격을 보니 전체적으로 상당히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제가 대접할 테니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면 어려워 마시고 말씀해 주세요."
난 그의 말에 메뉴판을 덮고 말했다.
"왜요?"
내 물음에 그가 약간 놀란 얼굴로 날 쳐다봤다. 언니 또한 내가 다짜고짜 급발진할 줄 몰랐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본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래요."
내 말에 그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떤 부분이 그런가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난 답답하단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아니, 어느 누가 아르바이트생한테 기사 딸린 고급 세단을 보내요. 거기다가 원래는 집 앞까지 보내려고 하셨다고요? 그거 말 안 되잖아요."
그래, 말이 안 된다. 언니 또한 내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김주원 대표님을 쳐다봤다.
대표님은 내 진지한 눈빛에 메뉴판을 덮고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두 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GOAL 어패럴의 전속모델로 두 분을 발탁하고 싶습니다."
"에에? 전속모델?"
언니가 놀라 소리쳤고 나도 너무나 뜻밖의 말이라 당황스러웠다.
"처음에는 정말로 두 분을 아르바이트로 채용할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대표 이사라고 하지만 모델 경험이 전무한 두 분을 GOAL 어패럴의 신상품 전속모델로 쓰긴 아무래도 어려우니까요."
"에에? 신상품 전속모델이요?"
"네. GOAL 어패럴은 20~30대 남자가 무척 선호하는 브랜드입니다."
김주원 대표의 말에 세연 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렇죠. 아무래도 GOLA 어패럴 자체가 축구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론칭한브랜드니까요."
세연 언니의 말에 김주원 대표가 살짝 놀라더니 곧 아! 하는 탄성을 내며 미소를 지었다.
"한국대 의류학과라고 하셨죠?"
김주원 대표의 말에 세연 언니는 배시시 웃으며 수줍게 말했다.
"네. 그리고 GOAL 어패럴에 관심도 조금 있었고요."
"이거 영광인데요? 음, 그럼 혹시 제가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세연 언니는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어떤 질문이든 다 답해주겠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 모습에 난 피식 웃곤 가만히 둘을 쳐다봤다.
'어쨌든 나쁜 의도로 접근한 건 아니네.'
김주원 대표는 말을 하려고 하다가 옆에 서 있는 점원을 보며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주문은... 제가 알아서 해도 될까요? 제가 여기 자주 와서 정말 맛있는 걸 알거든요."
그의 말에 세연 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주원 대표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고 나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그는 메뉴판을 직접 자신이 걷어 점원에게 건네주면서 말한다.
"제가 늘 먹던 거로 주세요."
그의 말에 점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점원이 가고 그는 세연 언니를 보며 말했다.
"그럼 다시 말씀드릴게요. GOAL 어패럴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뭘까요?"
"가장 큰 장점이 가장 큰 단점이 아닐까요?"
세연 언니의 말에 김주원 대표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렇죠?"
음, 아까 GOAL 어패럴이 20~30대가 무척 선호하는 브랜드라고 했지?
"20~30대 여자들에겐 인기가 없어요?"
내 물음에 김주원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네. 그것도 많이요."
"그럴 수밖에 없죠. 축구를 좋아하는 여자는 적으니까요."
GOAL 어패럴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축구를 기반으로한 옷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레플리카 유니폼이나 유니폼 디자인을 변형하여 만든 옷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남자들 사이에선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다만, 축구를 좋아하는 남자의 숫자는 많은데 반해서 축구를 좋아하는 여자의 숫자는 적기 때문에 아무래도 20~30대 여자들에겐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다.
"세연 씨. 그냥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단순히 축구를 좋아하는 여자가 적어서 그럴까요?"
김주원의 물음에 세연 언니는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옷이 안 예뻐요. 옷감도 좋고 가격도 적당하고 활동하기에도 확실히 편한 옷은 맞지만 디자인이 별로면 여자들은 절대 입지 않아요."
세연 언니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내가 여자가 아니라도 알겠다. 거기다 상대가 20~30대 여자라면 그 어떤 그룹보다 디자인에 까다로운 부류일 텐데.
"저는 유니폼이 미학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주원 대표의 말에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에이, 그거야 남자의 눈으로 봤을 때 그렇겠죠. 유니폼 자체가 그 팀의 상징이고 엠블럼에도 깊은 의미가 있으니까 그것을 멋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자들이 봤을 때 토트넘의 엠블럼은 공 위에 서있는 닭이지 토트넘이 아니에요. 유니폼에 들어가는 스폰서 마크들도 지저분한 것들에 지나지 않고요."
축구를 좋아하는 여자들이라면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다수의 여자들은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봤다.
내 말에 김주원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그래서 이번 신상품은 그러한 고객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혀 다른 형태의 옷들을 출시하려고 합니다."
그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론 의문이 생겨서 물었다.
