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3 - 어쩌다 인연
"클로에. 당근은 익는데 시간이 걸리니 제일 먼저 넣어줘."
"네에··!"
아카데미에서 돌아와 업무로 바쁠 에클레어를 기다리며 저녁을 준비하는 시간.
클로에가 함께 있으니 리케 혼자 로만을 기다리며 집을 지키던 때에 비하면 양호하다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드리트나 자매는 리케와 같은 감정, 같은 적적함을 공유하는 가족이나 다름없으니.
그리고.
이 저택의 여성 세 명이 모두 기대하고 있는 게 바로 내일.
해가 떨어졌다가 달을 누르고 다시 떠오르면. 아카데미에는 실전 수업이 있으니.
세명의 여성이 애타게 기다리는 로만이 돌아오기로 약속한 시간이다.
"···수업 전에 오라버니가 돌아오실까요?"
요리를 배우던 클로에가 뜬금없이 보이는 기대감 어린 질문.
리케는 재료를 손질하던 손을 멈추고 미미하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는 약속은 지키잖아. 수업 전에는 올 거야. 오늘 돌아올지 내일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그, 그렇겠죠!"
리케의 말은 언제나 틀리지 않았고 오라버니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기에.
클로에는 마음속에 날개가 돋아난 가벼움을 느끼며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이어갔다.
"이대로 끓이기만 하면 끝이니 기다릴까."
"네에!"
리케의 말에 클로에는 탁자에 올려놨던 소설책의 뒤가 계속 신경 쓰였는지.
의자를 가지고 와 냄비를 지키며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 준비를 끝냈다.
"넘칠 거 같으면 불만 약하게 해 줘."
"걱정 마세요!"
대답 직후 클로에는 눈도 껌뻑이지 않고 책에 빠진 모습.
그 광경에 리케는 작게 웃음을 보이며 화단에 물을 주기 위해 밖으로 향했고.
마당에 놓인 물뿌리개에 물을 채우던 리케는 바깥의 소란스러운 인기척에 주의를 기울였다.
-요즘 자꾸···거야? ··· 난다!
분개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담을 넘어 들려왔다.
-아··! 정말!
한탄과 함께 숨길 생각 없이 발소리를 내며.
뛰어다니는 소리가 저택 바로 옆에서 멈췄다.
'···?'
누가 봐도 수상한 냄새를 풍기며 악의를 가진 채 저택 주위를 돌아다니는 괴한이 있다면.
어지간한 인물은 리케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사특한 마음이 가진 특유의 기운은 리케가 눈을 돌리려 해도 돌리는 게 용납이 안될 정도.
오빠가 있거나 언니가 있는 시간에 저택을 들어와 보려는 괴한이 한 차례씩 있었는데.
처리법은 모두 똑같았다.
그걸 보고 배운 리케와 클로에는 소중한 시간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뭘 하는 거지?'
추상적이라도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능한 리케가 볼 때.
이른 시간에 찾아온 밤손님은 아니라는 직감에 바니타스를 꺼내 들려던 손을 멈췄다.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담벼락에 머리를 박고 있는 상대··· 까무잡잡한 피부에 진한 용모가 아름다운 소녀는.
뭐라 해야 할까.
단칼에 목을 날리기에는 어딘가 찝찝한 느낌과 기시감에 가까운 친밀감이 들어 리케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누구세요?"
··
··
"!"
앨리스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순간 알아챘다.
존대로 나긋하니 물어오지만 저 여성이 보이는 품위와 우아함은 필시···.
귀족이라고.
그것도 외지의 귀족들과 다른 진짜 귀족의 느낌.
뭐라 변명을 하기도 전에 앨리스는 처음으로 동성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진짜 이쁘다···.'
커다란 흉터가 얼굴에 자리했음에도 그게 미를 위한 장신구라고 평할 기품.
풋풋한 소녀 같은 외형과 다르게 절벽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느낌을 주는 깊은 눈동자.
빈틈이 느껴지지 않는 자세를 보고 있으니 앨리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저기요··?"
재차 물어오는 여성의 목소리.
정신을 차린 앨리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담벼락에서 한발 떨어졌다.
그녀가 서있던 위치는 누가 봐도 이른 시간에 찾아온 불청객이 자명했다.
"아니··! 그, 제가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준남작이나 어디 시골 영지의 귀족이라면 침착하게 이유부터 설명하겠지만.
지금은 사과가 먼저.
수도 중앙에 이리 터를 잡고 살아가는 인물의 심기는 함부로 거스르지 않는 게 좋다.
"알겠으니. 누구신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보라색 눈이 은은하게 번쩍이더니 자신의 속까지 관찰하고 훑는 느낌.
앨리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머리를 회전시켰다.
'말은 통하는 상대 같은데··.'
위기의 순간에도 정신만 똑똑히 차리면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법.
품에 잡히는 패를 꺼낸 앨리스는 양손에 모험가의 상징을 올려 여성에게 정중하게 보였다.
"저는 금 등급 모험가 앨리스라고 합니다··! 외지에서 오긴 했지만 현재는 수도 지부 소속입니다!"
"모험가·· 흐응··."
단순히 착각일까.
모험가라는 말을 들은 여성의 눈매가 조금 부드러워진 느낌이 든다.
