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9 - 기억났다.
이 세상은 생명에 따른 무게와 중함이 확실하게 존재한다.
대다수의 생명은 콧바람에 날아갈 정도로 가볍다.
마을이나 작은 영지가 주기적으로 먹이가 필요한 몬스터에게 습격당했을 때.
수도에 정식으로 도움을 청하기에 애매한 몬스터이거나 드문 출현 빈도라면 운영에 대한 갈림길에 서게 되며.
대부분은 황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자체적인 해결을 선택한다.
하지만 해당 몬스터 한 마리의 제거가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군체의 뿌리를 뽑는 건 쉽지 않은 일.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이나 마을의 촌장이 해결을 위한 모험가를 고용할 돈이 없거나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 손해가 너무 크다 느끼게 되면.
대다수는 시원하게 포기하고 차후에 수도로 도움을 청할만한 사건사고의 기록을 쌓아 올린다.
그럼 주민들은 자리에 앉아 다음이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도망가봐야 신세를 면하기는커녕 지금보다 어두운 미래가 확실시되기에.
부웅!
갈고리와 같은 발톱. 독수리와 비견할법한 그림자.
묵직한 무언가가 에델만의 하늘을 자유로이 날았다.
날개를 가졌음에도 평범한 조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의 안면을 가졌다는 점.
그리고 그 얼굴을 이용해 명백하게 감정을 드러낸다.
-크힛!
여자의 머리와 몸뚱이를 가졌으나, 바람을 가르는 맹금류의 팔과 다리를 가진 반인반조.
어떤 이야기에서는 이 생물을 폭풍의 여신. 또는 신의 딸들이라 부르나.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사람을 위협하고 인육을 즐기는 잔혹한 몬스터일 뿐이다.
"꺄아아악!! 엄마아··!! 엄마!!"
하피의 발톱에 잡힌 아이가 공포에 물든 비명소리를 끝도 없이 토해냈고.
찢어지는 살점에서 눈물보다 많은 핏물을 쏟아냈다.
-케헷헷! 고기! 고기!
하피는 먹이를 성공적으로 낚아챈 게 기쁜지 노래를 부르듯 웃으며 상공을 떠돌았다.
땅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들을 놀리다가 활을 든 인간이나 마법의 낌새가 보이면 도망갈 생각.
하피란 그런 악질적인 성향을 가진 몬스터다.
"활이나 던질만한 창은 없습니까?"
"예? 그런 건 경비대나 모험가가 와야죠···."
도리안이 주위를 둘러보며 무기를 찾았으나 당연하게 허탕.
다들 저번 주에 소문으로만 들었던 광경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다.
그나마 일말의 양심일까.
탄식과 안타까운 목소리만은 합창처럼 내며 누군가 나서서 해결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후우···."
아무리 용인족의 피가 흐른다 해도 맨몸인 자신에게 공중에 있는 하피를 어쩌라고 불러온 건지.
날카로운 발톱에 잡혀있는 아이를 보니 앨리스의 어릴 적이 떠올라 표정이 절로 찡그려졌다.
"으아앙-!! 엄마아···!! 아파아아···!"
안으로 말린 하피의 발톱에 꿰뚫린 아이의 어깻죽지에서 붉은 액체가 주르륵 쏟아져 바닥을 적셨다.
"···."
공중에 떠서 무능한 주민들을 놀려먹는 하피를 보고 도리안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꼈다.
'앨리스가 왔어야 했어···.'
찾아온 인간이 무슨 일인지 제대로 언질이라도 줬다면 마법사인 앨리스와 동행해서 왔을 것을.
당장 저번 주에도 같은 사건이 있었다.
에델만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 그걸로 끝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을 깨트리고 이번으로 두 번째였다.
"어이구! 저거 어째!"
주민들의 탄식을 들은 도리안은.
일단 무슨 행동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주위에 있는 주먹만 한 돌을 집어 들었다.
맞기만 하면 하피도 어쩔 방도가 없는 근력을 담아 돌을 던지려 하자.
-키헥! 멍··청이 들!
하피는 어색한 발음으로 말을 뱉더니 잡고 있는 아이를 흔들어 방패로 사용할 분위기를 풍겨왔다.
"젠장···! 길드에 우리 딸아이 좀 불러와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리를 비우지 못하는 도리안이 사람들에게 부탁을 한 뒤 하늘을 주시했다.
지금 불러도 경비대가 먼저 오겠지, 앨리스가 알맞은 때에 올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말 그대로 일개 몬스터에게 능욕을 당하는 상황.
어쩌지도 못하고 용인의 날카로운 어금니만 아득바득 갈고 있는 순간에.
-투확!
"···!"
미상의 물체가 벼락처럼 날아와 하피의 머리를 박살 냈고.
도리안은 발을 잽싸게 움직여, 머리를 잃은 하피와 엉켜 떨어지는 아이를 최대한 부드럽게 받아냈다.
*****
-꺄아아악!!
닫힌 창문 너머로 들려온 비명소리는 거리가 상당했고 사사로운 잡음 사이에 묻혀 있었다.
유리라는 장애물을 넘어온 소리는 내 귀에만 가늘게 잡혔는지.
리케는 나갈 채비를 하느라 콧노래를 부르며 거울을 보고 있었다.
"···."
창밖에 보이는 상황.
날아다니는 하피가 어린애를 잡고 빙글빙글 돌아다니든 말든 눈으로 봤을 때 아무 생각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살아오며 자주 봤던 광경에 그러려니 할 뿐.
'예전에도 몇 번 봤었지. 어디더라···?'
떠올리려 해도 이렇게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작은 영지나 마을에는 저런 불상사가 왕왕 있다.
