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9 - 풍림화산
에델만에 있는 가정집에 반짝이던 활기가 물러나고 구정물과 다를 바 없는 침묵이 쏟아졌다.
"허."
세장의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렸다.
한 글자라도 빠졌을까. 혹시 어딘가 지워진 게 아닐까.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지만.
간절한 부모의 마음도 이미 잉크로 물든 편지 내용을 변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여보··."
"···."
앨리스의 웃는 얼굴과 종이에 적힌 사건을 겹쳐서 떠올린 도리안은.
격해진 감정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용인의 어금니를 손바닥으로 가리고 눈을 감았다.
딱. 딱. 딱. 딱.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퍼지는 묵직한 분위기 끝에 생각을 끝낸 그는.
날카로운 동공을 보이며 판단을 내렸다.
"···당장 떠나야겠소."
"저도 준비할게요!"
제인은 도리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를 서둘렀다.
'로만··· 이놈은 도대체···.'
앨리스를 지키겠다고 수도까지 따라붙어놓고 뭘 하고 있는 건지.
단단한 비늘과 뾰족한 손톱이 듬성듬성 드러난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후우-"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내뱉으며 마음을 가라앉히자 살갗에 간간이 올라온 비늘이 숨어들고.
그의 눈에서도 호전적인 기운이 줄었다.
언제나와 같이 예고 없이 도착한 딸의 편지.
잘 지내고 있다는 편지면 모를까. 그 안의 내용이 문제였다.
편지는 확실하게 앨리스의 필체였으나.
적힌 내용만으로는 똑 부러지는 딸의 글이라 하기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너무 많았다.
자세한 사항은 가서 들어봐야 알겠지만.
에델만에서 수도로 떠난 딸에게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어찌 태평하게 일을 하고 있겠나.
덜그럭-
집에서 나와 무투 길드에 사유서를 걸어둔 도리안은 등을 돌려 한 건물을 보았다.
"···."
앨리스와 함께 수도로 떠난 로만의 아비가 있는 검술 길드.
생각이 많은지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는 도리안의 팔을 제인이 부드럽게 잡았다.
"감정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앨리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봐야죠. 서로 일이 있었을지 모르잖아요?"
"알겠소··."
모험가로 열심히 살아가는 앨리스의 앞길이나 의뢰에 방해가 될까.
걱정이 되어도 보고 싶어도 부부가 먼저 찾아가는 일은 없었는데.
웃지 못할 일로 딸아이의 얼굴을 보러 간다는 게 부모로서 참담하고 심란하기 그지없다.
··
··
'제국에 이런 영지가 있었나?'
에델만도 수도에 사는 제국민들은 대다수가 모를 촌구석이지만.
이 영지는 정말 구석 중에서도 구석이었다.
게이트를 타고도 마차를 잡아 해가 질 때까지 달려야 하다니.
병상에 있을 딸아이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기 위해 도리안과 제인은 금전을 아끼지 않았다.
제일 빠른 마차에 추가금까지 지불해서 내달렸음에도.
마을 입구가 눈에 보이니 해가 떨어진 어둑어둑한 시간이었다.
마차가 서자마자 마부에게 인사를 건넨 도리안과 제인은 주위를 제대로 둘러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물어물어 교단을 찾아갔다.
병자들의 앓는 소리가 숨김 없이 울리는 아담한 교단.
에델만의 교단보다 진하게 풍겨오는 약품의 냄새가 불길하게 느껴졌고.
도리안만 느낀 게 아닌지 제인이 불안함에 손을 꽉 잡아왔다.
"편지대로 괜찮을 거요."
제인을 짧게 위로한 그는 지나가는 사제에게 최대한 예의를 차려 앨리스를 찾았다.
"아아-! 앨리스 형제님의··! 이쪽으로 오시지요!"
친절한 사제의 안내를 받은 부부는 병자들이 쌓여있는 방을 지나 교단의 내부로 향했다.
