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0 - 백금 하나 금 둘 -1-
떨떠름함도 잠시.
앨리스는 세리아와 이야기하며 어째서 릴리네가 자신을 보고 세리아를 연상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외형적인 요건도 있겠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이 맞다?
대화나 제스처의 흐름이 맞다?
굳이 지금 느끼는 걸 설명하자면 그런 감각.
앨리스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다가오는 세리아가 부담스럽다기보다 귀엽게 느껴졌다.
'이러니 걱정은 해도 못 말리지···.'
릴리네가 두루뭉술하게 언급했던 걱정의 형태를 선명하게 이해하면서도.
이유는 모르지만 세리아가 진심으로 모험가를 하고 싶어 하는 간절한 감정도 알 수 있다.
저걸 어떻게 못하게 막는단 말인가.
가족이 아닌 외부인이 봐도 열의가 보통이 아니었다.
"엘렉트라 영애님."
"저한테 말 편하게 해요! 언니는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최근 진짜 대단한 사람을 보고 난 뒤라.
저런 말을 들으면 부끄러워 얼굴에 열이 확 오른다.
"대단한 사람은 전혀 아닌데··· 으음··!"
그래도 이건 별개.
엘렉트라라 하면 귀족이라 해도 수도에서 먹히는 푸른 핏줄이 아닌, 외지의 남작이자 영세한 귀족이니.
금 등급인 앨리스는 편하게 대해 달라는 세리아의 말을 받아들였고.
세리아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한 살 연상인 앨리스에게 언니라 부르며 사교성을 과시했다.
"앨리스 언니는 모험가 생활은 얼마나 했어요?"
"나는··· 조금 애매하네. 용돈벌이로 에델만에서 동 등급으로 제법 길게 유지한 기간이 있어서. 승급을 생각하고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됐어."
"와! 모험가 생활은 즐거워요?"
그 질문을 받은 앨리스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릴리네를 향했다.
모험가를 꿈꾸는 말괄량이 귀족 영애에게 겁을 줘서 기대감을 죽여야 할까.
아니면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아, 모험가 생활은 나름 즐겁게 하고 있다며 부채질을 해도 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내리고 기빠진 웃음을 보이는 릴리네를 보고 앨리스는 입을 천천히 열었다.
"뭐어- 그냥 그렇지?"
슬슬 앨리스가 릴리네의 입장을 생각해야 하는 질문이 이어지자.
보다 못한 릴리네의 긴급 호출이 떨어졌다.
"세리아. 식사 준비 좀 도와줄래?"
"네에~! 언니는 손님이니 쉬고 있어요!"
군말 없이 옆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소녀가 붉은 머리를 흔들며 부엌으로 향한다.
'휴우···.'
앨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엘렉트라 자매의 뒷모습을 보았다.
여러모로 신기한 소녀였다.
단순히 말괄량이 여식이라 하기에는 대화 사이에 단어 선정이 치밀하며, 아니다 싶은 건 답이 나오기도 전에 주제를 빠르게 전환한다.
그런 모습이 감탄스러우면서도 지금은 그저.
'보기 좋다.'
저렇게 투닥거리고 사이가 돈독한 자매라면.
앨리스 자신도 위나 아래에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지루하지 않았다.
보골보골 소리를 내는 냄비 옆에 준비된 그릇을 본 세리아가 씨익 웃었다.
"오~! 이 그릇 손님용이었구나. 나는 언니가 남자친구 생기면 쓰려고 준비한 줄 알았는데."
"···세리아?"
"음식 옮길게~"
릴리네의 요리로 저녁 식사를 끝내고 어중간하게 남은 시간.
다시 한번 수다가 이어졌다.
그리고 달이 휘영청 떠올라 한밤중이라 느낄 법한 때에.
모험가인 둘은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세리아. 아마도··· 오늘 안에 돌아올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 문단속 잘하고 쉬고 있어."
릴리네가 당부의 말과 함께 방구석에 놓인 롱소드를 눈짓으로 가리키자.
세리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앨리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걱정하지 마! 앨리스 언니 다음에 봐요!"
아직도 아카데미 정복차림을 벗지 못한 세리아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릴리네와 앨리스가 문을 닫고 떠나는 순간에 옷을 벗고 편해질 생각이 가득해 보였다.
"응. 다음에 만나면··· 아까 하려다 말았던 아카데미 이야기도 해줘."
"좋아요!"
앨리스는 몇 시간 수다를 떨었음에도 줄어들지 않은 세리아의 활력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손을 흔들었다.
*****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길드로 향하는 중.
치안을 지키느라 순찰을 도는 경비대와 간단히 목례를 하고 지나치며 걷는다.
"미안해. 세리아가 기운차서 상대하니 피곤하지?"
릴리네가 집에서 있었던 몇몇 그림이 떠올랐는지 겸연쩍은 웃음을 보였다.
"반대로 편하게 다가와줘서 전 즐거웠어요. 음식도 진짜 맛있어서 놀랐고요··· 전 요리 같은 생활 쪽은 수준미달이라."
"나도 원래 음식은 배만 채우면 된다 생각해서 요리는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어. 연습을 제대로 한 건 세리아가 아카데미에 온 때부터니··· 챙겨야 할 사람이 생기면 대충 하던 것도 신경을 기울이게 되는 것 같네."
"아아! 확실히!"
잡담을 이어가다 불이 들어와 있는 모험가 길드가 눈에 보이자 릴리네는 옷의 매무새를 재차 손질했다.
"아하하- 솔직히 조금 긴장되네. 앨리스는 괜찮아?"