하피만이 아니라 하수구에 사는 랫맨과 같이 위험도가 애매한 몬스터가 먹이를 찾고자 서식지를 넘어 사람이 사는 마을까지 도달하는 경우가 있다.
아예 인간을 먹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때도 많다.
한 곳에 자리를 잡고사는 주민들은 어떨지 몰라도 모험가 생활을 하면 지겹게 듣고 자주 마주하게 되는 흔한 일이다.
'하피라···.'
날아다닌다는 점을 제외하면 껄끄러운 점 하나 없는 몬스터다.
발톱은 날카로워도 움직임이 단순하고.
피부도 오러고 자시고 그냥 칼을 찌르면 버터처럼 쑥 들어간다.
그러다 보니 성인 남성이라면 하피에 잡혔을 시에 유의미한 저항을 해볼 수 있겠지만.
어린아이는? 그냥 하피에게 잡힌 순간 식량이 되는 운명이 확정된다.
'이건 곤란한데.'
하지만 리케와 나에게 무관한 것과 별개로.
아래를 보니 저런 몬스터 하나 등장했다고 식당과 잡화점 등의 몇몇 가게가 급하게 문을 닫고 있었다.
"흐음···."
이러다 리케와의 여행이 엉망이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인벤토리에 있는 스로잉 나이프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핑-
[ 불스아이 ]
첫 번째로 투척류의 적중률을 올리기 위한 스킬을 가동하고.
철컥!
리케가 잠깐 뒤를 돈 사이 창문을 열어 단검을 내던졌다.
"응? 오빠 갑갑해?"
준비를 하다 창문 소리에 고개를 돌린 리케를 보며 나는 입가를 올렸다.
"그냥 날파리가 있길래. 준비는 끝났어?"
"히··· 어때? 이뻐?"
나와 같은 색의 셔츠를 입은 리케를 보고 있으면 엄지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최고로 아름다우십니다."
진심이 가득한 말에 수줍은 미소를 지은 리케는 내 품에 안겨 애교를 잔뜩 부리고는 만족했는지.
그제야 밖으로 나가자는 말을 꺼냈다.
··
··
한 시간만 하자는 리케의 말에 당연하지만 한 시간만 즐기고 나온 게 아니었다.
그래도 해가 떠있으니 생각보다 시간은 늦지 않았다.
점심시간은 아니지만 억지를 부리자면 조금 늦은 점심 정도?
"오빠랑 운동했더니 배고파졌어."
아까까지 배부르다 하더니, 새침한 목소리로 허기를 토로하는 리케의 볼을 만져줬다.
"뭔가 먹고 싶은 건?"
"음~ 이 지역만 있는 음식이나 소스?"
"없지는 않을 거야. 일단 찾아볼까."
요리의 견문을 넓히고자 눈을 빛내는 리케를 위해.
손을 잡은 채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흘리는 가게를 찾아 나섰다.
"···."
아까의 사건 때문인지 처음 왔던 때보다 한적해진 거리를 걷고 있으니.
명백하게 이쪽으로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리케를 음욕적으로 보는 끈적한 시선이 아니라 무언가 결이 다른 호의적인 눈길.
'용인···?'
그쪽을 보니 상대의 꼴이 정상은 아니었다.
상처는 아니지만 옷에 피를 잔뜩 묻히고 있었으니.
'저 정도면 흔하지 않은데.'
순혈은 아닐지라도. 일상생활에서 티가 나지 않는 앨리스보다 피가 훨씬 진해 보인다.
저렇게 감출 수 없는 형태를 간직한 용인을 보는 건··· 대략 삼 년만 아닌가 싶다.
탁. 탁. 탁.
무언가 확신한 얼굴로 이쪽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뭘 하려나 싶어 리케를 뒤에 두고 보고 있으니.
라크와 비슷한 덩치를 가진 거대한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뜬금없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뭡니까? 갑자기."
'누구지?'
앞에 와서 고개를 숙이는 남자는 정말 처음 보는 게 확실한 인물이었다.
로만이 의구심을 담아 묻자.
제대로 된 설명이 없다는 걸 깨달은 도리안이 고개를 숙인 채로 땅을 보고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용인의 피를 이어받은지라. 미천한 본능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피를 잡아주신 분이 아닐까 하고···."
"굳이 부정할 말은 아닌데. 딱히 선의를 가지고 한 것도 아닙니다."
에델만에 뿌리를 내린 도리안이 봤을 때 이 두 사람은 확실하게 외지에서 온 인물.
옆에 있는 여성은 흘깃 보기만 해도 귀족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바로 옆의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는···.
"아빠! 불러놓고 왜 여기 있어!"
"앨리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도리안의 상체가 들렸다.
아까 딸을 불러달라 길드에 사람을 보냈던 게 하필 이 타이밍.
알맞은 때에 오지 못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상대를 봤을 때 그리 좋은 시기는 아니었다.
앨리스를 돌려보내야 할까.
아니면 귀족의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게 인사를 시켜야 하나.
딸을 둔 아비의 머리가 미친 듯이 회전했다.
"몬스터는? 어···! 어어?!"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길드에서 나와 도리안을 찾아온 앨리스는.
자신의 가족과 함께 있는 강렬한 기운의 남성과 그 옆의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발걸음을 그대로 멈췄고.
-쉬익! 식!
앨리스만이 아니라 테로도 앞을 보고 놀라서는 새싹과 꼬리를 바짝 세웠다.
'에델만··· 그랬지···.'
뜬금없이 자리에 나타난 모험가 소녀와 그 위에 있는 도마뱀 형상의 정령.
그 둘을 보고 로만은 떠올렸다.
'에델만'이라는 이름을 누구한테 들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