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20. GOAL 어패럴
게임은 철저히 미드 키우기였다. 정글의 2렙 갱을 시작으로 서포터의 묻지 마 로밍, 거기다 탑 말파잇트가 내려와 상대 미드에게 궁을 사용해 주는 진풍경까지 나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니, 이거 너무 나 밀어주는 거 아니야?"
초반에 힘을 줬기 때문에 다른 라인도 초반에 이득을 봐야하는 건 마찬가지였는데 너무 나만 밀어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부담스럽게 왜 이러는 거야."
하여간 초반에 킬을 먹은 나는 카시오패아의 특성을 살려 강하게 미드 라인을 압박했다. 사실상 CS가 50개 넘게 차이가 나서 미드 라인전은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른 라인에서 이렇게나 많이 봐줬는데 이 정도 차이를 내지도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거였다. 포탑 골드를 다 먹고 우월한 라인 주도권을 바탕으로 탑과 미드에 은혜를 갚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바텀 갑니다. 바텀."
난 부지런히 핑을 찍으면서 바텀으로 향했다. 대규모 싸움이 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라인을 빠르게 밀었던 것이 주효했다.
내 예상처럼 바텀이 큰 교전이 일어났다. 상대 정글과 탑도 텔레포트를 타서 순간적으로 4:2 구도가 됐지만 잘 커버린 내가 합류해 4:3 구도를 만들었다.
인원수가 우리가 1명이 부족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너무 강했다.
"쓸어 담겠다."
언제 봐도 무척 신기한 느낌이다. 어떻게 플레이를 해야 이기는지. 아니 애초에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가 보였다.
그리고 그 플레이가 내가 생각하는대로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게 말도 안 되는 플레이라고 하더라도 그냥 됐다.
"오케이."
우리 원딜이 죽긴 했지만 내가 상대방을 모두 죽여서 이득을 봤다.
"이거 내가 운영하면 되겠다."
난 빠르게 이길 수 있도록 잘 안 치던 채팅까지 쳤다.
[이거 제가 사이드 가서 운영할게요.]
[예히~]
[저흰 숨만 쉬고 있겠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팀원들이 전부 내게 우호적이라서 내 오더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줬다.
무리하지 않고 내가 운영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줬는데 오브젝트 위주로 경기를 풀어나가니 어느 시점에선 그냥 게임이 터져있었다.
[이거 뭐 말하는 대로 했더니 게임이 터져 있네.]
내 지시에 따라서 착실하게 움직여준 팀원들이 느끼는 반응들은 모두 똑같았다.
어느 순간엔가 그냥 게임이 터진 느낌. 이게 다 약속의 오더 덕분이지. 게임을 이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에 따라 팀원들을 움직이고 또 팀원들이 움직여주니 지는 게 더 힘들었다.
"아, 항복 좀 해라."
이렇게 운영 당하면 게임하는 것 자체가 짜증 날 텐데 꾸역꾸역 어떻게든 따라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건 나만 느낀 게 아닌지 팀원들도 상대팀에 대해서 한 마디씩 한다.
[와, 이걸 서렌을 안 치네.]
[그러니까요.]
[이거 카시만 자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
[우리도 운영하면서 많이 컸는데.]
상대 캠프를 돌면서 정글도 착실히 빼먹고 오브젝트도 모조리 챙기게 했기 때문에 팀원들 또한 성장이 그렇게 뒤처지는 편은 아니었다.
물론, 워낙 초반부터 나한테 몰아줬기 때문에 내가 압도적으로 성장하긴 했지만 내가 죽는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각이 안 나오는데.
"한타 조합도 아니고."
아무리 봐도 승기가 이미 우리한테 넘어온 상황이다. 내 생각엔 아마 상대방도 이미 패색이 짙다는 걸 느끼고 있을 거라고 봤다.
게임을 빨리 끝내고 싶긴 하지만 무리하진 않는다. 조급한 마음은 무리한 플레이를 만들고 그 무리한 플레이가 이기기 위해 더 시간을 소모하게 만든다.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바론 싸움해 볼까요?]
바론을 줘도 지고 안 줘도 지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바론을 내주고 포탑에서 막아보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기엔 격차가 너무 벌어졌다.
어차피 지는 거 그냥 바론을 뺏는 모험이라도 하는 게 졌을 때 조금 더 후회가 남지 않은 플레이라고 본다.
