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0 - 후생가외
제국의 5 기사.
에클레어 드리트나의 업무 처리능력은 빈틈이 없고 완벽하다는 평이다.
위엄을 지키는 근엄한 분위기와 절도 있는 행동.
젊은 나이에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실력까지.
서류를 처리하는 것에서도 드러나는 꼼꼼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에클레어가 단장을 이어가고 있는 은익 기사단은.
다른 기사단과 달리 부단장이 정말 편한 자리였다.
몇몇 기사단처럼.
단장 본인이 처리해야 할 일을 아랫사람에게 미루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니.
은익의 부단장은 제출하기 전 중요한 서류에 대해 확인만 집중해서 하면 된다.
하지만 엘프의 화살도 빗나갈 때가 있다고.
어제는 에클레어가 처음으로 서류에 작은 실수를 해 부단장이 그걸 제출하기 전에 찾아냈다.
평소에 단장이 완벽하다고 부단장이 일을 설렁설렁했다면 찾아내지 못했을 사항이었다.
"단장님. 피로를 조금 풀고 오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 아직은 쉴 날이 아니다. 전날은 부단장에게 미안하게 됐군. 이제 그런 실수는 없을 거다."
"···."
그런 뜻이 아니었지만. 부단장은 뒷말을 이어서 붙이지 않았다.
이 곧은 고지식함이 그녀가 가진 특유의 성품이라.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지···.'
정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장은 그냥 행복해 보였다.
그 말 이외에는 표현할 방도가 없을 정도로.
어디선가 얻은 긍정적인 기운으로 생기와 활기가 넘쳐 그게 위엄 사이로 흘러나올 정도였는데.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은 전과 같은 행동과 움직임을 보여도 어딘가 무기력한 느낌이 돌고 있으니.
부단장은 편안하게 급여를 받아먹던 자신이 이제야 받은 만큼 일할 때라고 직감했다.
*****
-답답한지고··· 본좌의 심상으로 냉큼 오너라.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인벤토리에 풍림화산을 내던지고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뚜둑- 거리는 소리가 울려도 시원하게 풀리기는커녕 골이 더 당기는 느낌.
전생에도 전쟁터와 같은 드센 곳에서 숨 쉬다 보면 이런 스타일의 인간이나 의뢰자가 없지는 않았다.
'그냥 대다수가 이랬었지.'
살면서 돈이 최고라 해서 참을 때도 있었지만.
담배를 줄지어 물어서 화가 풀리지 않으면 막대한 손해를 보고도 계약을 해지시키며 기분 내키는 대로 살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책임져야 할 여자들이 생기며 확실히 좀 달라진 것 같다.
이제야 어느 정도 어른이라 할만한 인간이 됐는지도.
길길이 날뛰기보다는 침착하게 생각한다.
'···무신 형상을 괜히 익혔나?'
보이지도 않는 어딘가에서 지속적인 스토킹을 당하니 욱하는 마음에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을 떠나서 보면 손해는 절대 아니겠지.
첫 번째 형상인 나찰.
하나만 꼽아도 내 최대 약점을 커버해 주는 막대한 효율을 보이고 있으니.
"모르겠다~"
타닥! 치이익-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부츠를 집어넣어 신경질적으로 꺼버리고.
심상에 가서 쏟아낼 말을 머리에 미리 정돈했다.
따질 사항이 한 보따리 있으니 냉큼 오라는 저 말을 겁낼 이유가 있나.
이번에야말로 방해의 대가로 무언가 얻어내고 말겠다는 다짐을 하며 마나를 움직였다.
[ 심상 진입 ]
치직-
감정의 기복이 이유일까.
들이박히는 마나는 정중한 노크가 아니라 무신의 심상을 발로 쾅쾅 차는 느낌.
그와 동시에 시야가 비틀리며 익숙한 감각에 휩싸인다.
··
··
눈이 시려오는 새하얀 장소.
거기서 대자로 누운 채 눈을 뜬 나는 짜증이라는 감정이 어지러움을 이긴다는 걸 깨닫고.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후···."
의자에 앉아 각선미를 뽐내는 그녀의 위치를 확인하고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을 바로 잡았다.
"아해야. 조금은 경각심을 가지고 무(武)의 진전을 이어간다는 사명감을 가지는 건 어떠냐."
마주치자마자 인사도 없이 내리 꽂히는 무신의 말에 대해서 반발할 말만 한 무더기.
얼굴을 보면 또 울렁거리는 이질감이 찾아올까.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속에 있는 짜증을 여과 없이 뱉어냈다.
"그런 말을 할 거면 뭘 주고 말해야지. 나찰에서 멈춰서 다른 것도 못 배우게 하는 이 상황이 맞아?"
"허··· 생각을 마치고 결정을 내리는 동안 잠시 기다리라 하지 않았느냐! 상황을 모르는 자가 보면 수십 년은 막힌 줄 알겠구나."
확실히 채 일 년도 안되었지만.
심상 속에서 살아가는 무신과 달리 제국에서 숨 쉬는 나에게는 하루라도 빨리 얻어야 하는 게 힘이고 무력이었다.
"그걸 기다리는 걸 떠나서. 중요한 순간에 초를 치는 게 문제지."
학을 떼는 소리에 무신은 작게 주먹을 쥐어 입을 가리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쿡··! 밖에서 잡귀에게 가르침을 구하려 했던 기행이 발전과 진화를 위한 것이라면. 중간에 막아준 본좌에게 감사하거라."
"···?"
턱과 머리가 절로 가려워지는 말에 손이 근질근질해지니 그녀의 입이 재차 열렸다.
"성장을 갈망하며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은 인정해 주마. 허나 방향성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에 헛발을 디디는구나."
