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6 - 던전 조난 -4-
로프티 아카데미의 생도들이 과열된 머리를 식히기 위해 기다리는 점심시간.
당연하게도 셋이 모이면 대화의 포문을 여는 건 세리아였다.
"저번에 언니한테 요리를 배워서 해봤는데. 나중에 모험가 생활을 해도 끼니는 이제 어떻게든 될 느낌이야."
얼마 전 회심의 롱소드 당근 베기를 성공해 언니를 감탄시켰다는 무용담.
먹음직스러운 당근만을 깔끔하게 썰어내고 도마에는 흠집도 생기지 않는 섬세한 손기술.
당장 오러를 뽑아내도 이상할 게 없는 찬란한 검술의 성장이라.
"감탄이 아니라 경악했겠지···."
리케가 하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세리아는 자신의 성장을 알렸다.
"모험가는 식칼보다 숏소드나 롱소드를 쓰는 게 운치가 있다니까? 식칼 챙기고 다니는 모험가가 있겠어? 이것도 앞으로를 위한 사전연습이 ㅡ."
거침없는 성장의 발걸음을 피로하며 풀어나가던 세리아는.
리케의 짧은 말을 끝으로 돌아오지 않는 반응에 수다를 멈추고 활기가 넘치는 녹색 눈동자를 대굴대굴 굴렸다.
"다들 듣고 있지···?"
""···.""
음식이 코앞에 있는데 말소리와 식기 소리를 내고 있는 건 세리아 혼자.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가 잡힌 자리였다.
세리아도 처진 분위기의 이유는 알고 있어 계속 말을 참아왔지만.
"교관님이 일주일에 한 번은 오신다며···!! 진짜 둘 다 미쳤나 봐!"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이 터져 나왔으나.
답은 없다.
"···."
평소 자신이 말하면 웃음과 함께 반사적으로 호응을 하는 클로에의 푸른 눈동자는.
초롱초롱이 아니라 시들시들하니 반쯤 죽어있었고.
리케는 큰 변화 없이 여전히 무표정하고 말이 없는 상태.
하지만 세리아에게는 리케에게 일어난 티끌만 한 변화를 무의식 중에 잡아낼 눈치가 있다.
'교관님이랑 어떻게 지내길래 상태가 다 이렇지?'
클로에야 원래 여리고 아카데미 최고 소녀 감성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리케까지 생각이 많아 보이니 이성과 연애라는 게 무엇인가 싶다.
그냥 지금 보기에 느끼는 바는.
'연애가 사람 잡는구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눈을 가리면 주위에서 무슨 짓을 해도 답이 없다더니.
그걸 틈으로 작게나마 훔쳐본 느낌이다.
세리아 본인도 언니를 세상 제일 아끼고. 지금처럼 의뢰를 떠나면 기숙사에서 지내며 외로움을 느끼곤 하지만.
이건 결이 다른 느낌이라 격려나 위로의 말을 꺼내기도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지금 동거는 클로에의 집안에서 허락한 건가? 아니면 5 기사님이?'
저택에서 교관님과 다 같이 지낸다는 사실까지는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에클레어까지 로만과 엮여있다는 관계를 세리아는 모르니.
리케와 클로에만 교관님과 같이 지내는 것이라 인지하고 있는 상황.
"히이잉·· 오라버니···."
늘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던 클로에가 햇볕에 두들겨 맞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려 한다.
저번과는 상반된 입장에 놓인 세리아가 흐물흐물해진 클로에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붙잡았다.
세리아가 정신없이 수습을 거듭하고 있으니.
"으으음~"
기운이 빠져 인상이 부드러워진 리케가 다 식어버린 밀크티를 두고.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긴 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늘어진 클로에를 보듬어 주고 있던 세리아가 이번에는 리케 쪽으로 정신을 돌렸다.
"그냥. 갑자기··· 묘한 느낌이 들어서."
리케와 클로에의 상태를 보아하니 죄 많은 교관님이 돌아오기 전까지 쉽지 않겠구나.