"아니, GOAL 어패럴에 여자 직원이 없나요? 이런 건 사실 사내에 있는 여자분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만 해도 파악이 가능한 부분일 것 같은데."
"아, 그게... 직원들 뽑을 때 축구를 좋아하는 여자를 뽑습니다."
"아..."
난 작게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대로 파악을 하려면 무작위 여성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야 하는데... 그것도 내가 봤을 땐 큰 의미가 없었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저희 브랜드를 아는 여자분은 대부분 좋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축구를 좋아할 테니까요."
내 말에 김주원 대표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 정말 잘못된 시장조사였죠."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식전 빵 드릴게요."
"아, 네. 감사합니다."
"와, 냄새 너무 좋다."
나와 언니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빵에 눈을 고정했다. 나도 모르게 침샘이 저절로 자극되는 게 느껴졌다.
아담한 그릇에 호밀 빵과 크랜베리 빵이 나왔는데 발라 먹을 수 있는 버터가 보였다. 버터 위에 약간의 기름 기가 있기에 난 점원에게 물었다.
"이 기름은 뭐예요?"
내 물음에 점원은 친절한 미소로 설명해 줬다.
"올리브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점원이 인사를 꾸벅하곤 사라졌고, 김주원 대표는 우리 둘을 보곤 말했다.
"시장하실 텐데 일단 식전 빵부터 드시죠. 얘기는 천천히 나눠도 되니까요."
언니와 나는 식전 빵을 세상 맛있게 먹었다. 따듯한 빵에 고소한 빵 냄새와 올리브가 곁들어진 버터까지 발라 먹으니 금상첨화였다.
"맛있다."
언니가 내게 속삭이며 말하기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모습에 기분이 좋았는지 김주원 대표님도 웃으며 말했다.
"잘 드시니까 보기 좋네요."
나야 원래 남자였으니까 남자 앞에서 뭐 내숭을 부리며 먹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언니도 뭐 딱히 먹을 거 앞에서 품위를 지켜가며 먹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언니는 대표님의 말에 뒤늦게 후회가 밀려드는지 고개를 숙이곤 눈을 꼬옥 감았지만 내가 보기에 김주원 대표님은 오히려 그 모습을 더 좋게 보는 것 같았다.
메인 요리가 나오기 전에 프로슈를 얹은 시져 샐러드가 나왔는데 파르메산 치즈가 눈처럼 뿌려져 있었고 싱싱한 야채들이 보였다.
샐러드를 거의 먹자 곧바로 알리오올리오와 새우로제크림파스타와 크림파스타가 나왔다.
"먹고 싶은 거 덜어 먹으면 될 것 같은데요?"
김주원 대표님의 말에 우린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거면 세 가지 전부 다 맛을 봐야지. 암, 그렇고말고.
난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그릇에 모두 덜어서 맛을 봤다. 파스타를 처치하고 드디어 메인 요리가 나왔는데 식사가 맛있으니 대화도 즐거웠다.
세연 언니는 패션 전반에 걸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김주원 대표님과 죽이 잘 맞았고 나는 그 덕분에 먹는데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식사도 거의 끝나가고 대화가 무르익자 김주원 대표님은 슬금 본론을 꺼내셨다.
"계약 기간은 방학 때로 한정하고 반응을 보고 연장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사실 회사 내부에서 반발이 좀 있어서요."
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내 말에 언니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충분히 이해하니까 그 부분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반발이야 당연히 있겠죠. 뭐, 저희가 모델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대학생인데. 그런 우리를 다짜고짜 전속모델로 발탁하겠다고 하시니..."
언니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 회사 직원이었다면 이상하게 생각했을 거다. 아닌가? 오히려 차라리 뭐 혈연이라고 하면 이해가 가능하겠다.
홍대에서 봤는데 마음에 들어서라고 하셨나? 그렇게 말했다면 반발이 없는 게 더 이상한 것 같다.
"세부적인 내용이 담긴 계약서입니다. 보시고 물어보실 사항이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모쪼록 좋은 결단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 너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정말 잘 먹었어요."
정말 과분한 대접에 나와 세연 언니는 김주원 대표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다. 우리에게 도대체 어떤 가능성을 본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릴 높이 평가해줬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맛있는 식사, 즐거웠던 대화에 자연스레 분위기가 좋았다.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온 나와 언니를 보며 김주원 대표님이 말했다.
"집까지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차가 미끄러지듯이 들어왔고 그 모습에 세연 언니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실 필요까지 없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초행길이라 그런데 지하철역까지만 데려다주세요. 이거 타고 대표님도 집에 가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냥 타고 가도 뭐, 괜찮을 것 같은데. 난 그렇게 생각하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는데 언니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미녀 두 분과 더 오래 함께할 수 있으니 저야 환영이죠."
이거 선수네.
난 얼굴을 찌푸리며 세연 언니와 김주원 대표를 번갈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