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5 - 네 번째 유랑자 -2-
수도에 도착해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 벌인 일은 간단했다.
계속해서 붙여뒀던 인물들을 통해 로버트의 위치를 확인하고.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자기 위치가 훤히 보이도록 커튼까지 열어두고 쿨쿨 자던 로버트를 잡아왔다.
'이 놈은 수업도 안 나가고···.'
덕분에 기다릴 필요 없이 편해졌으니 고마울 따름.
숲의 시원한 그늘에서 네 번째 유랑자 퇴치의 시작이다.
'빨리 끝내고. 저녁은 다 같이 먹어야지.'
후딱 처리하고 저택에 돌아가서 내 여자들을 먼저 기다리자.
바깥일을 끝내고 돌아온 만큼 반겨주는 솔직한 반응이 보고 싶다.
리케와 클로에는 아카데미가 끝나면 돌아올 테고. 에클레어는 지금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 중인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오늘 안에 저택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으허으···."
털썩.
흐리멍덩하게 풀린 눈을 한 채로.
바닥에 얼굴을 묻고 쓰러진 로버트를 발로 치워두고 갈라진 차원의 틈 사이를 주시했다.
'무신이 준 스킬을 지금 시험해 보기에는···.'
깨달음에 실전만큼 좋은 기회도 없어 어찌할까 싶었지만.
순간 화살처럼 박혀드는 생각에 실험적 태도를 버렸다.
'내 몸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리케와 에클레어에게 몇 번이고 들었던 이야기다.
심지어 클로에에게도 걱정이 된다며 한 번.
흉이 마구잡이로 자리한 이 몸뚱이는 저택에 있는 세명의 여인들에게 공공재나 다름없으니.
유랑자를 깔끔하게 처리해서 상처 없이 집으로 가는 것을 목표로 잡는다.
"글레이프니르."
차륵!
허공에서 검게 물든 사슬을 뽑아 준비를 마치고 나무 위에 올라가.
유랑자가 나오는 순간 기습을 먹일 자세를 잡았다.
····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유랑자는 출신이 같다.
그들의 출신 세계관은 선협(仙俠).
무신의 수많은 삶과 겹치는 경로인지는 모르나 무협에서 뻗어 나온 갈래의 세상으로.
대다수의 인물이 수행을 쌓아 신선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세계관이다.
말로만 들으면 교단의 인물들처럼 허허실실 웃으며 자비로운 인간들이 가득할 것 같지만.
이들의 목표는 덕을 쌓은 선한 인간(善人)이 아니라. 신선을 뜻하는 선인(仙人).
개요는 단순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인 게 당연하며.
한낱 인간이 영생을 누리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주어진 천명에 순종한다면 그 순리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순종하지 않고 하늘을 거스르는 행동이 원동력. 역천(逆天)이라 일컫는 행동을 밥먹듯이 저지르며 수행이라 칭한다.
탐욕스러움과 오만함은 물론이요.
단순히 강하기만 하면 모든 횡포가 허용되며 수준 높은 물리력이 미덕이라 치부되는 정신 나간 세계다.
그렇기에.
강해질 수 있다면 인간의 신체와 영혼을 양분으로 삼는 행위도 아무 거리낌 없이 당연하게 행한다.
이 세상으로 보자면 흑마법사와 비교해도 크게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이 영생에 필적하는 수명을 가지고 득세한 세상이다.
'선협이 아니라 그냥 지옥이라 부르는 게 어울리지.'
이름을 그렇게 바꿔도 이질감 하나 없는 공간이다.
감각을 곤두세운 상태로 기다리고 있으니.
깨진 틈이 찐득한 덩어리처럼 울렁이더니 인영을 토해냈다.
'왔다.'
즈즉-
흙을 밀어내는 힘찬 발걸음과 함께 유랑자가 등장했다.
빡빡 민 머리에 검은 송충이를 올려둔 게 아닌가 착각이 드는 진한 눈썹.
군무결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살승(殺僧)이라 본인을 자랑스레 기록한 남자다.
"흐하하!! 기어코 천명이 내린 순명(順命)을 넘어 역천(逆天)에 도달했구나!"
등장 대사는 여전히 그대로라 전생을 떠올리게 하며 마음이 차분하니 안심된다.
허나 안심과는 전혀 다른 문제로.
이쯤 되면 초기 유랑자인 로메리우스나 데가넬로와 달리.
격이 오른 유랑자들은 차원을 이동하는 것에 의문이 아니라 의미를 두기 시작한다.
