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2 - 소녀의 한발 내딛기
"보통 마법사는 지팡이와 오브. 흑마법사들은 제물함을 사용하죠? 하지만 그건 기사로 비유했을 때 검이라 보긴 힘들어요."
"그럼?"
"칼은 여기."
릴리네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상상과 의지 혹은 뇌와 생각, 그것들이 마법사들의 진짜 무구라는 뜻이겠지.
거기서 마법의 '마'도 모르는 자의 궁금증이 이어진다.
"그럼 지팡이 같은 거추장스러운 걸 들고 다니는 이유는 단순히 마나의 증강 같은 게 목적이야?"
"아티팩트의 효과를 필요로 하는 것도 맞지만··· 으음··· 지팡이는 마나의 결정체가 나가는 입구이자 마법의 출력 공정이 편해지는 장치라 하면 이해가 되실까요?"
"아아-! 거기 까지는 이해했어."
그녀는 자신의 지팡이에 달린 보석을 톡톡 두들겼다.
"정말 간단하게 풀어보면 머릿속이 화살이라면 지팡이나 오브는 활이죠. 무조건 이곳을 통할 필요는 없지만 들고만 있어도 큰 도움이 된답니다."
이해하기 쉬운 비유적인 설명을 끝내고.
그녀는 입을 열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앨리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에 따라 내 시선도 조용히 앉아 있는 소녀에게 향했다.
"앨리스는 저와 달리 맨손으로 마법을 사용하잖아요? 저건 활 없이 화살을 손으로 잡고 던져서 적을 맞추는 정도의 예술이에요."
"대단한 거네?"
"그렇죠. 하늘에서 내리 꽂히는 마법인데 규모까지 큰 마법을 저런 식으로 사용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랍니다."
일자로 쏘아내서 맞추는 것보다 하늘에서 떨어뜨려서 상대에게 적중시키는 것.
당연하지만 그런 부류의 마법은 난이도 면에서 몇 단계는 우위에 있다고 한다.
재능이든 노력이든 아무튼 대단한 거라고.
예고도 없이 로만의 앞에서 추켜세워진 앨리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 정도는··· 연습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연습으로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실행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지."
소녀는 부담스러움에 저리 쉽게 말하지만 인생을 조금 더 길게 살아온 둘의 생각은 달랐다.
로만의 말에 동감하는 릴리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웃음을 짓더니 바통을 넘겼다.
"앨리스는? 어떻게 생각해?"
뿔과 팔의 비늘이 완전히 사라진 앨리스는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며 머리에서 문장을 정리했다.
"로만님. 언니의 말대로 제가 마법을 사용하면서 지면에 주먹을 내려치는 건 주문의 끝을 맺는 하나의 신호이지. 손으로 조준하고 떨어뜨리는 건 아니에요."
내가 뱉은 말 중 마법사 둘이 태클을 건 부분은 '손으로 마법을 쏜다'는 말.
애초에 깊은 뜻을 가지고 생각해 본 적 없는 행위였으나 마법사들 사이에는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라 한다.
'확실히···.'
돌이켜보면 확실히 그렇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손으로 진을 만들고 행하지만 무조건 손바닥을 통해서 쏘아내는 건 아니다.
안개둥지에서 만난 흑마법사 모건만 해도 손가락을 까딱이는 정도로 시체와 핏물에 의지를 부여하여 진을 그려내고 독자적인 마법을 구현하지 않았나.
'조금만 사고가 부드러워도 생각은 해볼 법했는데···.'
나는 극심한 체험주의자라 눈으로 봐온 것들을 먼저 떠올리기에.
사고는 딱딱한 냉동육이나 다름없다. 생각의 방향성에 와인에 재워둔 고기 같은 부드러움이 부족하다.
보라.
아직도 일부다처제의 존재만으로 특별한 자극을 느끼는 내 상식과 가치관은.
두 번의 인생을 살아도 바뀌지 않을 만큼 꿋꿋하다.
