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14. 방송을 합시다.
난 언니와 함께 익숙하지 않은 외출을 나왔다. 언니도 상당한 몸매에 미모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확실히 나오자마자 이목을 집중시켰다.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은 외모에 서로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여자든 남자든 계속 쳐다봤다.
'남자는 이해하는데 여자는 왜 쳐다보는 거야?'
남자야 뭐 본능이니까 쳐다보는 걸 이해하겠는데 여자는 왜 나와 언니를 쳐다보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떤 여자는 오히려 웬만한 남자들보다 더 노골적으로
쳐다봐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왜?"
언니는 그런 내가 좀 이상했던지 걱정스레 묻기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언니는 나와 함께 옷을 사러 나가자고 했고 난 그 말에 이미 반쯤 포기 상태였다.
'험난한 하루가 되겠구나...'
컴퓨터와 방송 장비를 사준 대가라고 생각하면 못 참을 것도 없긴 했지만 힘든 건 힘든 거였다.
오랜만에 나온 홍대 거리는 낮부터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관광을 온 외국인들의 모습도 많이 보였고 우리처럼 시험이 끝나 해방감을 만끽하는 대학생들도 많이 보였다.
"여기 이런 곳이 있었나?"
그렇게 홍대를 다니면서도 모르는 곳이 있는 모양이다. 언니는 신기하다는 표정과 기대감 어린 표정을 동시에 지으며 매장에 들어갔다.
"빈티지 숍인가?"
라다몬다라는 상호의 매장이었는데 내부에 들어가 보니 딱 봐도 빈티지 숍처럼 보였다.
매장 안의 분위기는 상당히 다채로운 색감이 가득해 환해 보였다. 조명도 상당히 밝았고 사람들도 굉장히 붐볐다.
"인기 많은 곳인가 봐."
내 말에 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도 그렇고 나도 빈티지 취향은 아니라서 꽤 괜찮은 매장인데 지금껏 몰랐던 것 같았다.
"여기 유명한가 봐."
세연 언니는 내게 작게 귓속말을 하며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는데 빈티지 인싸들은 다 아는 매장이라고 소개가 돼 있었다.
우리는 매장 안을 돌아다니며 이 옷, 저 옷을 봤지만 크게 마음에 드는 옷을 찾지 못했다. 중간, 중간 몇 벌 있기도 했지만 처음 온 곳에서 바로 사는 역사를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다른 곳에도 가보자. 또 올게요."
세연 언니는 발랄한 목소리로 매장 직원에게 인사를 하곤 밖으로 나와 자신이 익숙한 곳으로 나를 끌고 갔다.
"언니가 너 옷 한 벌 사줄게. 방송하려면 입고할 옷은 있어야지."
"나 옷 많은데."
"네가 옷이 뭐가 많아."
내 방엔 나도 아직 다 파악을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옷이 많았다. 남자일 때와 비교하면 거의 네 배는 더 많은 옷이 나도 모르게 생겼다.
어디 그뿐인가. 가방이며 신발이며 귀걸이까지 TS된 기념으로 선물을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철저하게 내 취향에 맞춰져 있었다.
말 그대로 그냥 그렇게 있었다. 원래 그렇게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그런데 언니는 지금 그런 나보고
옷이 없다고 말한다.
'도대체 얼마나 많아야 한다는 말이지?'
1년 동안 입어도 다 입을 자신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옷들이 내 옷장에 잠들어 있는데 옷이 없다니...
거기다가 또 한 벌 사자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준다는 걸 매정하게 또 됐다고 하기도 그랬다.
"이거 입고 와 봐."
"응."
사주는 사람이 왕이지. 난 얌전히 옷을 받아들고는 탈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옥의 시작일 줄
미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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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예쁘네. 왜 이렇게 잘 어울려? 이것도 한 번 입어 봐."
차라리 날 죽이라고 할까? 혹시 신종 괴롭힘인가?
난 언니에게 옷을 받아 들고는 안으로 들아가 이젠 기계처럼 옷을 갈아입었다.
여자 옷 갈아입는 게 익숙하지 않았는데 오늘 하루 동안에 갈아입은 옷이 벌써 몇 십 벌은 돼서 굉장히 능숙해졌다.
"하..."
난 한숨을 내쉬며 거의 무아지경으로 옷을 빠르게 갈아입고는 밖으로 나왔다. 내가 점점 갈아입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걸 언니도 알아차렸는지 신나게 웃으며 말한다.