'귀족들은 대부분 모험가를 싫어하지 않나··?'
뭐든 반응이 좋다면 앨리스의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그래서 모험가님은 여기서 무얼 하고 계셨죠?"
소속에 등급까지 밝혔음에도 이런 저택에 사는 인물이 모험가를 향해 '님'까지 붙여 존대까지 해주는 건 의외였다.
반대로 그 태도가 독특하니 앨리스는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 예측조차 불가했다.
'어쩌지?'
하여 지금부터가 중요한 구간.
남의 저택 담벼락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모험가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다 해야 신빙성이 있을까.
-시시싯! 싯!
벽 너머로 들려오는 테로의 소리.
'저게 진짜···.'
골 아픈 상황의 주범은 질 좋은 화단에서 뒹굴며 즐거워 보이기만 한다.
'돌아가면 흙에 물 안뿌려 줄 거야!'
행실에 대한 벌로 테로는 오늘 까슬까슬하니 마른 흙더미에서 자야 할 것이다.
혀를 한번 깨물어 통증으로 마음가짐을 깨운 앨리스는 괜히 거짓말을 하기보다는.
이야기가 통한다는 예감을 믿고 사실을 털어놓기를 택했다.
"···제 얘기를 들으시면 믿기 힘드실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한 번만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곧이곧대로 털어놓고 믿지 않는다면.
조금 문제가 된다 해도 테로를 강제로 정령계에 돌려보냈다가 다시 부르는 수밖에.
"판단은 제가 해요."
무표정하게 자신을 주시하는 그녀에게 한 발자국 다가간 앨리스는.
지금 이 벽 너머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보통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장난이 심하고 호기심이 많은지.
정령술사가 겪는 고충과 억울함을 토로했다.
··
··
스킬을 발동한 상태로 앨리스의 이야기를 들은 리케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겼다가.
마당에 들어가 확인을 끝낸 뒤에 다시 돌아와.
담벼락에 쭈그려 앉아있는 앨리스를 불러들였다.
끼익-
"들어오세요."
철장으로 된 문이 시원하게 열리는 그림을 보며 앨리스는 멍한 상태로 방금 전 자신을 돌아봤다.
'내가 말주변이 좋았나··?'
앨리스가 거짓 없이 사실만을 말하기는 했지만 보통은 한번 의심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말한 당사자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신용을 받은 지금.
이런 상황이 될 정도로 앨리스 본인의 언변이 탁월했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결과는 어쨌든 최상.
리케의 안내에 따라 앨리스는 저택의 넓은 마당에 발을 들였다.
초대를 해준 그녀의 눈이 미미한 빛을 내며 화단에 시선을 쏟아냈다.
"···확실히 꽃들 사이에 뭔가 있긴 하더라고요."
"보, 보이시나요?!"
이 사람도 정령이 보이는 건가? 싶어 놀란 앨리스의 호들갑과 달리.
리케가 아무리 집중해도 눈에 잡히는 건 정령의 완벽한 형태가 아니었다.
단순히 부자연스러운 마나의 흐름이 화단 사이에 존재하고.
그것이 앨리스와 이어져 있는 상태라는 정도.
처음 보는 형태의 이어짐.
이것이 정령과 정령술사의 계약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좋은 참고가 됐다.
-시, 시익!
앨리스와 눈이 마주치고 당황한 테로가 화단의 흙 아래로 도망가려 했지만.
아까 한번 놓치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앨리스가 기민하게 움직여 테로를 손에 잡아냈다.
"가봐야 어딜 간다고! 돌아가면 아주 혼날 줄 알아!"
손에 잡혀 사지를 버둥거리는 테로를 보며 앨리스가 승리의 미소를 보였다.
-시잇··!
테로를 한 손에 잡은 앨리스는 빈 손으로 화단의 흙이 뒤집어진 곳을 평평하게 만져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얼른 나가보겠습니다··!"
대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사건이 이리 부드럽게 해결되다니 새로운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
"조심히 가세요."
리케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든 앨리스의 눈에 또 한 명의 여성이 보였다.
'세상에···.'
창문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푸른 눈의 여성도 눈앞의 인물과 마찬가지로.
수도 거리에서 걷기만 해도 남성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인물이라는 걸 알겠다.
사용인도 없이 저런 미인들과 사는 저택이라.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진 남자가 사는 걸까.
*****
-아해는 이것만 제대로 다뤄도 공감각과 마음속에서 재생되는 것을 구현할 수 있을 거다.
무신이 내게 하사한 것은 두 번째 형상이 아니라 아예 별개의 스킬이었고.
게임에서도 없던 생전 처음 보는 스킬을 익히게 되어 뛸 듯이 기뻤으나.
사용해보려 해도 완벽하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풍림화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스킬인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능력만큼이나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짹- 짹- 삑-
어느덧 해가 뜨고 소동물들의 울음소리가 숲에 울려 집중을 부드럽게 깨트렸다.
'일단 돌아갈까.'
자잘한 히든 피스를 하나는 더 찾고 돌아가려 했는데.
스킬을 익히고 시험해 보느라 하루종일 앉아 모닥불의 잔재가 다 사그라들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빨리 가서 그것도 해야지.'
내일이 수업이기도 하고 돌아가자마자 해야 할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