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25년차 모험가는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다-239화 (239/250)

Chapter 239 - 자매의 집

바쁘면 무리할 필요 없다는 말이 있었으나. 앨리스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무조건 돕겠다고 의지를 표명했다.

길게 걸리지도 않고 금방 끝난다 했으니 거부할 이유도 없고.

백금에게 무언가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 오지 말라 해도 가고 싶었다.

거기에.

'아주 조금씩이라 해도 빚은 갚아야 해···.'

다른 의뢰를 찾지 않고 미루고 기다리는 시간이 있으니, 혹여 릴리네가 와도 같이 도움을 주기로 마무리.

"이제 가봐야겠다. 잘 먹었어."

함께 시간을 보내던 중 시간을 확인한 로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에 뵙겠습니다!"

"어~ 나중에 보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 저녁에 다시 길드로 오겠다는 그를 보내고.

앨리스는 시선을 천천히 움직이며 생각에 잠겼다.

계약서도 없이 구두로 수락한 의뢰. 그럼에도 붕 뜨는 구간까지 생각해 주는 점은.

거칠고 야성적인 기운과는 정반대로 배려심이 느껴지는 부분이라 감히 어떻다고 재단할 수 없다.

이런 복잡하고 길게 표현해야 하는 감정보다.

앨리스가 지금 로만과의 대화를 돌아보며 받은 느낌은 단순했다.

'···생각이 깊으시다.'

언동에서 얇은 유리 같은 섬세한 구석이 느껴진다 해야 할까.

별빛처럼 은은하게 보여주는 매너와 부드러운 행동을 보면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아직도 파악을 하지 못하겠다.

"···."

가득했던 음식이 비어버린 그릇.

바닥이 보이는 빈 잔.

그리고 사람이 떠난 맞은편 빈자리.

선술집은 위에서 내려오는 왁자지껄한 소음과 가게의 주정뱅이들로 시끄러웠다.

그런데도.

앨리스는 수도에 와서 겪어본 기억이 없는 적적함과 고요함이 찰랑이는 감각에 몸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질척이는 감정을 벗어던지기 위해 시선을 움직였다.

"테로."

- ···.

갈 곳이 사라지니 혼이 날까.

자신의 눈치를 보며 그릇 아래에 숨어있는 테로에게 앨리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올라 와."

-시이!

별 말을 하지 않는 게 기쁜지 빠르게 손을 타고 머리 위에 자리를 잡는다.

"예고도 없이 자꾸 돌발적으로 행동하면 이제 진짜 화낼 거야."

-쉬익···.

"로만님한테 가고 싶어도, 내가 먼저 물어보고 가는 게 맞는 거니까. 알았어?"

알겠으니 잔소리를 그만하라는 양 머리카락을 야금야금 무는 테로의 행동에.

앨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테이블을 떠나지 않은 상태로 앉아 발을 까딱이며 앞길을 고심했다.

'내일부터 나갈 파티라도 미리 알아볼까?'

지금부터 저녁까지 공백이 크다.

해가 떨어지고 늦은 시간에 있을 로만님의 부탁은 당일을 넘지 않고 금방 끝난다 했으니.

모험가는 또다시 내일 밥벌이를 고민해야 한다.

"으음~"

급전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 해도 시간은 유한하고 소중한 법.

타인의 인생이 갈려 들어간 노력조차 웃으며 압도할만한 재능이 없다면.

근면성실하고 부지런한 태도는 기본소양이다.

'구인··· 마법사면 전위보다는 여유가 있겠지.'

의뢰 게시판이라도 둘러보자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던 앨리스는.

때마침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인물들을 보았다.

참 기적이라 느껴지는 타이밍.

구름같이 보드라워 보이는 풍성한 핑크색 머리와 연두색 눈동자.

모험가라기에는 조신한 몸짓과 나긋나긋한 인상의 미녀는 여기 있던 백금의 모험가가 찾던 인물이었다.

"어머! 앨리스!"

자신을 보면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생이 생각난다 했나.

친밀감과 모성애를 방불케 하는 무언가를 눈동자에 품은 릴리네가 작게 손을 흔든다.

"여어! 아가씨~ 건강해 보이네."