커튼으로 입구를 가려놓은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문짝이 달린 회복실.
작은 영지에서 간판 취급을 받는 금 등급 모험가라 할지라도.
수도 소속의 금 등급 모험가에게 외지의 귀족이나 길드가 특별히 신경을 쓸 일도 드물 텐데.
'교단이 앨리스에게 이만한 특별 대우를 해줄 이유가 있나··?'
아무리 딸이 재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랬다.
도리안은 문 앞에서 사제를 돌아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사제님··· 정말 여기가 맞습니까?"
"금 등급 모험가 앨리스 형제님을 찾으신다면 이 방이 맞습니다."
"···."
다른 병실과 달리 면회 시간에 제한은 없으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찾아달라는 말만 남기고 교단의 사제는 뒷걸음질로 사라졌다.
잠시 멍하니 있던 부부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네! 들어오세요!
병상과 어울리지 않는 활기찬 목소리에 안심을 하며 도리안은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끼익.
편지를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회복실을 찾아온 부모님을 보고 앨리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엄마! 아빠!"
활동하기 좋은 복장은 어디 가고.
펑퍼짐한 환자복에 다리를 감싸고 있는 부목과 붕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딸을 보고 제인은 울먹거리며 다가가 앨리스를 껴안았다.
"앨리스··!"
"엄마 왜 울어. 나 진짜 괜찮아!"
외관과 별개로 표정만은 밝은 상태로 제인을 토닥이며 위로하는 앨리스를 본 도리안은 그나마 안심했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끼리 쌓였던 애틋함을 우선적으로 해소하고.
그제야 부부는 편지의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
편지 내용을 되묻는 이야기에 앨리스의 머리는 순간 멈췄고.
사실을 이해를 하는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가 침대를 박살 낼 뻔했다.
'부모님한테 알리지도 않았다고··?'
지금 로만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죽음을 확인한 것은 아니라도 시간이 일주일이 넘게 흘렀으니.
당연히 행방불명에 대한 사실 정도는 가족에게 알릴 거라 생각했는데.
"머리 아파··."
앨리스는 팽팽하게 당겨져 정신이 끊어질 것 같은 분노 보다.
살아온 시간과 대인관계에 대한 선명한 허탈감을 느꼈다.
'내가 이해를··· 해야 하나?'
에델만에서 살아오며 봐온 로만의 유약하고 휘둘리는 내면은 알고 있다.
어린 시절에 앨리스와 로만이 붙어 다니면 서로 성별이 바뀐 게 아니냐고.
에델만의 어른들이나 주위 인물들에게 우스갯 소리를 듣곤 했으니.
이유야 마구잡이로 붙이면 억지로라도 이해는 가능하다.
로만의 성향을 생각하면 악재를 알리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을 가능성이 제일 크고.
던전에서 나오는 사이 로만과 이솔데에게도 부상과 같은 사고가 났을지도 모른다.
이 교단에서 찾아봤을 때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선 그것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근데 이걸 왜 내가 생각하지?'
모르겠다.
앨리스는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뭉텅이로 잘려나가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같이 다니느니 혼자 다니고 말지.'
이제 수도에서 로만을 마주쳐도 별 생각이 안 들 것 같다.
"하-!"
침대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진이 빠진 헛웃음을 보이고 있는 앨리스의 옆에 앉아 손을 잡은 제인은.
마차를 타고 오면서 줄곧 생각해 온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딸의 이름을 불렀다.
"앨리스."
"··응?"
도리안과 제인은 딸이 가고자 하는 길을 알고 있다.
세상살이가 원래 그러하듯 어떤 길을 걸어도 가시밭길이기 마련이고.
특히 이종족 혼혈이 걷는 길은 그 가시가 두껍고 촘촘하며 더 날카롭다.
딸이 꿈꾸고 원하는 미래를 응원하는 마음과 냉혹한 현실에 던져진 딸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
제인의 마음속에서 무게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천칭이 휙휙 움직였다.