"이제 금방 갈아입네? 이것도 너무 잘 어울리네. 너무 예쁘다. 우리 동생. 뭘 입어도 진짜 예쁘네."
언니는 내 옷매무새를 잡아주면서 나를 이리저리 돌려봤는데 마치 인형에 옷을 갈아입히기 놀이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내가 인형이고. 언니는 그 인형을 가지고 재미있게 노는 느낌이라고 할까? 하하...
언니 말처럼 내가 입는 옷마다 점원들은 정말 진심으로 감탄하는 느낌이었고 매장을 지나가다가 내가 입은 옷을 보고 멈춰 서는 사람도 보였다.
"우리 여기 옷 좀 보고 갈래?"
"그럴까?"
언니는 나를 보며 깊이 고심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니는 이게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어때?"
"응, 나도 같은 생각이야."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난 뇌에서 생각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말했다. 한 시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너무 빨리 대답했나 싶었다.
난 살살 세연 언니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덧붙였다.
"지금까지 입었던 옷 중에서 나도 이게 가장 마음에 들어."
내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언니도 같은 생각이라며 그럴 줄 알았다고 난리였다. 언니는 쿨하게 옷을 일시불로 결제해 주셨다.
"아, 배고프다. 이제 밥이나 먹으러 갈까?"
"응. 안 그래도 나 배고팠어."
언니보다야 배가 고파도 내가 더 고팠지. 언니야 밖에서 그냥 옷을 틱틱 내게 건네주면 그만이었지만 난 그 옷을 계속 입어봐야 했다.
체력 소모가 컸던 건 나란 말이다.
"언니가 옷 사줬으니까 밥은 내가 살게."
"됐네요. 네가 돈이 어디 있다고. 언니가 사줄게."
"아니야. 내가 사줄게. 언니 돈 너무 많이 썼잖아."
"과외해서 돈 많이 벌었으니까 이 정돈 사줄 수 있어."
난 결국 언니에게 못 이겨 밥까지 얻어먹었다. 배불리 먹고 나온 우리들은 영화나 한 편 보고 돌아갈 생각으로 나섰는데 별안간 누군가 우릴 붙잡는다.
"저기, 잠시만요."
훤칠한 키에 잘생긴 남자 한 명이 우리 앞을 막고 서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무릎을 굽힌다.
손바닥을 들어 보이면서 잠깐만 숨 좀 돌리겠다는 표정을 짓기에 우린 가만히 그 남자를 쳐다봤다.
"저기서부터 뛰어왔는데 두 분이 너무 예쁘셔서요. 혹시 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우리 둘 다요?"
언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그 남자는 그게 뭐 문제가 되냐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 싫으시면 이쪽 분이라도."
그 남자는 양손바닥으로 나를 정중하게 가리키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난 당황스러워 뒷걸음질 치며 언니 뒤로 숨었다. 번호를 달라고 한 사람은 많았지만 이렇게 당당하고 당연하게 요구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어지간히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있어 보이는 것 같아 뭔가 속이 뒤틀렸다. 난 언니 뒤에 숨어있다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싫은데요."
난 그렇게 단답으로 대답하곤 언니의 손을 붙잡고 그 남자를 지나쳤다. 그 남자는 그런 내 거절 의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내 앞을 가로막는다.
"잠깐만요. 잠시만요. 정말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어떻게 안 될까요? 저 진짜 아무한테나 이러는 사람 아니에요."
"아무한테나 이러는 사람 같고요. 전 그쪽이 마음에 안 들고요. 더 강한 거절이 필요해요?"
내가 의외로 강하게 거절 의사를 표하자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거절당하는 게 무척이나 익숙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딱 봐도 꾼 이네 아닌 척하기는."
언니도 한 마디 하고는 그 남자를 흘겨보며 나를 마치 보호하듯이 끌어당겼다.
"두 분 자매세요?"
"그런데요."
그건 또 왜 묻는 거야? 아니, 내가 왜 그걸 대답했지?
대답할 가치도 없는 사람한테. 난 이마를 찌푸리며 언니에게 말했다.
"가자, 언니."
내 말에 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남자를 또 다시 지나쳤는데 이번엔 우리 앞을 다시 막지는 않고 그냥 뒤에서 우릴 불렀다.
"저기요."