그렇기에 내가 찾는 정답은 항상 그랬다.
애초에 나에게 없던 것이 아니라 내가 찾지 못하는 행색.
심도 있는 고찰 없이 그러려니 지나갔던 시간 사이에 해답은 몸을 웅크린 채 숨어있다.
서랍장의 바로 한 칸 위, 어쩌면 발아래, 혹은 등잔 밑, 대화의 한마디 전.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찾을 수 있음에도 그걸 타파할 유연한 사고를 갖추기란 정말 어렵다.
"로만님. 조금은 도움이 되셨나요?"
별빛이 비치는 게 아닌가 싶은 번쩍이는 눈동자로 대답을 기다리는 앨리스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이건 큰 도움이 됐는데? 머리가 좀 뚫렸어."
"!"
앨리스는 불세출의 모험가가 전하는 진심에.
정말 도움이 된 것 같아 자리에서 방방 뛰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잠시 후.
모닥불 앞에서 주름진 티를 털어 정리한 뒤, 머리의 물기도 가볍게 털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갈까."
"어?! 벌써요?"
"지금 깨달은 점들도 소화하기 벅차. 이러다 수다에 불붙으면 해 뜰 때까지 못 일어난다?"
"로만 씨. 이론이 머리 아프다고 도망치시는 건 아니죠?"
드물게도 날아온 릴리네의 농담에 킥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럴 리가! 이건 선택과 집중이지."
사락- 사락-
풀떼기를 밀어내며 돌아가는 길.
발걸음을 재촉하며 다시 떠올려 본다.
-기본이 충족되면 오행(五行)까지 이어서 터득하거라. 단련에 단련을 거듭하면 보이지 않는 심검(心劍). 그것을 넘어서면 언젠가 심즉살(心卽殺)도 가능할 거다.
문장의 토씨하나 변하지 않았음에도.
이 시간을 가지기 전에 떠올려 본 것과 느낌은 같나?
아니.
'완전히 달라.'
무신이 언급한 경우의 수는 오행과 심검만이 아닌 심즉살도 존재한다.
보는 것만으로 살기만으로.
상대를 죽이고 싶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것을 이루고 행하는 괴랄한 무언가.
무신은 이 스킬이 극의에 이르면 그것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부했으니.
그것은 분명 손동작으로 행하는 멋 떨어지는 행색은 아닐 거다.
결론만 보았을 때- 심(心) 스킬을 훈련하거나 사용하는 순간.
무조건 손에 마나를 모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스킬의 발동은 시선이 될 수도 있고, 손이든 발이든 머리든 칼이든 사슬이든 상관이 없겠지.
단순히 손으로 시작해 끝을 보려 했던 행동은 게임과 그 스킬에 대한 내 고정관념이자.
새로운 스킬을 얻고 특별한 설명이 없을 때는 이래야 한다며 이어가는 내 습관이고 버릇.
다른 말로 틀에 박힌 이미지다.
'무형, 버릇, 습관···.'
무신이 나한테 던져준 것들에 대한 실마리를 한 줄 잡은 느낌이다.
*****
나갈 때와 동일한 경비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어 걸음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그대로 쭉 가서 갈래길에서 흩어지면 된다.
둘은 모험가 길드로 가든 집으로 일단 돌아가든 편한 대로 하겠지.
듬성듬성 불이 들어온 몇몇 가게는 야행성 인간이 주력 고객인 가게들.
좁은 골목으로 빠지는 길이 덕지덕지 붙어 있으나, 쭉 이어지는 대로만이 사용처로 여겨지는 길을 걸었다.
"다음 의뢰는 언제 나가려고?"
"글쎄요··· 후보가 몇 개 있긴 한데 다 같이 이야기를 조금 해봐야 할 것 같아요."
"흐음~ 일단 내일 점심쯤 완료도장 찍으러 길드로 갈게."