"네! 그래도 무슨 일인지는 아직도 감이 안 오는데···."
다른 방식으로 로만을 접해온 릴리네와 앨리스는 생각의 방향이 달랐다.
앨리스의 경우는 상대가 상대인지라.
걱정보다는 은혜를 갚기 위해 열심히 하자는 생각뿐이었다.
끼익-
모험가 길드에 도착한 두 여성이 계단을 내려갈 필요도 없이 로만은 남자 접수원의 책상에 걸터앉아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앨리스가 릴리네의 집에 돌아가면서 접수원에게 미리 말해뒀기 때문인지.
로만은 길드에 찾아온 둘을 보며 놀라지 않고 가볍게 웃기만 했다.
"금 등급에 릴리네와 앨리스. 저 둘이 내 의뢰받은 거야. 끝나고 돌아오면 아까 거기서 수수료 빼고 나눠줘."
"확실하게 이해했습니다."
두 사람은 접수원과 로만의 대화를 듣고 눈을 크게 떴다.
릴리네는 오늘로 값비싼 포션을 받은 때의 빚을 갚으려 했으나.
지금까지 로만이 보여준 유별난 행적과 스타일을 알기에 말해봐야 통하지 않는다는 견적이 나와 입을 다물었고.
앨리스 또한 마찬가지 생각이었으나 그녀는 일단 목소리를 냈다.
"잠시만요··! 저, 저는 돈은 필요가··엇!"
"계약에 묶인 모험가가 그러면 쓰나. 받을 건 받아."
로만이 웃으며 앨리스의 이마를 가볍게 톡 밀자 그녀가 말을 멈췄다.
"···."
멍한 표정의 앨리스를 그대로 지나친 로만은 자연스레 길드의 바깥으로 나왔다.
미상의 목적지로 향하는 그를 따라 둘은 발을 움직였다.
"이야기를 들었으면 라크도 같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 덩치도 눈치가 좀 늘었네."
"요즘 바쁘시거든요."
"그 덩어리가 바쁘기는. 여자라도 생겼나?"
"···!"
"···진짜로?"
순간 걸음이 꼬인 릴리네가 뭐라 변명을 꺼내기도 전에 로만의 눈이 커졌다.
릴레네는 지금까지 지내오며 로만이 저렇게 놀라는 건 처음 봤다.
"어, 아니!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그래서 답을 못한 거고요··."
"허- 그냥 축하한다고 전해줘."
꺼내고 싶은 말이 많아도 영양가가 없다면 굳이 언급하지 않는 것 또한 미덕.
사소한 근황을 이어가며 셋은 수도의 성문을 나와 별빛 이외에는 이정표가 없는 숲의 근처까지 왔다.
어둠으로 물든 숲은 생명체를 삼키는 순간 살코기를 먹고 뼈다귀만 뱉어낼 것 같은 음침함이 풍겼지만 여기서 저 어둠을 겁내는 인물은 없었다.
사락- 사락-
걸을 때마다 종아리까지 자란 풀떼기들이 스쳤다.
"어디까지 가는 거예요? 길드에서 의뢰 내용이라도 알려주지···."
조용히 따라가던 릴리네는 수도의 빛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고 소심하게 목소리를 흘렸다.
"아아-!! 설명을 안 해줬구나? 의뢰를 주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기본적인 것도 빼먹고 있었어."
듣고 의뢰를 받지 않아도 문제없으니 편하게 말해달라는 꼬리를 뒤에 붙인 로만이 짧은 침음을 흘리며 턱을 긁었다.
이제 의뢰주가 내용을 꺼낼 거라는 직감에 두 쌍의 눈에 각자 기대감과 긴장이 서렸다.
"요즘 오러와 마법에 대한 차이점이나 마법사들이 마법을 쓰면서 생각하고 연상하는 것들이 궁금해졌거든."
"···네?"
"오오!"
뒤에서 로만을 따라가는 둘은 각자의 이해를 담고 감정을 표현했다.
"궁금증도 해소할 겸 마법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고 싶은데 길드 마당이나 그런 곳은 곤란하잖아. 애먼 사람이 휘말리면 난리 난다고."
이미 로만이 상정하고 눈에 담을 마법의 힘은 그녀들의 최대치를 그리고 있었다.
"마법의 사용을 옆에서 관찰하고 싶으시다는 건가요?"
"비슷해. 그냥 마법을 써주고 답변이 가능한 질문에 답이나 해줘."
로만은 앞장서서 잔가지와 나무들을 손으로 치우며 숲을 망설임 없이 파고들었다.
"여기면 적당하겠다."
그리고 도착한 장소는 잔잔한 호수가 있는 장소.
밝은 달이 수면에 비치는 이곳은 앨리스와 릴리네도 알고 있다.
이른 시간에는 낚시꾼들에게 제법 인기가 있는 강가지만 해가 떨어지면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이다.
호수를 등진 로만이 눈을 껌뻑이고 있는 릴리네와 앨리스를 향해 의뢰를 자세히 설명했다.
"둘 다 최고 출력으로 자신 있는 마법 한 번씩 보여줘. 이론도 큰 도움이 될 거고 중요하겠지만, 나는 몸으로 느껴봐야 이미지가 잡히는 인간이라. 이론을 듣기 전에 한번 체감하는 게 중요하다 생각하거든"
로만의 말에 둘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고 릴리네가 마나를 손에 모으며 로만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어디에 마법을··· 그냥 나무라도 넘어뜨릴까요? 아니면 호수에?"
릴리네의 물음에 로만은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응? 애꿎은 나무는 왜 눕혀. 나한테 써야지."
그 말에 릴리네와 앨리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