세리아는 막연하게 깨닫고 있었다.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둘 다 밥부터 먹어!"
*****
'가까이서는 처, 처음 봤어···.'
고개를 돌리고 있는 앨리스의 심장이 아까와 다른 느낌으로 쿵쿵 뛰었다.
비록 앨리스가 모험가라는 직업.
대놓고 욕망에 솔직하고 거친 점을 자랑삼아 말하는 직업을 달고 살아왔다 해도.
남자 경험이 있냐 없냐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개인차가 있다고는 알고 있었는데···.'
선술집에 앉아있으면 듣기 싫어도 귀에 들리는 게 음담패설이고.
남성기가 여성의 가슴 크기처럼 개개인의 차이가 유독 심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애초에 각자 타고난 신장부터 팔다리 길이가 전부 다르듯.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도 당연히 차이가 있겠지만···.
방금 눈으로 인식하고 머리에 각인해 버린 그 크기는 경험 자체가 없는 앨리스에게는 무섭기까지 했다.
"이제 됐다."
무덤덤하게 알리는 목소리에 앨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네···."
바닥에는 물기를 닦아낸 천조각이 나뒹굴고.
검은 머리에는 촉촉하니 물기가 남아있지만 복장 자체는 이미 의뢰 준비가 끝난 모험가였다.
분명 나신이었는데.
옷을 어디서 꺼냈는지.
자신에게 먹였던 포션이나 뿌려준 성수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른다.
그저.
별처럼 많은 모험가들 중 정점.
'백금'이라 생각하니 깊은 의문 없이 납득할 수 있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날리려는 양 머리를 벅벅 긁던 로만은 웃음을 보이며 주제를 바꿨다.
"못 볼 걸 보여줬으니. 사죄의 의미로 끼니를 대접할까."
"···!"
무언가 먹는다 하니 입에서 자연스레 침이 고였다.
"굶다가 급하게 먹거나 자극적인 걸 먹으면 아무리 속이 튼튼해도 탈 나니까. 조심히 먹어야 돼."
달그락!
비어있던 손에 마법처럼 물건이 샘솟았다.
옷을 넘어 반합과 같은 다양한 물건과 싱싱한 음식 재료가 어디서 나오는지.
의문은 일절 가지지 않기로 했다.
'스킬이겠지···.'
은인에게 적대감을 사는 행위가 될 수 있으니 그저 침묵을 지키며 기다렸다.
"뭘 넣으면 좋으려나. 못 먹는 건 있어?"
앨리스가 고개를 저으니 적당히 만들어 주겠다는 말과 함께.
동그란 마도구에 불길이 치솟으며 위에 반합이 올라가고 안에는 물과 간단한 재료들이 퐁당퐁당 들어간다.
강한 화력으로 금세 들려오는 보골보골 거리는 소리.
시간이 지나 잘게 다듬은 채소가 물컹할 정도로 푹 익은 걸 확인한 로만이 앨리스에게 그릇을 건넸다.
"급하게 먹지 말고. 다 먹으면 더 줄 테니 천천히 먹어."
그릇에 반도 되지 않는 묽은 수프를 받은 앨리스가 앉은 채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 합니다··."
그릇을 양손으로 받친 앨리스가 국물을 천천히 들이켰다.
'따뜻해···.'
천천히 먹으면 목 넘김이 편안한 온도.
간이 거의 되지 않은 밍밍한 맛이 전부인 국물이라도.
앨리스가 먹은 음식 중 단연 최고라 꼽을 만큼 맛있다고 느껴졌다.
작은 입을 우물거리며 감질나게 받은 그릇을 연달아 비우고 뱃속에 온기가 차오르니.
벽에 등을 붙여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 은인에게 시선이 향했다.
"모, 모험가님··."
"왜?"
"혹시 모험가님이 여기까지 오신 건···."
뒤로 갈수록 확신 없이 흐려지는 앨리스의 목소리에 로만이 먼저 현실을 알려줬다.
