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1 - 소꿉친구와의 재회는···.
풍림화산의 이름이 지워지니 내 마나를 매개로 발광하던 빛을 잃었고.
붓도 없이 비어버린 서책에 시커먼 먹물로 한자를 새겨 넣는다.
[ 空 ]
서책이 비었다.
마지막 획을 그어서 날리니 새하얀 심상의 바닥에 검은 먹물이 튀겼다.
"좋다. 오늘 나찰에 이어서 두 번째 가르침을 하사하겠다. 직접 맞부딪혀 미흡하고 궁한 점을 뽑아 보도록 하지."
"해봐야 남은 형상 네 개 중 하나 아냐?"
그렇게 눈치도 없이 미리 말해버리면.
선물 상자 안에 있는 내용물을 알아버린 어린이가 되어버린다.
'그래도 확실히 구미는 당기지만···.'
혹시 게임에서 못 보던 무언가를 얻을까.
그걸 기대했었던 나에게는 보상에 대한 스포일러나 다름없어 기대감이 조금 죽어버리는 이야기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지?"
"응?"
"매번 느끼지만 참으로 이상하구나. 전부 아는 듯하면서도 깊이 있게 아는 게 없으니."
"···돌려 말하는 여자는 질색이야."
쿡쿡 소리를 내며 웃음을 보인 그녀는 내가 아니라 새하얗게 물든 심상의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본좌의 5가지 삶을 녹여내 후세에 진전을 이어가게 한 것은. 그것들이 숨기고 있는 심성을 들추는데 탁월하고 범용성에 있어 효율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뿐이다."
"···."
"권태로움에 빠져 다섯 번째 삶에 진전을 이어갈 자를 찾기 시작했지만. 그 생이 본좌의 끝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마는?"
도대체 이 여자는.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숨 쉬고.
얼마나 많은 삶을 살아온 걸까.
초월적인 자가 하는 말을 하나하나 이해를 할 필요는 없다 해도 궁금증이 동했다.
'아니지. 집중···.'
지금 내가 머리에 문신처럼 새겨 넣어야 할 사항은 딱 한 가지.
저 여자가 가진 밑천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잔뜩 있구나.
그거면 됐다.
샤르르륵-
무신의 손에 들린 사슬이 하늘하늘한 손짓에 따라 바닥을 긁으며 부드럽게 움직였고.
가르침을 하사하겠다는 뜻에 이론까지 포함되는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번에 언급한 주제의 복습이 되겠지만. 정기(精氣)라는 것은 천지 만물을 구현하고 지탱한다."
"기억하고 있어."
무신이 글레이프니르의 심상까지 찾아와 했던 말.
저 그럴듯한 언변에 넘어가 자괴감 최고치를 찍었던 하루를 기억한다.
"흐음~ 그걸 기억을 한다는 무인이···."
"제발 좀 시원하게 풀어봐! 설명이 둥그스름하면 알아먹질 못한다고."
직설적으로 답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또 돌려 말하는 고질적인 언변이 나올까 선수를 쳤고.
로만의 숨김없는 한탄에 피식 웃음을 보인 무신은. 비어있는 한 손을 펼치더니 작은 불길을 일으켰다.
화륵!
"이건 삼매진화(三昧眞火)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태우는 단순한 수법이지."
"그리고?"
이 남자의 수선스럽고 거친 행실이 자못 거슬렸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태도를 바꿔 제대로 집중하는 얼굴과 표정은 만족스럽다.
'···배울 때는 제대로 보고 있군.'
로만의 검붉은 눈동자에 일렁이는 불꽃을 확인한 그녀는 주먹을 쥐어 불길을 지워냈다.
"특별한 화공(火功)을 익힐 필요 없이 경지에 도달하면 우습게 사용할 수 있는 불길이다."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는 양. 눈도 껌뻑이지 않는 로만을 확인한 무신은 뒷말을 이어갔다.
"삼매진화는 누가 뭐래도 뜨거운 불. 허나 생각해 보거라. 태우는 것이 없음에도 불꽃을 일으켜 무언가를 태워버리는 건 이치에 어긋나지 않나?
"원리는 이 불꽃이 흔히 아해의 세상 검수들이 말하는 마나와 정기로 이루어져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칙! 치지직-!