높은 나무에서 턱을 만지며 상대를 가늠해 본다.
'몇 방에 끝나려나? 관절을 노리거나 목을 조르면 바로 끝날 것 같긴 한데.'
눈으로 봐선 모를지라도 게임을 해보면 강점과 약점이 명확한 상대.
쾌적한 진행을 위해 어느 정도 레벨링을 진행하며 도달한 로버트의 공격도 1로 들어갈 만큼 물리 방어력이 괴랄한 적으로.
공략법도 명확하다.
히로인이나 다른 동료를 대동하여 마법을 구사하거나 몇몇 아이템을 사용하면.
완벽에 도달하지 못한 외공의 문제로 몸이 촛농처럼 녹아버리는 약점이 있다.
있지만···.
굳이 가지 말라고 막아둔 길이 남자를 자극하지 않나.
파지직!
글레이프니르가 검붉은 오러를 머금고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 있는 승려의 두꺼운 가슴팍에 때려 박혔다.
"커헉!"
찡그린 얼굴로 타격점을 부여잡고 바닥을 구르더니 벌떡 몸을 일으킨다.
"오오~!"
진짜 오러를 담은 공격이라 직격 당한 순간에 죽지 않을 녀석이 드문 공격이었는데.
버틸 거라 알고 있었음에도 막상 눈으로 보니 놀랍기만 하다.
사락-
나무 위를 벗어나 울창한 숲 안에서 기척을 완전히 죽인 뒤.
무식한 몸만큼이나 섬세함이라고는 없는 대머리를 관찰했다.
"살수···! 모습을 드러내라!!"
바닥에 뻗어있는 로버트에게 먼저 시선을 줬다가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나를 찾느라 로버트를 건드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손바닥에 남아있는 찡한 감각을 확인했다.
'음! 이 맛이 금강불괴(金剛不壞).'
타격한 손에 진동이 올 정도로 느껴지는 경도가 신기했다.
군무결이 쌓아온 내공을 모두 폐해 외공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고.
단전을 처음으로 되돌리는 과감한 결정을 행함으로 완성에 큰 걸음으로 가까워진 외공.
인간의 몸이라고 믿을 수 없는 손맛은 강철 따위 비교도 못할 만큼 단단하다.
차륵-
글레이프니르를 살짝 흔들어주니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살심 가득한 주먹을 뻗는다.
"놈!!"
살승이 뻗은 권로(拳路)를 따라 남성의 허리통만 한 두께의 나무들이 줄지어 우수수 무너지며.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새들이 대거 날아오른다.
충격으로 흙먼지가 뭉게뭉게 오르고 동물들과 마물들의 울음소리가 숲을 울렸다.
'정갈함이 없고 단순무식해도 실력이 나쁘지는 않아.'
강자존이 상식이고 배신의 배신이 밥먹듯이 일어나는 선협에서 살아온 짬밥이 있기 때문인지.
확실히 세 번째 유랑자와 비교하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다.
기습을 당하고 두려움에 떠는 게 아니라 침착하게 대응하려는 움직임.
차락!
수풀 사이로 반대편에 늘어뜨려둔 글레이프니르를 의지로 살짝 움직이자 유랑자의 의식이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접근.
글레이프니르를 감은 주먹을 뒤통수에 때려 박고.
"으극··!!"
몸이 기우는 살승의 면전을 겨냥해 교룡각을 냅다 찔러 넣었다.
빠작!
일격 일격에 검붉은 오러가 번쩍였고 맞을 때마다 유랑자가 통증으로 인한 괴성을 뱉어낸다.
묵직한 덩치가 공중에서 속절없이 도는 와중에 꾸준한 생명활동과 박동이 느껴진다.
'멀었다.'
때려도 때려도 이 살승은 아슬아슬하게 죽지 않고 버틴다.
오러까지 두르고 사람을 이렇게 전력으로 때려보는 게 얼마만인지.
후련할 정도로 개운하니 그냥 내 머리가 뭔가 깨달을 때까지 죽지 않았으면.
"흐읍!"
인간이 인간을 구타한다고 연상되지 않는 살벌한 소리가 숲 속에 울려 퍼졌다.
··
··
흥분으로 고양된 시간의 끝이 찾아왔다.
목을 조르는 질식이나 관절기를 넣지 않고 순수한 물리 타격만으로 네 번째 유랑자를 쓰러뜨리다니.
나름의 업적이라.
"마, 마라··· 천자마(天子魔)···!"
