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7 - 던전 조난 -5-
위에 노출되어 있는 던전에는 지성이 조금 높고 무기를 다루는 타우들이 난장을 부릴 뿐이다.
각 개체의 능력은 기존의 타우들 보다 강력하다 해도.
자연에서 마주한 타우들처럼 군체를 이룬 상태도 아니라 다수를 마주하여 상대할 경우는 적다.
거기에 함정도 무너지는 바닥을 제외하고는 없으니.
청금이 아니어도 금 등급에서 경력이 쌓인 모험가들이 모여 움직이면 무난하게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보스도 다른 타우에 비해 단순하게 강한 놈이었나?'
덩치가 크고 강력한 힘을 가진 1차원적 보스.
그렇다 할지라도 일반적인 타우도 근력 하나로 사람을 종잇장처럼 찢고 쪼개 버리는데.
근력이 그것보다 강하다면? 어지간한 금 등급은 주먹이나 무기에 스치면 최소 중상에서 최대는 시체 회수가 불가능한 사망.
하지만 그만큼 움직임은 본능에 기초하여 단순하니.
몇 명이 갈려나가면 눈칫밥이 쌓인 베테랑 모험가들은 견적을 빠르게 뽑아낼 것이다.
청금이 있다면 낙승이겠고.
금 등급만 있다면··· 욕심으로 조급하게 움직이는 인물이 없다는 가정하에.
손발이 맞는 모험가들이 모여 지휘체계를 두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면.
누구도 죽지 않는다 장담은 못해도 최소한의 희생으로 깔끔한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위는 재미가 없지.'
상층이 뿔 달린 짐승들이 날뛰는 장소라면.
히든 피스가 있는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쿵!
오랜 시간 열리지 않았던 문이 뿌연 먼지를 흩뿌리며 닫혔다.
"지하인데 습하기까지 하니 공기가 별로다. 그치?"
혼잣말이라 생각하고 듣고 있던 앨리스는 말끝이 자신에게 향하자 놀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긍정을 먼저 하고 앨리스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역순으로 금빛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보니 그 말대로.
멀지 않은 장소에서 물이 거세게 흐르기 때문인지 벽에는 습지를 연상케 하는 이끼가 듬성듬성 자라 있다.
문에서 이어진 짧은 복도를 넘어서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또·· 다른 장소?'
들어가기 전까지 보이지 않는 폭포 아래 입구처럼 던전에서 다시 한번 분리가 된 장소.
"그렇게 신기해?"
품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는 앨리스를 본 로만이 킥킥 웃으며 물었다.
"읏··."
백금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흐트러지지 않는 각 잡힌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배에 힘을 줘도 우렁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앨리스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고 로만은 앞을 보며 걸었고.
눈에 들어오는 공동은 바닥에 듬성듬성 자란 식물들이 빛을 내며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박살 나고 무너진 돌기둥들이 지천에 깔려있으며.
그 기둥의 모양은 독특한 것이 앨리스의 눈에 익은 형상이었다.
바닥을 무너뜨렸던 타우가 어깨에 메고 있던 기둥이 오랜 시간 방치된 느낌.
-시이익! 쉭!
앨리스 보다 테로가 안에 있는 음험한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진흙으로 만들어진 다리와 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타다다다닥-
지네가 우수수 달린 다리를 자랑하며 귓바퀴를 걸어가는 불쾌함에 비견할 무언가.
땅을 소란스럽게 두들기는 기괴한 소음을 내며 저 반대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움직였다.
"···!"
그림자에 숨어 번쩍이는 두 개의 붉은빛.
멀리서 시선을 받았을 뿐인데 앨리스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공포가 목 끝까지 스멀스멀 차오르니.
마구잡이로 내쉬는 호흡이 저기 숨어있는 무언가를 자극할까 용인의 본능이 목을 틀어막는다.
"숨 쉬어. 괜찮아."
귓가에 들려오는 나긋한 저음. 긴장과 위기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는 시선에.
앨리스의 몸을 옭아매던 무형의 고삐가 끊어졌고.