그리고 뒤를 따라 내려오는 장정.

타고난 신장은 에델만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있을 아버지에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덩치를 보유한 남자.

둘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앨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

··

"···로만 씨가 내 마법을?"

릴리네는 앨리스의 입을 통해 전달된 얘기를 듣고 기쁘다기보다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네! 궁금한 점이 있다고··· 왜 그러세요?"

바로 전과 달리 무겁게 굳은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

반응에 의문을 품은 앨리스가 되묻자 릴리네가 옅게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하하···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마법이라 해도 백금 등급에게 도움이 될 정도는 아니라 생각하는데."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라크도 이유를 예상하기 힘든지 눈썹을 파도치듯 움직였다.

"로만 그놈이 마법?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몰라도 마법을 배우려는 건 아닐 거다."

"저도 그럴 거라 생각해요. 의뢰와 관련된 일인지도 모르고 개인적인 호기심 쪽일 수도 있죠."

유력한 답안이 나오지 않자. 쯧! 소리를 내며 라크가 혀를 찼다.

"이상한 놈이지만 이상한 짓을 할 놈은 아니긴 한데. 이렇게 되면···."

"당연히 만나봐야죠."

늘어지는 라크의 뒷말을 릴리네가 확실하게 이어 붙였다.

라크와 릴리네의 입장에서 친분이 있다 느껴도 로만은 백금.

제국에서 가지는 위치 자체가 다르기에.

릴리네 본인을 찾는다는 얘기를 들은 이상 절대 무시할 수 없다.

거절을 한다 해도 만나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다 듣고 정중하게 거절해야 이치에 맞는 것이다.

"그럼 그 시간에 뵙겠습니다!"

"앨리스도 같이 만나는 거야?"

이 설명을 빼먹고 있었구나!

릴리네가 의문과 함께 고개를 기울이자, 앨리스는 자신의 말솜씨가 깔끔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혹시 안되면 오늘 제 도움이라도 받고 싶다고 하셔서. 만약 온다고 해도 같이 도와달라고 하셨거든요."

"으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복잡함을 담은 목소리를 내며 릴리네가 생각에 잠겼다.

라크는 바로 옆 테이블 모험가들과도 아는 사이인지 물 한잔을 얻어 마시고 몸을 돌렸다.

"그럼 내가 다녀올 테니 아가씨랑 있으라고."

"아! 고마워요!"

라크는 선술집에 자리도 잡았으니 의뢰 보고를 하고 오겠다며.

묵직한 거구로 목재 계단을 고문하며 위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던 앨리스가 먼저 입을 열어 침묵을 깨트렸다.

"의뢰를 다녀오셨나 보네요."

"응. 거리만 멀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네."

질문에 웃음과 함께 돌아오는 나긋나긋한 분위기의 대답.

자신을 동생과 아예 겹쳐보는 건 아닐까?

언니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은 편안함이었다.

"앨리스는 로만 씨의 부탁이 끝나면 떠나려고?"

"저는 아예 새로 파티를 구해야 해서 조금 걸릴 것 같아요."

"앗···."

"편하게 언급하셔도 괜찮아요! 대단한 사고나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서."

뭐라 순간 말문이 막힌 그녀를 보며 앨리스가 먼저 손을 저으며 변명을 쌓아 올렸다.

간단히 안부를 주고받던 릴리네는 시간을 몇 번 확인하다 결심했는지 계단을 힐끔거리며 라크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다시 길드에 올 시간이··· 끼니는 먹고 와야겠네. 동생도 저녁을 먹으러 올 것 같으니 챙겨줘야 하고."

"사이가 좋으시네요."

앨리스가 지금까지 봐온 귀족들은 형제자매라 해도 사이가 남보다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감정의 방향이 서로를 향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보기 좋았다.

"그래서 걱정이야. 동생이 모험가라고 하면 눈을 번쩍이면서 좋아하거든. 미래에 자기도 모험가를 할 거라나."

그 이야기를 듣고 앨리스는 릴리네의 속내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친동생이 모험가를 꿈꾼다? 거기서 나올 가족의 반응은 하나.