이번에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서 스파크가 튀기더니 전류가 모여 꽃의 형상을 이루었다.
"···."
말도 안 되는 섬세한 운용에 턱이 빠질 뻔했다.
"무인의 손 끝에서 구현되어 뻗어 나오는 천둥이든 개화하는 꽃봉오리든 인지를 벗어난 것들이 그러하다."
복잡한 설명은 다 뽑아내고 뼈대만 보여주는 눈높이 수업.
길게 이어져봐야 몸으로 익히는 게 도가 튼 남자에게는 골만 아픈 이야기일 것이라.
그녀는 기본적 설명을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이게 아해를 위해 최대로 풀어서 설명한 심상(心像)의 초입이다. 이해를 못 해도 그냥 기억이라도 해두거라."
"쓰읍. 어려운데···."
풀어서 들으니 마나를 사용하는 입장에서 이해를 아예 못할 건 아니다.
무언가 감이 잡힐 듯 말 듯.
등이 간지러운데 거기에 손이 닿지 않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머릿속이 완전히 빈 양철은 아니구나. 반응이 나쁘지 않아."
이대로 끝났으면 훈훈하니 좋을 텐데. 저 여자는 꼭 한마디가 많다.
"···설명 끝났으면 바로 가지?"
쇄(鎖)를 오른손에 감고 한발 한발 다가가도.
그녀는 여전히 안대로 눈을 가린 채 가만히 서있더니. 우스운 과거라도 떠올랐는지 입꼬리를 올린다.
"본좌에게 약자를 농락하는 취미는 없으니. 이렇게 하자꾸나."
"?"
압도적인 힘과 스킬을 내걸고 건방진 태도를 보이는 나를 먼지 나게 두들길거라 생각했는데.
나와 같은 무기.
동등한 신체 능력으로 상대하겠다며 그녀는 자신감에 미미한 조소를 얹어 선보였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구배지례(九拜之禮)를 하게 해 주마."
완전히 누르지 못한 흥.
신이 난 어린아이 같은 그녀의 목소리에 의도를 완전하게 읽을 수 있다.
티끌의 오점도 없는 완벽한 승리로 자신감을 부수고 꺾어.
내가 자진해서 우러러보고 추앙하는 스승님이고 싶어 보인다.
'이 여자는 받들어지는 게 그리 좋나?'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야말로 어찌 보면 기회 아닐까.
무구를 다루는 손기술과 육체를 운용하는 능력만으로 승부를 본다면.
막말로 자신이 없지 않다.
'내가 이길 가능성은···'
귀한 자리가 잡혔는데 평가만 당하며 두들겨 맞을 생각은 없다.
애초에 부딪혀야 한다면 상대가 누구든 이길 생각으로 달려들어야지.
"만약 내가 이기면?"
로만의 말을 들은 그녀는 자신의 청각을 의심하며 정색하듯 표정을 굳혔다가.
진심으로 즐겁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이겨? 이 몸을 이기겠다? 그래··· 호승심에서 오는 격동하는 의기. 참으로 뜨겁구나."
"웃지 말고. 진지하게."
"큭··! 대화만으로 이미 즐겁구나. 그래··· 거리낌 없이 말해보거라. 무얼 원하느냐?"
"가진 걸 알아야 거기서 고르지 않겠어?"
"흐음··· 지당하군."
그녀는 이런 상황을 상정하고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지.
평소와 같이 억센 기세로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서 생각을 이어간다.
"본좌에게 있어 패배란 죽음과 다를 바가 없으니. 목숨을 잃고 시체가 된 이 몸을 어찌할지는 아해의 자유니라."
"···좋아."
모든 것을 주겠다는 뜻.
저 말로 충분하다.
훙-! 후웅-!
글레이프니르와는 다른 재질의 쇠사슬이 가진 미묘한 무게감을 손에 길들이며.
속도를 점진적으로 높이고 원심력에 불을 붙이자.
하나의 사슬이 수 개의 궤적을 그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사천(四川)의 패주라 자부하던 당(唐)씨 무지렁이들 보다는 조금 볼만하구나."
도발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은 무시하고.
