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5. 정신을 잃었더니 여자가 됐습니다
"저기..."
"죄송합니다."
난 능숙하게 손을 들어 보이며 명백한 거부 의사를 전했다. 이번이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학교에 가는 길이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그 사이에 큰 길에서 몇 번이고 남자들의 대시를 받았다.
숨도 쉬지 않고 겨울 같은 표정으로 거절하자 내게 조심스레 핸드폰을 내밀었던 그 남자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몸을 잔뜩 말며 돌아간다.
아무리 여자가 됐어도 남자의 관심을 받는 게 좋을 리 만무하다. 몸은 여자가 됐지만 내 정신은 여전히 남자인 그대로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럼... 난 레즈비언이 되는 건가?'
그렇네, 레즈비언이라는 게 여성 동성애자를 말하는 것이고 당연히 나는 남자보다 여자가 좋다. 그건 내가 여자여서가 아니라 남자이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 여자가 된 사람이 여자를 좋아하는 건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 같은 경우엔 예외가 아닐까? 난 어디까지나 남자였으니까 당연히 여자가 좋은 게 순리에 맞는 일이지 않은가?
'혼란스럽다. 혼란스러워.'
난 머리를 휙휙 저으며 학교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도무지 몇 걸음 걷지를 못하고 계속 붙잡히는 통에 이미 도착했어야 할 거리를 아직도 걷고 있다.
-9도에 달하는 한파라 거리가 제법 한산한 상태인데도 그랬다.
'이거 개강하면 엄청 피곤할 것 같은데.'
사실 나였어도 이런 여자가 같은 대학교 같은 학과에 다니고 있다면 절대로 가만히 놔둘 것 같지 않았다.
음, 아니... 난 소심해서 가만히 뒀으려나? 하여간에 개강하지도 않은 미래까지 걱정해 가며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난 곧바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국내에서 가장 넓은 대학교인 한국대학교 안에는 학생들이 언제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그 어느 대학보다 신경을 많이 썼다.
"아, 자리 있다."
덕분에 너무 일찍 서둘러 나오지 않아도 공부할 수 있는 자리를 찾기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시험 기간이라고 하지만 모든 학생이 다 학교에 나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백색소음이 주변을 가득 채운다.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확실히 공부는 분위기와 환경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일단은... 확인부터 하자.'
일단 공부보다 우선적으로 확인할 사항이 있어서 난 카페에서 커피를 사들고 휴게실로 향했다. 빈자리에 적당히 앉아서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핸드폰을 꺼냈다.
여자가 되고 퀘스트를 깨서 받은 스킬 쿠폰이 총 세 개였다. S급, A급, B급 각각 한 개씩. 그러니까 난 세 가지의 스킬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걸 사용하면 정말로 게임처럼 능력을 얻는 건지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다. 만약에 이게 정말 말도 안 되지만 가능하다면 내 인생은 남자였을 때와는 정말 180도 달라진 삶을 살 수도 있었다.
"정말 많네."
다시 한번 봤지만 정말 무수히 많은 스킬들이 존재했다. 특히나 S급 쿠폰의 능력은 정말 말도 안 되게 범위가 넓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와... 이건 뭐야?"
한국대학교 법대에 다니고 있는 내게 제일 구미가 당기는 건 역시나 학과에 관련된 지식이었다.
법(S)
S급 법 관련 능력을 얻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법률적 지식을 얻습니다.
하하... 존재하는 모든 법률적 지식이라니... 그럼 뭐 우루남무 법전부터 헌법까지를 총칭하는 건가? 와...
그럼 공부할 필요가 없겠는데?
난 잔뜩 구미가 당겨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역시나 등급이 내려갈수록 그 범위가 점점 좁아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D급만 배워도 졸업까지 문제없겠는데?'
세계의 법체계는 독일과 프랑스의 대륙법체계와 영국, 미국의 영미법체계로 갈린다.
일본은 대륙법체계를 받아들였고 그것을 우리나라가 다시 받아들였는데 고로 D급만 배우면 대륙법과 영미법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질 수 있었다.
