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8. 스킬을 배웠습니다
"컴퓨터는 갑자기 왜? 언니 노트북 있잖아."
아아, 그래. 있기야 있지. 한 번 사용하려면 간이고 쓸개고 전부 빼줘야 하는 그런 노트북이...
"데스크탑 하나만 사주면 안 돼? 나 방송 끝나고 게임 방송해보고 싶어. 방학 기간 동안만이라도."
"게임 방송? 갑자기 웬 게임 방송?"
"그냥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안 돼?"
내 말에 세연 누나는 팔짱을 끼곤 잠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렸을 때 내가 게임을 즐겨 하던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큰 반대는 없었지만 내가 방송을 한다고 하자 조금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그냥 게임만 하면 되지 굳이 방송까지 할 필요 있어?"
아무래도 방송이라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지 세연 누나는 내가 방송을 한다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한 번 해보고 싶은데... 잘 하면 용돈 정도는 벌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 말에 세연 누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사 줄게."
이게 웬일이냐. 정말 이렇게 쉽게 사준다고? 내가 남동생이었을 땐 길가다 파는 음식 사주는 것도 아까워 했으면서?
"정말?"
"대신 조건이 있어."
그럼 그렇지. 난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쭉 내밀곤 말했다.
"조건? 그게 뭔데?"
내 물음에 세연 누나는 손가락 하나를 펴더니 말한다.
"과에서 탑 먹으면 언니가 풀 세팅으로 사줄게."
"진짜?"
"언니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많이 봤는데 이 상황에선 그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 난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말했다.
"아니!"
이건 그냥 사주겠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내 성적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누나도 내 성적을 잘 안다.
과에서 1등 하는 건 내겐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짜 사주는 거지?"
"그렇다니까."
누나의 말에 난 고개를 힘 있게 끄덕이며 밥을 더 빠르게 먹기 시작했다. 그런 날 보며 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한다.
"천천히 먹으라니까? 체한다고."
이런 익숙하지 않은 걱정을 받아 가면서도 난 허겁지겁 밥을 마시다시피 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부해야 돼!"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과 수석은 나다. 영혼을 갈아 넣어서라도 변수를 최대한 줄인다. 앞으로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공부에만 시간을 할애하겠어.
난 굳은 결심을 하며 화장실을 갔는데 화장실에 도착하니 더 굳은 결심이 필요했다.
"어... 맞다. 나 여자지."
화장실에 들어가 양변기 앞에 선 뒤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바지를 내렸다. 당연히 잡힐 리 없는 것을 잡기 위해 난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렸다.
난 조심스레 몸을 뒤로 돌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팬티를 손가락으로 붙잡고 내린 뒤 천천히 앉았다.
'그래, 큰 거 보는 거랑 똑같다고 생각하자.'
난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고 힘을 줬는데 남자와는 뭔가 좀 다른 곳에 힘이 들어간다. 몸 깊숙한 곳에서 음경을 타고 빠져나오는 느낌이 아니라 저 배 속 깊은 곳에서 모든 게 한 번에 이루어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쪼르르륵...
밀폐된 화장실 안이라 그런지 내 소변이 떨어지는 소리가 왜 이렇게 야하고 민망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가리고 익숙하지 않은 느낌을 온몸으로 맞닥뜨렸다.
"하아."
생각해 보니까 여자가 되고 처음으로 작은 걸 본 것 같다. 이건 뭐 퀘스트가 안 되는 건가? 이것도 내가 생각하기에 쉽지 않은 일인데.
난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주 미약하긴 했지만 소변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아, 닦아야 하는 건가?"
난 볼을 긁적이며 옆에 있는 휴지를 뜯었다. 남자일 땐 소변을 싸고 휴지로 닦아본 적이 없던 터라 무척이나 난감했다.
"어... 어떻게 닦는 거지?"
그냥... 톡톡 찍으면 되는 건가? 아니면 스윽? 난 휴지를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고민했다.
"하... 이게 고민할 일인가."