빠르게 안정이 돌아오며 공포로 틀어 막혔던 숨구멍이 뚫렸다.
미지의 괴물이 있는 곳과 이 남성의 품 안은 단절된 세상 같았다.
"하아··! 후우··!"
"천천히 호흡해. 숨이 부족하다 느껴져도 천천히."
포션에 음식을 섭취했다 해도 현재 몸상태가 최악인 점.
평소의 앨리스 실력이라면 극도의 경계로 끝났을 압박감이 상태이상으로 다가온 요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정신력은 튼튼해.'
호흡은 돌아왔지만 식은땀을 흘리는 앨리스를 무너진 기둥에 앉히고.
땀으로 축축한 이마를 닦아주니 테로가 눈치껏 움직여 그녀의 머리 위로 옮겨갔다.
"좋아. 지금부터 테로가 앨리스를 지키는 거야."
-시이이!!
꼬리를 바짝 올리고 새싹을 좌우로 움직이며 각오를 보이는 테로에게 엄지를 올려주고 등을 돌렸다.
차르륵.
글레이프니르가 자연스레 손에 잡히고 습관에 가까운 느낌으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오른손에 새까만 사슬을 칭칭 감아 손등을 가린 뒤.
발광하는 식물들이 잔뜩 자란 중앙에 서서 공동의 주인에게 시선을 쏘아냈다.
"해가 지기 전에는 나가고 싶은데."
타다닥!
캄캄한 그림자에 숨어있는 몬스터는 로만이 노려보며 입을 열자.
야생의 감이 주는 경종을 느끼고 다리로 바닥을 급하게 두들기며 거리를 벌렸다.
문을 넘어 들어온 침입자가 먹이인지. 자신을 먹이로 삼을 강자인지.
아직 완벽하게 판단이 끝나지 않은 상황.
-퀴이익!!
위협적인 소리를 내어도 거침없이 자신에게 거리를 좁혀오는 침입자.
영역을 겉돌며 피하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는 감각이 지배적이다.
위험하다는 직감에 벼랑 끝으로 몰린 공동의 주인은 살기 위해.
자신의 무기를 사용해 침입자를 격퇴하기로 마음먹었다.
····
공동의 주인이 로만과의 거리를 조용하게 좁히며 무너진 기둥 뒤에 숨어 이동했다.
깡!
무너진 기둥 사이로 날렵하게 찔러오는 검은 물체를 글레이프니르로 쳐내자 울리는 금속음.
-키릭!!
분노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소리로 목청을 긁으며 기둥 사이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까맣게 번들거리는 껍데기에 톱날 같은 집게발.
바닥에 배가 닿을듯한 낮은 자세와 몸의 양쪽으로 달린 여섯 개의 다리.
갈고리 같이 휘어진 꼬리에서는 노란색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공식 명칭은 '캄란'이라는 전갈 형태의 네임드 몬스터.
던전의 위는 황소 아래는 전갈.
천문학에서 전갈자리와 황소자리는 황도 12궁에서 정반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게임에 그런 설정이 빠지면 섭하지.'
위층에 있는 타우의 보스에 비견하면 더욱 강해도.
리빙 아머 던전의 주인인 모르푸스에 비하면 수준이 낮은 보스.
기실 애매한 위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놈이나 위에 있는 놈이나 쓸모가 없단 말이야.'
캄란의 꼬리에서 나오는 독은 맹독이지만 그 정도 독은 쉽게 구할 수 있고.
껍질은 독특한 악취를 뿜어내는데.
게임에서 알려진 사용처는 딱 하나. 낚시 재료가 된다.
껍질을 잘게 다져 강이나 바다에 뿌리면 거기에 물고기가 바글바글 몰려드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거기서 특별한 무언가를 낚는 게 아니라 단순히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정도?
낚시에 큰 관심이 없는 내게는 인벤토리에 악취가 나는 재료를 넣을 이유가 없고.
결국 캄란의 몸뚱이는 오면서 씹어 먹은 동로(涷露)보다 처지가 아래인 것이다.
-키르르르···.