"아, 이 D급의 수준을 모르겠네."
D급이 어중간한 수준이면 차라리 C급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C급을 배우면 대륙법과 영미법에 대한 판례에 대한 지식까지도 추가되는 것 같았는데 S급처럼 모든 법률적 지식을 알고 있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내가 뭐 교수가 될 것도 아니고. 물론, 지식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야 하겠지만...
하여간 이건 D급이나 조금 더해서 C급이면 충분하단 생각이 들었다. 판례가 중요하긴 하니까. 그럼 C급을 배워?
그럼 영미법에 대륙법에 대한 지식이랑 판례에 대한 지식까지 얻을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일단 이거를 C급으로 배우자."
D급과 F급에 대한 스킬 쿠폰도 난 고심해서 미리 뽑아 놓고는 손에 쥔 쿠폰에 대한 사용처를 찾기 시작했다.
너무 많아서 공부하러 온 게 아니라 이걸 고르기 위해 도서관에 온 것 같았다.
어차피 도서관에 자리가 많이 있었으니 자신이 자리 하나 차지한다고 해서 큰 민폐는 아닐 것 같아 느긋하게 핸드폰을 쳐다봤다.
"음... 일단 가장 중요한 S급."
모르긴 몰라도 이 S급 하나로도 내 인생이 정말 바뀔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내가 뭘 배우냐에 따라서 사실 정말 지금의 생활이 180도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뭘 골라야 하나..."
선택 장애가 왔다. 몇 가지 마음에 드는 게 있었는데 아무리 추리고 추려도 열 손가락이 넘어간다.
"아, 좋은 게 너무 많네..."
가지고 싶은 스킬들이 너무 즐비해서 문제였다. 이거 오늘 안에 고를 수 있을지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쿠폰은 한정적인데 가지고 싶은 능력은 많으니 골이 아프다.
"윤세나?"
이렇게 스킬 하나 고르는 걸 망설이는 이유가 필요한 포인트 차이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퀘스트를 깨면 지금은 스킬 쿠폰을 지급하지만 분명히 나중에는 포인트를 지급할 것이다.
F등급인 100P를 모으는 게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퀘스트 하나를 깨서 주는 포인트가 1P면 100번의 퀘스트를 수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세나야."
그렇진 않겠지? 여자로 만들어 놓고 그렇게 야박하게 포인트를 지급할 것 같지는 않긴 했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스킬을 고르는 게 신중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내가 살면서 S, A 스킬 쿠폰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너무 비관적인가?
"윤세나!"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기에 난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잔뜩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서글서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자 한 명이 보였다.
"이정후?"
"무슨 생각을 그렇기 깊게 해?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정후의 물음에 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아니. 그런 거 없어."
너무 어색하다. 정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 돼서 친해진 친구였는데 성격도 비슷하고 좋아하는 분야도 비슷해서 금세 친해졌다.
고등학교 때 한국대 법대라는 목표도 같았고. 나와는 다르게 근사한 정후를 난 조금 부럽게 여기기도 했다.
흔히 말하는 로열 패밀리가의 장남이 정후였으니까.
"공부하러 온 거야?"
정후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짧은 단답 때문일까? 대화가 끊겼다. 정후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컵에 담긴 커피를 보더니 나를 걱정스레 쳐다보며 의자를 끌어당겨 내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너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니라니까."
난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 깨고자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커피를 들어 입가에 가져왔다.
꽤 오랫동안 핸드폰을 보고 있어서 그런지 커피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겨울이라 문을 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카페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세나야!"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미성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간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난 손을 들곤 열심히 흔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 그녀에게서 나왔지만 느낌은 확연히 달랐다.
남자였을 때 나를 불렀던 때보다 훨씬 더 부드럽다고 해야 할까? 수정이는 대학생 느낌이 물씬 나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브라운 색감의 롱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약간의 잔 체크 무늬가 있고 종아리 반보다 아래에 오는 기장이었다.
상의는 화사한 하얀색의 리본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고 그 위로는 오트밀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상당히 잘 어울렸다.