사슬이 회전해서 오는 타이밍에 힘을 담아서 완벽한 타이밍에 휘둘러야 한다.
"흐읍!"
사슬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무신의 몸을 등분시킬 기세를 담아 팔을 사선으로 내던졌다.
··
··
-이번만이 아니라 언제든 덤벼보거라.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며 던진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와··! 이·· 미친."
눈을 뜨니 지르밟은 모닥불의 흔적과 선선한 밤바람.
새하얀 천장이 아니라 은하수가 눈에 들어왔다.
'진짜 답도 없네.'
스치지도 못하고 농락당했다.
힘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고 속도까지 엇비슷하니 차이가 없었는데.
속절없이 두들겨 맞고 숨이 끊어지며 심상에서 쫓겨났다.
'···언젠가 무조건 이긴다.'
지금 번쩍이는 밤하늘을 담고 시야가 잘 보이는 와중에도.
작살처럼 날아든 사슬에 안면의 반쪽이 꿰뚫린 감각이 생생했고.
한쪽 눈알이 터졌던 그 거지 같은 느낌에 얼굴을 만져보니 다행히도 멀쩡하다.
"후-!"
험한 꼴을 봤지만 확실한 소득은 있었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서책은.
원래 풍림화산(風林火山)이라 적혀있어야 할 자리에 무신이 직접 써 내린 글이 자리한 상태였다.
*****
도리안과 제인은 앨리스의 옆에 딱 붙어 회복실을 지켰다.
퇴원할 때까지 챙기겠다며 주위에 숙소까지 잡아두고 제인은 직접 음식까지 하며 왕복했고.
얼굴이 반쪽이 되어버린 딸의 볼살이 돌아오도록 힘썼다.
"엄마. 진짜 이제 못 먹겠어···! 나 배 터져!"
"마지막으로 이것만 먹어. 과일 깎아줄 테니까."
"아니··! 너무 과하다니까!"
··
··
앨리스가 퇴원을 하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시끌벅적하니 회복실에서 보내는 기간도 길지 않았다.
양질의 포션을 마셔서 응급처치를 하기도 했고.
용인족 혼혈의 타고난 회복력. 거기에 실력 좋은 사제가 전담으로 치료를 이어가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속도가 경상이나 감기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사제님! 정말 신세 많이 졌습니다!"
"앨리스 형제님의 앞길에 여신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환자복을 벗고 평상시의 옷차림으로 돌아온 앨리스는 교단에 감사인사를 남기고. 마을의 입구에서 마차를 잡았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 가서 일해야지? 너무 오래 쉬었잖아."
게이트가 있는 영지까지는 같이 가야 하기에 동승했지만.
부모님이 혹시 수도까지 따라오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기우였나 보다.
"그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거나 편지로 보내거라."
머리를 쓰다듬는 도리안의 거대한 손길을 느끼며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스··! 약속한 대로 아직은 바로 무리하지 말고!"
"엄마. 나도 수도에 가면 밀린 일이 많아서 나가고 싶어도 바로 못 나가. 걱정하지 마."
의뢰를 시작하기 전에 가능하면 에델만에 한번 들리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제국의 심장으로 향하는 게이트에 몸을 실었다.
····
"후우-!"
지금부터 혼자서 판단을 내리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 생각하니. 병상을 털고 일어났다는 실감이 난다.
앨리스는 수도가 오랜만이라는 감상은 버리고 발을 움직였다.
모험가 길드에 먼저 들릴까 했지만.
반년 단위로 선금을 치러둔 숙소를 처음 목적지로 잡았다.
쿵! 쿵!
"으음~ 나갔나?"
바로 옆에 로만의 방을 먼저 찾아가 두들겼으나 외출인지 답이 없다.
사실 수도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
'정리하고 길드부터 가야겠네.'
자기 방에 있는 물건들을 기억으로 더듬어 확인을 이어가던 그녀의 귀에.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발소리.
이어서 옆방 문고리를 잡고 돌리는 소리가 잡혔고.
방에서 나온 앨리스가 코앞에 있는 얼굴을 보고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로만."
"애, 앨리스··?!"
의뢰를 하고 왔는지 검을 차고 추레해진 로만의 행색을 보고.
앨리스는 방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잠시 이야기 좀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