나와 언니는 그 부름에 고개만 돌려 그를 쳐다봤고 그는 우리가 멈춰서자 약간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나와 언니에게 건네줘서 받았더니 명함이었다. 나와 언니는 받은 명함과 그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대학생인 것 같은데. 방학 동안에 아르바이트할 생각 있으면 연락 줘요. 그 어떤 곳보다 많이 벌 수 있을 테니까. 아, 그리고 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인터넷에 저 검색해보시면 나올 겁니다. 오해하게 해서 미안해요."
그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쿨하게 돌아섰고, 우린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로 민망해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지었다.
"작업거는 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네."
언니의 말에 난 어색한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박."
언니는 입을 틀어막으며 명함과 떠나간 남자의 뒷모습을 연신 바라보며 자신의 머리를 때리기 시작한다.
난 갑작스러운 언니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표정으로 말리며 말했다.
"왜 그래, 언니?"
남자였을 때도 영 패션에 관심이 없던 나였으니 여자가 됐다고 해서 관심이 생길 리 없었다. 명함을 받고도 장님처럼 구는 내게 언니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우리가 받은 명함의 업체. 그러니까 GOAL 어패럴은 2019년에 론칭한 의류 브랜드 중 하나인데. 1년 만에 굉장히 핫한 브랜드로 떠오른 곳이라고 했다.
"게다가 방금 그 사람이 그 GOAL 어패럴의 대표 이사였다고! 대표 이사!"
그런 사람이 우리한테 연락처를 달라고 하고 명함까지 쥐어주고 떠났다는 건 우리가 마음에 들었다는 거였는데.
그 마음에 들었다는 게 그 마음에 들었다는 말이 아니었단 얘기다.
"아."
내 짧은 감상평에 언니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했다.
"이건 그냥 아. 하고 끝낼 상황이 아니라고! 진짜 우리 엄청나게 미련한 짓을 했단 말이야! 아니지. 방금 직접 우리 보고 그랬잖아. 아르바이트할 생각 없냐고. 그렇다는 건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는 말이지?"
언니는 눈을 빛내며 날 쳐다봤다.
"저 남자가 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어."
확실히 의류 모델을 하기엔 아깝지 않은 외모에 몸매이긴 했다.
"우리 하자."
언니의 말에 난 기겁하며 말했다.
"에에? 이걸?"
"응. 언니가 컴퓨터도 사주고 방송 장비도 옷도 사주고 밥도 사줬잖아. 응? 언니랑 같이 하자. 이거. 돈도 벌고 너도 일석이조 아니야?"
돈이야... 당연히 있으면 좋은 거고... 많으면 기쁜 거고... 그건 맞지만. 너무 갑작스럽다. 언니야 저 사람이 신처럼 보이겠지만 내겐 그냥 평범한 남자 사람이다.
한국대 의류학과에 다니는 언니에겐 어떻게 보면 일생일대의 좋은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저 남자는 그 분야로 성공한 사람이니까.
"응? 응?"
언니는 더욱 보채기 시작했고 난 하는 수없이 한숨을 내쉬며 승낙했다.
"진짜지? 너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알았어. 대신 딱 한 번만 할 거야."
"아싸! 그럼 나 지금 바로 전화 건다?"
"에? 지금 바로?"
"지금 바로 거는 건 좀 없어 보이나? 그래, 맞아. 좀 없어 보이긴 해. 시간 좀 끌다가 나중에 한 번 해봐야겠다."
언니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벌써부터 그 남자와 밀당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난 또 여느 남자처럼 번호 따려고 오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아니야. 고단수일지도 몰라. 저거.
"언니 저 사람 사칭이거나 그럴지도 모르잖아."
"에이, 설마. 검색만 하면 자기 얼굴 나오는데 설마 사칭하겠어?"
언니는 그러면서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다. 나도 궁금해 슬쩍 봤는데 확실히 아까 그 남자가 맞았다.
프로필 사진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아 언니는 더 멋있다고 꺅꺅 소리를 지르며 난리도 아니었다.
"뭐, 이상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네."
그거면 됐다는 생각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바라봤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자, 언니. 영화 보러."
내 말에 언니는 정신없이 핸드폰으로 GOAL 어패럴을 서치하고 있었다. 난 그런 언니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넘어지지 않을까 싶어 팔짱을 꼈다.
"앞에 좀 보고 가. 앞에 좀 보고. 핸드폰 안으로 아주 들어가겠네. 들어가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