"모험가는 그만두고 에델만으로 돌아오는 건 어떠니?"
결국 그녀는 고민 끝에 말을 꺼냈다.
앨리스의 출중한 재능과 실력이라면 도리안의 뒤를 이어받아도 되고.
마법 이론과 역사에 대한 공부를 깊게 해서 제인의 아래로 들어와 연구를 하며 안락하게 살아가도 된다.
아니면 아예 새로운 일에 관심이 있다면 뭐든 도전해도 될 것이다.
제인의 말에 앨리스는 시원하게 이를 보이며 웃었다.
"엄마. 나도 이번 경험으로 앞으로가 겁이 나고 무서워. 당장 다음 의뢰를 하다가 같은 일을 겪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제인은 냉정한 현실을 깨닫고 상처 입은 자식의 모습에 마음이 아려왔지만.
앨리스의 몸이 건강하고 성할 때 모험가를 그만둔다면 그것조차 감내할 수 있다.
"근데 이대로 물러나긴 싫어. 미안."
"···."
앨리스의 물러서지 않을 분위기에 납득한 듯 도리안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힘든 일을 겪고도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면··· 열심히 해라."
"여보··!!"
한번 더 설득해 보기는커녕 앨리스를 다독이는 남편을 보고 제인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잡았다.
****
앨리스를 교단의 회복실에 두고 나오면서 영지의 서점을 들렸다.
귀는 잘 안 들려도 돈계산은 귀신처럼 빠른 노인이 인상적인 서점에서.
글레이프니르를 위한 동화책까지 구입한 즉시 영지를 떠났고.
별이 떠오른 시간.
나무가 양쪽으로 트여 은하수가 잘 보이는 자리를 잡고 모닥불을 지폈다.
'여기 좋다.'
숙면을 위한 자리를 만든 게 아니라 집중을 위한 장소로.
물기가 남아있는 장작들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책을 읽기 딱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
"흐흠~"
인벤토리에서 꺼낸 낡은 서적.
등장과 함께 목이 날아간 세 번째 유랑자가 두고 간 물건이다.
사락-
풍림화산(風林火山)이라 적힌 서적이 찢어질까.
흘리듯 책을 기울여 첫 페이지를 펼쳤다.
[ 움직일 때는 질풍처럼. 나아가지 않을 때는 고요한 숲처럼. 적을 칠 때는 맹렬한 불길처럼. 공격으로부터 지킬 때는 묵직한 산처럼. ]
비록 내가 글에 대한 조예는 없는 문외한 일지라도.
굳은 절개와 힘이 느껴지는 글씨는 확실히 무언가 다르다.
하지만 이 책은 바로 다음 장부터 비어있다.
앞의 한 장을 끝으로 서적의 뒤는 모두 백지로 비어있는 상태.
'바로 해볼까.'
이 백지에 마나를 부여하면 카이의 호랑이라 불린 명장.
신겐에게 4가지 가르침 중 하나를 선택하여 배울 수 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무엇을 익힐지 마음은 굳혔으니 이제 배우기만 하면 된다.
지이잉-!
마나를 흡수한 책이 덜덜 떨리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걸로 끝.
조용하니 불길이 장작을 삼키는 소리만 울린다.
"어?"
게임과 똑같이 서적 전체가 빛으로 번쩍이는데 그 이상 진전이 없고.
느껴지는 변화라 하면 책 주제에 감정이라도 가졌는지 미미하게 진동이 느껴진다.
'뭐야? 왜 이래?'
의문을 이어가며 서적을 이리저리 흔들어도 보고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만져보고 있으니.
머릿속에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실로 통탄할 일이로다. 나찰을 가지고 진전을 이어가는 자가. 어찌 한낱 잡귀에게 가르침을 구하는가?
'어이가 없네··.'
자기가 두 번째 형상을 막아두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속으로 욕을 하고 있으니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답답한지고··· 본좌의 심상으로 냉큼 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