[이거 아마 싸움 걸 것 같거든요? 이거 들어오면 제가 어그로 끌게요.]
[여신님 진짜 바쁘신 모양이다.]
[그러게. 채팅 원래 잘 안 치시는 거로 알고 있는데.]
[빨리 끝내 드리자.]
착한 팀원들을 내 말에 따라 바론으로 모였고 서포터가 바론 근처에 시야를 차근차근 점령하기 시작한다.
탑이 탱을 하며 바론을 치기 시작했고, 우리 팀원들도 따라서 바론을 쳤다. 생각보다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피에 허겁지겁 적이 확인하고 달려오긴 했지만 이미 시야가 먹힌 상태이기 때문에 전진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이거 그냥 먹겠네."
생각보다 격렬한 저항 없이 바론을 먹은 우리들은 집으로 귀환 후 곧바로 미드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론 버프를 이용해 힘으로 찍어 누르면서 포탑과 억제기를 철거하고 그대로 쌍둥이까지 밀었다.
상대는 쌍둥이 포탑을 끼고 최후의 전투를 치렀고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우리는 한 명도 우물로 가지 않고 넥서스를 파괴할 수 있었다.
"예. 끝났다."
난 손을 번쩍 들면서 좋아했고 타이밍 좋게 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세나야, 언니 나왔어!"
"어!"
난 컴퓨터를 끄고 곧바로 준비한 속옷을 들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
언니와 함께 밖으로 나오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쏟아졌다. 나야 뭐 지극히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예쁜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고.
언니도 절대로 어디 나가서 꿀리는 외모와 몸매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여자라서 받는 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예쁜 여자라서 받는 시선이었다.
"엄청 쳐다보네..."
선망이나 동경하는 시선도 있지만 노골적으로 몸매를 훑는 시선이나 집요하게 가슴만 보는 시선. 또 그냥 기분 나쁜 시선들도 있었기 때문에 여자가 되고 꽤 시간이 지났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뭐 그런 걸 신경 써. 신경 쓰지 마."
언니도 제법 많은 시선들을 느끼며 살아온 사람이라 그런지 남들에게 받는 시선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언니는 내 팔을 끌어안더니 엄청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아, 그나저나 엄청 떨린다."
"그렇게 떨려?"
"응."
난 그런 언니의 모습에 작게 웃고는 말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데. 만나고 싶어서."
"초인적인 인내와 의지로 감내했지. 그쪽이 우리를 더 기다리게 만들어야 만났을 때 의미가 있는 법이야."
"그래?"
내 말에 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럼. 만약에 그날 바로 전화했으면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했을걸? 아마 지금처럼 이렇게 큰 환대는 못 받았을 거다."
"흠... 그건 그럴 것 같네."
언니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확실히 조금 애가 닳게 해줘야 뻣뻣하게 나오지 않겠지.
하여간 우린 청담역에 도착해 언니가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이 멈춰 서더니 우리가 놀라지 않게 작게 경적을 울린다.
우린 고개를 돌렸고, 잘 빠진 고급 세단의 창문이 내려간다.
"윤세나 씨, 윤세연 씨 맞습니까?"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말끔한 정장을 입고 우리에게 묻기에 나와 언니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리더니 옷을 매만지며 우리 앞에 오더니 고개를 꾸벅 숙인다.
"대표님께서 두 분을 정중히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음... 뭔가 좀 이상하다. 나도 그렇고 언니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조금 의아한 표정이다.
'이렇게까지 한다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과하다. 아르바이트에게 너무 과분한 대접을 해주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그 남자 너한테 마음 있나 봐."
언니의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돌려 언니를 쳐다봤다.
언니는 그런 게 있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 남자는 우리가 차에 타기 편하게 문을 친히 열어주셨다.
남이 열어주는 차에 타는 게 처음인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황송스럽게 차에 탔고 그는 늘 해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문까지 닫아 주신다.
그리곤 빠르게 차 앞을 뛰어 운전석에 탑승하곤 안전벨트를 착용하며 말한다.
"출발하겠습니다."
"아, 네."
"네."
우린 그분의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했고 그런 우리 둘의 모습에 기사님은 작게 웃으시며 차를 출발시켰다.
언니는 뒷좌석에 앉아 내게 작게 속삭였다.
"내 생각엔 처음에 작업 걸던 게 맞는 것 같아. 그러다가 선회한 거지. 아르바이트로. 그때 생각나?"