뭔가 현타가 왔다. 소변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 고민을 하는 나라니... 일단 양옆에 많진 않지만 조금 흘러 묻은 소변을 휴지로 닦아내고 휴지통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휴지를 뜯어 조심스레 가져갔다. 말캉한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들어온다. 톡톡? 스윽? 난 결국 둘 다 하기로 했다.
"이게 맞나?"
뭐, 어쨌든 여자가 소변을 닦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닦는지까지 알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조금 난감하긴 했지만. 뭐 어쨌든 닦기만 하면 되는 거지.
"됐어."
난 휴지통에 휴지를 넣고는 바지와 팬티를 입고는 손을 씻기 위해 세면대로 갔다. 아침부터 꽃미모를 발산하는 내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얼굴이 붓지도 않네."
피부는 어제보다 더 좋아 보였다. 무도라는 스킬을 배워서 그런 건가? 잘은 모르겠지만 무도. 그러니까 태권도, 유도, 유술, 검도 같은 걸 구사하려면 단순히 지식적인 부분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될 게 아니었다.
원래 무도란 심신일체라고 하지 않던가? 몸과 마음이 모두 단련이 되야 올바른 무도를 펼칠 수 있는 것.
그건 여자든 남자든 똑같겠지만 아무래도 여자가 상대적으로 신체적인 부분에선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웬만한 남자를 능가하는 신체를 가진 여성도 분명히 존재하긴 하지만 대부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신체적인 능력은 여자가 남자보다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무도, 즉 태권도, 유도 같은 걸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 몸은 어찌된 영문인지 스킬을 배우면 몸도 알아서 거기에 맞춰주는 것 같았다.
"확실히 남자일 때보다 체력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정신적인 부분이야 본래 나니까 잘 모르겠으나 신체적인 부분은 확실히 여자가 된 내가 더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축구나 농구 같은 걸 좋아하긴 했지만 잘하진 못해서 보는 거로 만족하고 있었는데 꽤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 몸으로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 정 아니면 스킬 쿠폰으로 배워도 되는 거지.'
음... 뭔가 좀 안 좋은 버릇이 든 것 같기도 하네. 벌써부터 모든 걸 스킬 쿠폰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생긴 것 같다.
확실히 어제 같은 경우에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라고 변명할 수 있었지만 농구나 축구 같은 건 내가 스스로 연습해봐도 되는 부분인데...
그건 또 아닌가?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흠... 이것도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공부나 하자."
여자가 된 이후에 잡다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원래 생각도 많은가? 난 피식 웃으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다른 생각은 모조리 접어두고 기말고사에만 집중하자.
난 의지를 불태우며 눈에 불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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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기간 동안 집 아니면 도서관을 오가며 정말 공부에만 집중했다. 설렁설렁 해도 워낙 타고난 머리가 있었기 때문에 1등할 자신은 있었지만 어쨌든 변수를 줄이는 게 좋았으니까.
그 덕분에 난 만족할 만큼의 성과를 얻었다. 시험을 보고 나온 나는 후련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데 시험 자체가 너무 쉬웠기 때문이다.
"시험 잘 봤어?"
근사한 목소리로 누군가 내게 묻기에 고개를 돌렸더니 정후가 보였다. 시험기간 동안 여자로 살면서 난 꽤나 적응한 상태였다.
일단 누나를 언니라고 제법 잘 불렀고 내가 여자가 됐다는 걸 확실하게 인지한 상태였다. 주변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 그리고 주변 관계가 조금씩 달라졌다는 점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나, 정후가 나한테 저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얘기하는 거나 듬뿍 애교가 담긴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네는 수정이도 이젠 적응이 됐다.
"응, 잘 봤어. 내 표정 보면 모르겠냐?"
내가 정후에게 유일하게 이기는 게 한 가지 있다면 공부가 아닐까? 고등학교 때도 그렇고 난 늘 1등이었고 정후는 2등, 조금 떨어질 땐 5등이었다.
내 자신만만한 말투에 정후는 작게 웃더니 말한다.
"그럼 이번 기말고사의 과 수석도 너겠네?"
"에이, 두말하면 입 아프지."