"말리고 싶으시겠네요. 저희 부모님도 이번에 그런 이야기를 꺼내셔서."

"으음~ 그렇지?"

속마음을 꿰뚫는 정확한 추측에 릴리네가 쓴웃음을 지으며 힘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주제를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앨리스는 저녁까지 여기서 기다리려고?"

"아마도요. 의뢰가 정해졌으니 어디 가기도 애매해서···."

대답을 듣고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두들기던 릴리네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그럼ㅡ."

*****

리케와 클로에는 아카데미가 끝나면 서로 기다렸다가 함께 만나서 떠난다.

세리아는 둘이 떠나는 것을 보고 손을 흔들며 내일을 기약한다.

오늘도 마찬가지.

그 일정을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세리아는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2학년 때도!'

수업이 끝나기 직전 질문하는 시간, 교관님에게 내년 일정에 대해 물어봤고.

앞으로의 계획은 미정이라 정확한 사항은 알려줄 수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그 말에 기사 학부의 몇몇은 안심하는 듯했지만 자신에게 아쉬움 이외에는 없음이요.

백금이 지도하는 실전 수업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1학년이라는 게 인생에 손에 꼽을 행운이 분명했다.

실전 수업은 아프고 숨이 차오르지만 그만큼 배우는 재미가 있고 보람차다.

당일 배운 것들을 흡수하고 지적사항을 고치려 노력하다 보면 일주일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특히 기분 좋은 감각은.

노력을 하는 동안은 자신을 진심으로 보듬고 이뻐할 수 있는 게 자존감을 키우는데 최고!

고통을 감내하고 강자에게 달려들며 수련하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는 감각도 존재한다.

'솔직히 조금 멋있잖아!'

세리아는 자기 자신을 비판할 때는 확실하게 비판하고 격려하고 보듬어야 할 때는 일절 망설임이 없다.

자기 입으로 꺼내기 부끄러운 생각마저 파악한 교관님은.

자신의 등을 두들겨 줄 수 있는 정신을 원동력으로 삼으면 아주 좋은 강점이 될 거라는 평도 해줬었다.

아카데미 기숙사에 도착한 세리아는 입구에서 발을 멈췄다.

"어!"

기숙사는 개인 호실마다 번호가 있고 우편함이 별도로 존재한다.

편지가 와있다는 표시를 보고 관리인을 만나 편지를 건네받은 세리아는 릴리네에게 온 편지의 주둥이를 쫙쫙 뜯었다.

내용은 매번 돌아왔다는 것이 당일 특송으로 오는 게 전부였지만.

혹시 모르는 법.

사락-

편지지를 꺼내 짧은 내용을 그 자리에서 빠르게 읽은 세리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돌아왔구나!'

무사히 돌아왔다는 말에 일단 안심했다.

세리아는 개인실에 돌아가 가방만 내던져 둔 채로 아카데미를 벗어났다.

····

집주인이 있다는 증거로 불이 들어와 있는 자그마한 집.

벌써 언니가 만들어 주는 저녁을 먹을 생각에 군침이 돌았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하려나.

냄새를 맡으며 다가온 세리아가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언니!"

"세리아. 손님 있으니 이상한 행동 하면 안 된다."

"응?"

언니의 집에서 처음 보는 손님이었다.

고개를 움직이니 의자에 앉아있는 여성이 보였다.

드륵-

의자에서 일어난 여성은 자신에게 웃으며 먼저 예를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엘렉트라 영애. 수도 지부의 금 등급 모험가 앨리스라고 합니다."

"그, 금 등급 모험가··! 안녕하세요!!"

손님이 여성이라는 것에 일단 안심하고.

자신과 연령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외형임에도 금 등급 모험가라는 소개.

모험가를 동경하는 세리아의 마음에 흥미와 호기심이 들어찼다.

거기다 시선을 슬쩍 내려.

'···!'

자신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안타까운 가슴 사이즈를 본 순간.

건강한 피부색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에게 세리아는 알 수 없는 친밀감과 동지애를 느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넘치는 활기를 쏟아 힘차게 손을 내미는 세리아의 시선이.

방금 어디를 향했는지 안다.

앨리스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악수를 받아들였다.

"그, 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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