"역시 이 공부 벌레들 학교 올 줄 알았다니까."
수정이는 나와 정후를 번갈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를 짓더니 자리에 앉는다.
"야, 커피 좀 사 와."
수정이는 정후에게 카운터를 향해 턱짓을 하며 말했고 정후는 그런 수정이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을 짓는다.
"커피를 저한테 맡겨 놓으셨어요?"
"쓰읍. 이게 누나가 사 오라고 하면 바로 사 올 것이지 어디서 토를 달아, 토를!"
수정이가 입술을 깨물며 엄한 표정으로 정후를 나무랐는데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왜 이렇게 귀여워.'
난 수정이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수정이는 팔짱을 끼곤 도도한 표정으로 정후를 보며 주문했다.
"아메리카도 따듯한 거 하나. 어? 세나야. 뭐라고? 치즈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알았어, 내가 정후한테 얘기할 게. 야! 치즈 케이크도 하나만 사 와."
정후는 이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날 쳐다보더니 말한다.
"뭐 먹을래?"
"돈도 많은 놈이 뭐 그런 걸 물어봐. 얼른 사 와."
수정이의 재촉에 한숨을 내쉬며 정후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고 난 그런 정후를 불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사실 저 역할은 정후가 아니라 나였는데 내가 여자가 된 이후에 내 포지션을 정후가 맡은 것 같았다.
'되게 서슴없이 대하네.'
뭔가 이상했다. 정후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가 됐고 수정이는 그보다 더 오래전에 친구가 됐다.
그래서 수정이는 나를 굉장히 서슴없이 대했고, 나로 인해 알게 된 정후에겐 조금 거리를 뒀었다. 아무래도 조금 정후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우리와는 조금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정후는 투덜거리긴 했지만 아메리카노와 치즈 케이크를 사서 우리에게 건네줬다. 난 그런 정후를 보며 미소를 짓곤 말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고맙긴."
정후는 그렇게 말하며 수정이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나 수정이는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면서 치즈 케이크를 포크로 푹 찍어 입안으로 가져갔다.
"나한테 할 말 없냐?"
정후의 말에 수정이는 오물오물 예쁘게 케이크를 먹으면서 말했다.
"있어. 뭘 꼬라 봐?"
수정이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는 정후의 모습에 난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런 대접을 받을 친구가 아닌데. 하하...
아마 집에서는 도련님 대접받으면서 호화롭게 살고 있을 텐데. 수정이에게 박대를 당하는 게 영 익숙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내가 여자가 되고 관계도 조금씩 변화가 있는 것 같았다. 확실히 지금 생각해 보니까 세연 누나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남자였을 때와는 달리 조금 부드러웠던 것 같다.
'확실히 그렇네.'
이건 좀 이득인 것 같은데? 그럼 다른 누나들도 나를 좀 부드럽게 대하려나? 아주 못 잡아먹어서 안달들인데 내가 여자가 됐으니 좀 예뻐해 주려나?
"됐다. 말을 말 자."
정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맛을 다신다.
"넌 안 먹어? 왜 아무것도 안 사 왔어?"
"아, 별로 안 당기네."
정후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고 수정이는 내 옆에서 치즈 케이크가 맛있으니 얼른 먹어보라며 재촉해댔다.
포크를 내 입가로 들이밀어 난 별수 없이 받아먹었다.
수정이는 어떠냐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대답을 요구했고 난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
내 대답에 수정이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에 포크를 쥐여주더니 말한다.
"얼른 먹어. 아메리카노랑 찰떡이다."
수정이가 나를 이렇게 살갑게 대하는 게 상당히 익숙하지가 않다.
"왜?"
내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수정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에 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 말에 수정이도 정후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본다.
"얘 좀 이상해."
정후의 말에 수정이도 내가 평소와 조금 다르게 느껴졌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렇네. 뭔가 좀 이상하네. 우리 세나가 오늘 왜 이럴까? 무슨 일 있어?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수정이의 말에 난 잠시 고민했다. 정후와 수정이는 날 보며 뭐든 말해 보라는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