"이번에는 어디서 헛발이었는데?"
"아해는 누군가에게 후생가외(後生可畏)라. 이미 젊은 나이로 책에 깃든 망자에게 시기를 사고 있으니.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후진의 장래는 완성되지 못한 절대다수의 무인들에게 질투의 대상이다."
"···."
그 말에서 상황의 일부를 유추한 나는 인벤토리에 던져두었던 풍림화산을 꺼내 주시했다.
"이리 내보거라."
"!"
서책은 흰 공간에 앉아있는 무신의 허공섭물(虛空攝物)에 휘둘려 그녀의 손바닥 위로 이동해 빙글빙글 회전했다.
지이잉-!
동시에 풍림화산이 부르르 떨리며 마나를 머금은 빛을 뿜어냈다.
그 모습을 본 무신은 입꼬리를 한쪽만 올리며 명백한 비웃음을 보였다.
"명장? 호랑이? 푸훗··! 기실 과분한 별호로다. 본좌에게 눌려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잡귀 아니더냐."
"그 책에 있는 인물이 나한테 이상한 짓을 하려 했다··· 뭐 그런 뜻?"
"결론은 같아도 전개에 있어서 조금은 다르구나.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서책의 깨우침은 의도가 좋아도 지금 아해의 정도에서는 필요가 없다. 수준이 낮아도 너무 낮다."
"알고 있어. 알면서도 배우려 했던거야."
칼질 한두 번으로 간단히 잡을 수 있는 유랑자에게서 벽을 넘을 만큼 대단한 무언가를 기대한 건 아니다.
단순히 언젠가 한 번은 사용할지도 모르는 암수를 하나 더 늘리려 했을 뿐.
"아니. 전혀 모르는구나. 이런 잡귀의 손길이 섞인다면 아해가 향하고 있던 무(武)의 순도를 낮추는 독이 될거다."
"으음-."
무협 냄새가 풍기는 말투로 저리 두루뭉술한 형태로 알려주면 나도 할 말이 궁하다.
현실의 강함은 게임에서나 존재하는 레벨 같은 가시적인 수치가 아니다.
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언가 정신적인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으니.
"본좌가 늘 아해의 부족함을 알려주고 꾸짖었거늘. 거기서 듣기만 하고 가르침을 구하지 않은 것이 누구인지 돌아보거라."
확실히 무신은 내 문제점을 짚어주긴 했다.
균형을 완벽하게 이루지 못했다던가.
습관과 버릇이 존재하는 데 무형인지 생각해 보라던가.
그때 나는 듣고 흘리며 끝을 맺었고.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상세히 물어보지 않았다.
순간에 욱한 감정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무신의 고고한 태도에 반골의 기질이 돌았다 하더라도 타당하겠지.
"나한테 계속 고민하고 방황하라 했잖아? 그 서책을 찾은 것도 내 나름 노력의 결과였는데 방법이 틀렸다면 알려 줘. 아니면 나머지 형상을 다 해금해 주던가."
이유는 미상. 이 여자 앞에서는 곱게 고개 숙이기가 싫어진다.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안대 위로 노출 된 눈썹을 찡그리더니 혀를 찼다.
"쯧! 계수(稽首)부터 숙배(肅拜)까지 이어지는 구배지례(九拜之禮)를 기대한 이 몸이 미련한 건지··· 뭐 좋다. 내 아해의 조급한 성미를 이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 불찰이구나."
"···."
말싸움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던 예상과 달리.
시원하게 자신의 불찰이라 인정하는 무신을 보며 나는 반대로 긴장했다.
"다른 뜻이 있다고 착각하지 말거라. 진전을 이어가는 자가 어설픈 잡귀를 섬기는 것은 본좌에게도 큰 치욕이니 그뿐이다."
무신의 가치관과 행동을 지켜보고 있으면 속이 좁은 건지 넓은 건지 모르겠다.
자기 자신에게 무엇보다 명확하고 선명한 기준이 있으며.
그 기준에서 이어지는 절차를 중시하는 성향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비스듬히 앉아있던 몸을 느릿하게 일으킨 무신이 손을 폈다가 움켜쥐자.
촤륵!
심상의 세계에 청명한 소리를 울리는 한 줌의 얇은 쇄(鎖) 덩어리.
쇠사슬이 무신의 손 안에서 흔들리며 찰랑찰랑 소리를 낸다.
"벼락처럼 뽑았다. 물 흐르듯 휘둘렀다. 불길처럼 뿜어냈다. 빛살처럼 날아들었다. 뿌리 박힌 듯 버텼다."
"?"
한 호흡에 정확한 발음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활자들.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 입을 닫고 있으니. 심상의 하얀 바닥에서 쇠사슬 한 줄이 퐁! 솟아올랐다.
"듣고 느끼는 바가 없다 해도 우둔하다 탓하지 않으마. 이해하지 못했다면 무구를 들거라. 육신으로 부딪혀서 익히는 게 특기인 부류 아니더냐?"
앞은 몰라도 그 말만은 확실하게 이해했다.
글레이프니르는 아닐지라도 무신과 같은 사슬을 잡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그렇게 지켜보더니. 나를 제대로 알고 있네."
게임에서는 구현되지 않은 기연이 찾아왔다는 느낌.
기대감에 심장박동이 머릿속을 울릴 정도로 뛰었다.
"흥·· 지금부터 본좌가 친히 가르침을 내리겠다. 쇄(鎖)와 쇄겸(鎖鎌)은 흥미로 익혀본 경험이 있느니라."
손에 든 사슬과 별개로.
허공에 둥둥 떠있던 풍림화산이라 적힌 서책의 제목이 파스스 흩어져 지워지고.
진한 먹물이 튀기며 새로운 글자가 아로새겨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