난 손을 휘휘 저으며 조금 재수 없는 표정을 지어봤다. 정후는 그런 날 보며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짓기에 미소를 지어줬다.
일단 이렇게 되면 컴퓨터는 따놓은 당상이고. 게임BJ를 하기 위한 첫 발을 감격스럽게도 내딛는 거란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다.
언니한테 어차피 내가 1등이니까 미리 사달라고 해야겠다. 난 그렇게 혼자 행복회로를 돌리면서 정우와 함께 학교를 나섰다.
시험도 끝났고 어차피 그 이후엔 방학이었으니까 내년 봄까지는 늘어질 정도로 시간이 많았다.
'그 시간이면 충분하지.'
우리 학교의 기말고사는 16일에서 22일까지였다. 난 여자가 된 12월 2일부터 2주 동안 거의 집에서만 지냈고 가끔 도서관에서 정후와 수정이를 만나기도 했지만 공부만 했다.
관계가 좀 껄끄럽기도 했고, 시험기간이니 어차피 만나도 딱히 같이 하는 게 공부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너 방학 동안에는 뭐 할 거야?"
"벌써 다 계획이 있지. 나 방송 해보려고."
"방송?"
정후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줬다.
"응. 인터넷 방송 한 번 해보려고. 게임 방송."
내 말에 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만나 수능을 코앞에 두고도 정후랑 나는 PC방에 참 많이도 갔다.
서로 게임을 좋아하기도 했고 승부욕도 있어서 살벌했지. 서로가 서로의 플레이에 대해서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욕하고 싸우고.
난 그때 생각이 나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너랑 LOM 하면서 엄청 싸웠는데."
내 말에 정후도 그때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너 엄청 똥고집이었다는 거 기억나네."
정후의 말에 난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야. 내 말은 다 옳았어. 네가 억지를 부린 거지."
"어련하시겠어요. 그래서 님 티어가 나보다 낮았나요?"
"내가 시간이 없어서 게임을 못해서 그랬지. 내가 너보다 공부를 잘한 이유가 뭐겠어? 네가 게임에 집중할 때 공부에 집중했기 때문이 아니겠냐?"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져요."
정후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날 흘겨봤고 난 그런 정후를 보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시험을 보고 나니까 확실히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시험도 끝났는데 영화나 보러 갈래? 맛있는 것도 먹고."
정후의 말에 구미가 당겨 난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내가 수정이한테 전화할게."
난 핸드폰을 꺼내 곧바로 수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나야아~]
전화를 받자마자 투정 섞인 말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수정이의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시험 잘 봤어? 난 지금 다 끝났는데."
[나도 다 끝났어. 나 진짜 망했어. 너무 어려워.]
"엄살은. 너 중간고사 때도 그렇게 말하더니 성적 잘 받았잖아."
[그때랑 지금이랑은 달라. 나 정말 망했어어어.]
"그럼 기분 전환이나 하러 가자. 정후가 영화나 보러 가잔다."
[영화? 오! 좋지, 영화. 지금 어딘데?]
수정이의 말에 정후가 내 수화기에 가까이 다가와 말한다.
"정문 주차장으로 나와."
"차 가져왔어?"
내 물음에 정후가 고개를 끄덕인다.
[올, 이정후. 기특하게 차도 가져오고 언니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라. 세나야 좀 이따 봐!]
"그래."
난 전화를 끊고는 정후와 함께 정문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평소에는 차가 아닌 대중교통으로 등교를 하는데 오늘은 시험이 끝나는 날이라고 놀러 가기 위해 가져온 모양이었다.
"드라이브도 시켜주는 거야?"
내 물음에 정후가 피식 웃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뭐, 그것까지 바라시면 그것까지 해드리고요."
정후의 말에 난 흡족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곤 사극톤으로 말했다.
"좋구나. 그럼 그리 행하라."
내 어설픈 사극톤 연기에 정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한다.
"너 다른 건 다 해도 연기는 하지 말아라."
난 정후의 말에 손을 들어 보이곤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아, 걱정 마. 나도 그럴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