꼬리를 파르르 떨며 위협하는 대형 전갈을 봐도 위기감이 없어 머리에 공간이 남아돈다.
움직임을 그리면서도 한순간에 여러 기억을 떠올렸다.
'전갈도 제법 별미라 불리지 않나?'
전생에 업무로 만난 중국인이 소금 간을 해서 먹는 전갈이 그렇게 맛있다고 자랑을 했었는데.
저 놈으로 술을 만들거나 먹을 생각은 없지만.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들이 먼저 들었다.
-키리이익··!!!
자신을 보는 시선이 어떤지 알고 모욕감이라도 느낀 걸까.
꼬리를 날카롭게 훅훅 찌르고 거대한 몸을 이용해 전차처럼 밀고 들어온다.
후웅! 붕!
고개를 움직여 송곳 같은 꼬리를 피하며 생각했다.
'이건··· 내려치면 그냥 죽겠다.'
오러를 담아서 글레이프니르로 내려치는 순간에 캄란은 반쪽이 날 거라는 직감.
이런 놈들을 상대하고 움직여서 도대체 언제 감각이 예민하게 느껴지는 내면 상태에 돌입한단 말인가?
나름의 핸디캡을 주지 않으면 돌아갈 때까지 내가 원하는 상태에 돌입할 수 없다는 걸 실감했기에.
신체에 감도는 마나를 끊어내 봉인했다.
탁!
몸 전체를 움직여 집게발과 꼬리를 피하고 전갈의 뒤를 잡았다.
-키익!!
여섯 개의 다리를 두드려 육중한 몸을 돌리려는 캄란의 꼬리에 글레이프니르를 감고.
발길질로 배를 위로 차올리니 거대한 전갈이 공동을 데굴데굴 굴렀다.
쿠궁!
캄란이 정신없는 회전을 거듭하다 멈춘 것은 기둥이나 벽에 닿았기 때문이 아니다.
어지럽게 구르는 사이 껍질 위로 감긴 사슬이 당겨지며 캄란의 회전이 멈췄다.
차륵-!!
딱딱한 몸 위로 감긴 사슬을 풀어내려 발광하는 전갈 위로 로만이 내려앉았다.
"흐읍!"
팔뚝에서 근육과 혈관이 터질 듯이 팽창하며 칭칭 감긴 글레이프니르가 캄란의 갑옷 같은 몸뚱이를 옥죈다.
-끼이이익!!!!!
발버둥치는 캄란의 껍데기가 뿌드득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손 맛이 나쁘지 않네.'
근육의 피로감을 늘리기 위해 순수한 신체 능력만으로 캄란을 압박했다.
마나라는 초월적인 에너지를 자진해서 버리고.
버둥거리는 거대한 몬스터를 악력만으로 잡고 조이는 맛.
낚시꾼들이 말하는 손 맛이 이런 게 아닐까.
여기서 무엇도 얻을 생각이 없으니. 압박하는 손속에 자비와 망설임은 없다.
"끄으읍!"
손에 감긴 사슬을 한번 더 감아 이를 악물고 간격을 좁혀 당긴다.
뿌드드득!!
글레이프니르가 더욱 강한 힘으로 파고들며 캄란의 껍질이 박살 났고.
그 사이로 끈적한 액체가 줄줄 흘러나왔다.
-뀌이이익!!!
단순무식한 근력에 압착된 캄란은 단말마를 지르며 축 처지더니 생명활동을 정지했다.
기이한 형태로 구겨지고 부서진 절지 덩어리를 발로 밀어내 글레이프니르를 풀어내고.
빡빡한 느낌이 남아있는 손을 쥐었다 폈다.
"···운동 같아서 제법 괜찮네."
앞으로도 핸디캡을 도입하는 방식을 고수하면 단련에 도움이 되겠지.
천에 성수를 콸콸 부어 글레이프니르를 빡빡 닦아내 돌려보낸 뒤.
기둥에 앉아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소녀에게 향했다.
상황이 다 끝나고도 한참이 지났는데.
입을 벌린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앨리스를 가볍게 안아 든 로만이 물었다.
"이제 나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