"우연이야. 의뢰가 아니라 개인적인 볼 일."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래. 믿기 힘들지만 당연히 그렇겠지. 애초에 구조 의뢰는 한두 푼이 아니니.
수도에서 찾기 어렵지 않은 금 등급 하나를 구하기 위해 백금을 움직이는 건 현실성 없는 이야기다.
거기다 만약 부모님이 소식을 듣고 움직인다 하더라도.
에델만에 있는 재산 모두를 처분해도 불가능할 터무니없는 가격일 것이고.
안도와 더불어 찾아오는 이런저런 감정으로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는 앨리스의 앞에.
간단하게 끼니를 끝낸 로만이 주저앉았다.
"감사는 됐어. 이제 다리 한번 보자."
"아·· 네!"
근육의 비대함이 느껴지지 않는 섬세한 손길.
커다란 손으로 오금 아래를 부드럽게 받쳐 다리를 들어 올려 본다.
시선을 움직여 자신의 표정을 확인한 뒤에 아주 천천히 내려 자리에 원위치시키고.
자신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겉만 살살 만져볼게."
"읏!"
로만이 쓰다듬듯 손을 올리니 앨리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흠··· 포션으로 괴사는 피한 상태 같은데. 나가면 교단에 꽤 누워 있어야겠다."
"다리·· 괜찮을까요··?!"
희망적인 관측에 앨리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장담은 못 해. 그래도 감각은 살아 있으니 빨리 가면 절단을 해야 한다거나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장담은 못한다 해도 백금의 말에서 느끼는 강력한 신용이 있다.
포션을 마신 순간이 정말 아슬아슬한 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만 해도 통증은 고사하고 감각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으니.
머리로 최악을 상정하고 있던 앨리스의 긴장이 탁 풀어지며.
머리에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한 존재가 떠올랐다.
"··테로!"
앨리스의 목소리에 바닥에서 물기를 머금은 진흙이 뭉치며 머리에 새싹이 달린 도마뱀 한 마리가 현현했다.
-시익! 시이이이!!
바닥에서 폴짝 뛰어 앨리스의 얼굴에 착 달라붙은 테로는 서럽게 울음소리를 냈다.
"사이 참 좋네."
로만의 감상대로 정령과 저리 흐뭇한 사이인 계약자도 보기 드물 것이다.
"그럼 테로랑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안에 다녀와야 해서."
말을 듣는 동시에 앨리스의 시선이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문으로 향했다.
"금방이니 여기서 쉬고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려는 로만의 바지를 앨리스가 손을 뻗어 잡았다.
"아으·· 저··!"
··
··
통증이 없도록 흔들림이 없는 발걸음은 확실하게 불편해 보였다.
앨리스는 품에서 붉어진 얼굴로 연신 사과를 하며 고개를 아래로 못 박았다.
"죄, 죄송합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서··."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포션이나 밥을 주지도 않고 애초에 버렸겠지 라며.
이성적으로는 아닌 걸 알면서도.
버려지지는 않을까.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축적된 공포가 머리에서 최악의 수를 가득 채우며 놓아주지 않았고.
앨리스는 로만을 잡고 결국 어린애나 다름없는 부탁을 했다.
"이것도 중심을 잡는 훈련이지. 안에 들어가서 내려줄게. 안 그래도 중심이 허접하다고 한 소리 들었거든."
시원한 미소를 보면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 아닐까.
'···당연히 농담이겠지.'
백금에게 중심이 허접하다 꼬집다니. 세상에 그런 인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쉭!
품에는 앨리스. 머리에는 테로를 올린 채.
로만은 문을 향해 다가갔다.
"흡."
거대한 문에 신발 밑창을 붙이고 다리에 가볍게 힘을 준다.
드드드득-
열리기 시작한 문을 발에 힘을 줘 활짝 열고.
닫히기 전에 열린 틈 사이로 몸을 부드럽게 넣었다.
쿠웅!
묵직한 문이 퀴퀴한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닫히고.
앨리스는 저 바깥까지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