언니의 말에 GOAL 어패럴 대표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 봤다.
홍대 길거리에서 만났고, 그분이 우리 둘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도 꽤 다급한 얼굴이었어.
"뛰어왔지? 우리한테."
"응, 엄청 숨 차했잖아. 그리고 우리 둘 전부 번호를 따려고 했지."
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랬다.
"그리고 나중에는 너를 콕 찍었어."
음, 내 번호만이라도 알려달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난 100% 작업을 거는 거라고 확신하고 격하게 거절했지. 근데 알고 보니까 작업이 아니라... 아르바이트 제의였고. 본인은 요즘 핫하다는 GOAL 어패럴 대표 이사였고...
"에이, 그런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나한테 작업을 거냐."
"어리고 예쁘잖아. 남자들 단순해. 그거면 끝이야."
언니의 말을 듣고 보니까 또 그것도 그렇다. 내가 남자라서 그건 누구보다 잘 알지. 남자야 예쁘고 몸매 좋으면 좋아하지 싫어하는 사람이 있나?
거기다 어리다고? 이야, 그럼 뭐 거기서 이미 끝났지.
"진짜 작업이었다고?"
"응, 근데 실패하니까 작업이 아닌 척하면서 아르바이트 제의를 한 거지."
언니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긴 했지만 뭐 어쨌든 그게 맞다면 조금 덜 민망해해도 된다는 얘기네.
"가보면 알겠지."
"에이, 딱 보면 척이지. 야. 너 같으면 단순히 아르바이트 제의한 알바생한테 이런 비싼 차를 보내겠냐?"
흠... 그건 맞지. 확실히 그저 아르바이트생을 대하는 거라고 보긴 어려운 게 사실이다. 너무 과분하잖아.
아니면 뭐, 이쪽 회사의 사명이 누구든 귀하게? 뭐 이런 모토를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근데 저희 어디로 가는 건가요?"
언니가 우릴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궁금했는지 기사님에게 물었고 기사님은 백미러를 통해 우리를 보시며 말씀하신다.
"알리고때로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알리고때?"
언니는 처음 들어봤는지 고개를 갸웃했고 나도 처음 들어보는 곳이라 뚱한 표정을 지었다.
모를 땐 검색해보는 게 최고지. 언니는 우리가 가는 곳을 듣자마자 검색을 시작했고 검색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눈이 커진다.
"왜?"
내가 작은 목소리로 묻자 언니도 작은 목소리로 내게 핸드폰을 보여주면서 말한다.
"이것 봐."
언니가 보여준 건 알리고때로 보이는 곳이었는데 청담동에서도 꽤 잘 알려진 맛집 중 하나로 보였다.
"고급 레스토랑?"
분위기가 굉장히 좋아 보이는 레스토랑이었는데 1층에는 야외 테라스가 있고 2층에는 룸 테이블과 함께 실내, 실외 테라스가 보였다.
겨울이라 야외에서 먹긴 힘들겠지만 내부도 상당히 좋아 보였다. 특히나 조명들이 상당히 예뻐 보였다.
"엄청 비싸 보인다."
언니의 속삭임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뭔가 좀 이상하다.
"정말로 여기로 우리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나요? 그 GOAL 어패럴 대표 이사님이 맞으신가요? 저희를 데리고 오라고 한 분이? 혹시나 다른 사람을 착각해서 저희를 데리고 가시는 건 아닌지..."
내 말에 기사님은 빙긋 웃으시더니 말한다.
"제가 처음에 두 분의 성함을 불렀던 것 같은데요."
"아... 죄송합니다."
"죄송하실 것까지야."
정신이 없네. 맞다. 생각해 보니까 청담역에서 기사님께서 정확하게 우리 이름을 부르셨다. 그럼 지금 우리를 부른 사람이 그 홍대에서 만난 그 사람이 맞다는 얘기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면서 우리 둘을 부른다고? 그냥 단순하게 GOAL 어패럴의 철 지나서 안 팔리는 옷들 모델 시켜보려고 부르는 거 아니었나?
"거 봐, 내 말이 맞다니까."
언니는 내 옆구리를 툭툭 찌르며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지만 난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기사님을 바라봤다.
"의문이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직접 대표님께 여쭤보시죠."
자신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하는 표정을 짓는 기사님을 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가장 확실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