마법과 전혀 관련 없는 시시껄렁한 잡담은 흩어지면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의외의 인물을 마주하며 마침표를 찍었다.
"어?"
"앗!"
기본이 되어 있는 모험가들이 모였을 때 철칙.
파티 내부에서 연애질 하지 마라.
릴리네 같이 좋은 여자가 있음에도 라크의 파티가 갈등 없이 굴러갈 수 있는 이유?
라크와 챔버스의 취향이 아주 확고하고 확실하기 때문이다.
"""···."""
총 다섯이나 되는 인물이 짜기라도 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마주친 장소와 타이밍부터 모든 게 문제였다.
'저 여자 대장간 딸내미 아닌가···?'
여관에서 라크와 팔짱을 끼고 나온 곰 같이 동글동글한 여성은.
적게 잡아도 일 년 만에 보는 듯한데 인상이 강렬해 한번 보면 잊기 힘든 인물이었다.
모루 위에 망치를 휘두르며 단련한 팔뚝이 대단한, 전체적으로 두툼한 느낌의 여성.
강인한 겉모습과 달리 성격이나 행동은 시원시원하고 때에 따라 능글맞아 가격 흥정이나 건수를 따내는 것도 잘하는 편이라.
그 꽉 막힌 노인이 나자빠지면 2대로 대장간을 이어 가게를 확장하기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다.
라크와 연결된 팔짱을 푼 그녀가 서글서글한 웃음을 보이며 먼저 고개를 숙였다.
"로만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릴리네님과 처음 뵙는 분에게도 인사 올립니다."
"···이렇게 뵙네요."
"아, 안녕하세요. 모험가 앨리스입니다."
릴리네는 난감한 상황에 일단 웃음을 보이며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받았고.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초면인 앨리스는 분위기를 보다 일단 고개를 숙였다.
"미천하지만 수도에서 붉은 모루라는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는 브루나라고 합니다."
안면이 없는 앨리스에게 소개와 가게의 홍보까지 마친 브루나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아 평소와 달리 입을 꾹 닫고 있는 라크를 팔꿈치로 툭툭 찔렀다.
"흠흠! 로만! 의뢰는 다 끝난 건가?"
주제를 돌리려는 라크의 겸연쩍은 어투를 무시하고 브루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장간은 잘 되고 있지?"
"물론입니다! 아버지는 허리가 안 좋으셔서 몇 주 전부터 제가 필두로 운영하고 있으니. 한 번 놀러 오시면 최대한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음··· 그래! 아무튼 보기 좋네. 둘이 참 잘 어울려."
"백금의 모험가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브루나와 라크를 번갈아 보던 로만은.
어딘가 께름칙한 표정을 보이고 있는 라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엄지를 척! 올리고 스쳐 지나갔다.
··
··
끼익-
까맣게 물든 적적한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온 앨리스는.
테로를 침대 옆에 놓인 화분에 풀어주고 흙이 촉촉하도록 물을 뿌려주었다.
-시이익!
신이 나서 흙더미 위를 뒹구는 테로를 두고 앨리스는 장비를 풀어냈다.
가벼워진 몸을 씻어내고 이불 위에 누운 소녀는 천장을 보며 한밤중에 있었던 일을 돌아봤다.
전력을 다 한 마법이 어떤 효과도 보지 못하고 박살이 났을 때.
무력감을 느끼기보다는 초월적인 인물을 마주했다는 흥분과 쾌감이 있었다.
거기에 의도치 않게 일면식이 있는 모험가의 사생활까지 마주했으니 어이가 없고 웃기기만 한 모험가들의 해프닝이 분명한데.
어딘가 간질간질하니 몸을 비틀게 된다.
"으으음···!"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발을 동동거리며 소녀는 애꿎은 침대를 두들겨 상념을 지워낸다.
-시익?
소리를 듣고 침대에 올라와 자신의 상태를 보는 테로를 만져주며 앨리스는 이불을 덮었다.
'···내일 점심때 오신다고 하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