내 눈을 보며 헛소리 뱉던 유랑자의 육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파스스-
목숨줄이 끊어진 살승의 아래로 이번에도 서적이 나타났다.
'이건 무신이 봐도 상관없겠지.'
누군가가 나타나서 가르치는 방식도 아니고 스승으로 받드는 형식도 아니다.
그저 정신과 육체의 무탈함을 위한 의서(醫書).
[ 역근경(易筋經) ]
▷입식과 좌식에 따라 수련법이 구분됩니다.
▷체조의 형태로도 시전이 가능합니다.
-선종(禪宗)의 창시자가 승(僧)들의 건강을 걱정해 저술한 의서.
유랑자의 선물인 역근경(易筋經). 이 의서의 최고 장점은 단순히 효과가 아니다.
창안자인 달마대사의 목적이 승려들의 건강함이 계기라는 점.
그 덕에 내가 익히고 나면 과거 리케에게 토납법을 알려준 것과 같이 전수가 가능하고.
나를 통한다면 누구나 배울 수 있다.
가볍게 보자면 하루의 시작을 위해 몸을 풀어주는 건강 체조 느낌으로.
극적인 효과가 당장에 느껴지지는 않아도 매일 꾸준히 하는 경우 효과를 확실하게 본다.
빼먹지 않고 몇 분씩 계속해서 투자하면.
체력이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속도가 올라가고 여러 가지 내성이 제법 치고 올라온다.
내성 발달에 게임에서 속칭 '체젠'이라 하는 회복 속도까지.
거기에 미미할지라도 전체적인 신체능력의 증가와 건강함은 덤으로 따라오니.
익히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건강은··· 당연히 좋은 거겠지?'
그나마 걸리는 점이라 하면. 게임에서 스킬을 쿨마다 돌리면 어느 순간 [ ■■가 건강해졌다! ]라고 알려오는데.
게임에서도 효과 미상인 그 알림이 현실에서는 어떤 효과를 보일지 모르기에.
일단 내가 실험을 통해 확인한 뒤에 문제가 없다면 저택의 셋에게 전수할 계획이다.
··
··
끼익!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오랜만이라는 감상을 느낄 틈도 없이 샤워를 빠르게 끝내고.
인벤토리에 있는 물건을 꺼내 탁자에 깔아 두었다.
'···빠진 거 없나?'
최근 화단을 꾸미는 데 관심이 지대한 리케를 위한 밀짚모자와 특별한 꽃의 씨앗에 연금술사 길드에서 구입한 토양 영양제.
가끔 한잔 마시자며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며 방에 찾아오는 에클레어를 위한 고급 와인과 잔.
수련을 제외하면 품에 누워 책에 대한 설명과 문답을 즐기는 클로에를 위한 신간 도서와 꽃잎에 보존마법을 부여해 만든 수제 책갈피.
모두를 위한 먹거리와 디저트.
선물들을 탁자에 한가득 나열하고 그녀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막상 누워있기도 뭐 하고··· 서있기도 지르르한 기분.
글레이프니르를 손에 쥔 채로 거실을 빙글빙글 돌며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질 때까지 감각을 집중했다.
넓은 거실을 느릿한 걸음으로 몇 바퀴 돌았을까.
저택에 당당하게 들어오는 의외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
아카데미가 끝난 리케와 클로에가 돌아오기도 전에.
공사다망한 그녀가 먼저 돌아올 줄은 몰랐다.
저쪽도 내 인기척을 읽었는지 하나의 빛무리처럼 정문으로 날아들었고.
쿵!
저택의 문을 거칠게 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해가 떠있는 시간임에도 포니테일이 휘날리도록 저택에 돌아온 여성이 보인다.
"키티~"
"로만··!"
양팔을 벌리자 에클레어가 품으로 달려들어 갈빗대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껴안는다.
"잘 있었지?"
"음···."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로만의 커다란 손을 느끼며.
에클레어는 로만에게 몸은 괜찮은지, 어디 다치지는 않았는지, 끼니는 잘 챙겨 먹고 다녔는지 걱정 섞인 말을 와르르 쏟아내려 했지만.
연인이 보여주는 생기 넘치는 웃음 하나에.
애먼 걱정은 어련히 접어뒀다.
"둘 밖에 없네?"
"···."
로만의 말마따나 넓은 저택이 공허한 것을 재차 확인한 에클레어는.
반차와 함께 굴러온 좋은 기회에 그대로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들어.
쌓여있는 것을 풀어 달라고 로만에게 요구사항을 어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