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1 - 허락
"글레이프니르."
차륵-
심상에서 나와 글레이프니르를 꺼내보니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로 돌아왔다.
표정은 보이지 않으나 어딘가 기운이 넘쳐 보이는 게 묘한 기분.
속죄를 담아 손에 잡히는 글레이프니르를 쓰다듬으며 방금 있던 일을 회상했다.
생에 처음 겪어보는 강렬한 자괴감.
'···그게 꿈이 아니란 말이지.'
[ 심상 진입 ]이라는 스킬이 존재하는 이상 현실이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기도 하고··· 내 무구가 정액을 마시고 으쌰으쌰 힘을 내는 미소녀라는 게 실로 복잡한 기분이었다.
손에서 감정을 보이며 꾸물꾸물 거리는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혈액이나 마나가 아닌 충만한 정기(精氣).
나에게 편의주의적이라 할 만큼 육체적으로는 자신 있는 분야이면서 정신적으로는 냅다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솔직히 어디 통에다가 정액을 담아두고 필요할 때 쓰고 싶지만 사슬에는 입이 없다.
그렇다고 내 여자들과 잠자리를 끝내고 그 위에 사슬을 굴려보는 행동은 상상만으로 아찔한 그림.
거기에서 오는 자괴감에 내가 먼저 정신이 깨질지도 모른다.
"정말 만약에··· 또 상처가 난다면 심상에서 직접 만나서 답을 찾아야겠지?"
차락!
겨우 사슬이 까딱이는 것뿐이지만 나는 저 행동에서 의사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직접 먹여야 한다는 게 관건.
'진짜 조심해야겠네.'
흠집으로 입에 정액을 그만큼이나 먹여야 했는데 혹시 박살이라도 나면?
'···.'
내 머리가 그 이상 생각하는 걸 거부한다.
생각만으로 몰려오는 정신의 노곤함.
"하아암~"
하품을 쩍 뱉어내고는 등이 소파에 파묻혔다.
몸 상태는 난전을 벌이고 성녀의 치유를 받아 나쁘지 않았으나 머리가 무겁고 정신적으로 피곤한 감각.
글레이프니르를 품에 안고 그대로 짧지만 깊은 숙면에 빠져들었다.
··
··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저택으로 다가오는 익숙한 기척이 느껴져 소파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앞으로의 계획을 에클레어가 오면 모여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아직 머리에서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것이 곤란했다.
심상을 두 번 들락날락하는 사이 냉철하게 성찰과 반성을 거듭하며 생각이 많아진 것도 한몫하는 것 같다.
끼익-
고심도 거기까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둘을 보니 미소가 절로 나온다.
정복을 입고 돌아온 리케와 클로에의 얼굴을 보니 긴장이 탁 풀렸다.
"아카데미 고생했어."
매만지고 쓰다듬던 글레이프니르를 돌려보내고.
앉은 상태로 양팔을 벌리니 둘은 쪼르르 다가와 자연스레 오른쪽 왼쪽에 자리를 잡는다.
"의뢰는 끝난 거야?"
"고생하셨어요··!"
잘 끝났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니 둘의 표정이 밝아졌다.
리케와 클로에가 봤을 때 의뢰의 내막이나 사정은 자세히 몰라도.
모험가인 로만이 멀쩡히 돌아왔으니 그것만으로 안심이었다.
점심때도 걱정이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세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을 정도였으니.
"오빠. 피곤해 보이는데. 어디 다친 건 아니지?"
"···진짜 괜찮으신 거죠?"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걱정을 해주는 둘의 허리를 감아 꼭 안았다.
앉은 상태에서 둘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니 극락 그 자체.
그 태도에 못 말린다는 양 웃는 소리가 좋았다.
"멀쩡해. 그냥 몸이 좀 뻐근하네."
풋풋한 살내음을 들이마시니 머리가 조금 깨는 느낌.
두 소녀는 고생했다는 말을 반복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좀 살겠다.'
애정이 담긴 손길에 티끌처럼 남아있던 자괴감이 녹아내린다.
동시에 머릿속에 엉켜있던 내용들이 순번을 찾아가며 풀리는 느낌.
"오빠! 안으로 가자."
몸이 뻐근하다는 내 말이 걸렸을까.
일을 하고 왔으니 안마라도 해주겠다는 소녀들에게 이끌려 침실로 연행되는 몸에 저항은 없었다.
*****
덜컥!
문짝이 날아갈 것 같은 다급함이 담긴 손길.
제복을 입은 여인이 동여맨 은발을 휘날리며 저택에 들어와 긴박한 목소리를 냈다.
"로만!"
에클레어는 퇴근과 동시에 수도를 내달렸고 거리가 아닌 건물 위를 가로질러 일직선으로 저택에 도달했다.
업무 도중에도 4기사와 주먹질을 주고받았다는 로만의 행보가 머리에서 지워지지를 않았다.
4기사라 하면 순수한 완력에 있어서 거대한 몬스터나 다름없는 남자.
아무리 로만의 몸이 튼튼하다 해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로ㅡ!"
기척을 따라 침실로 들어오니 눈에 들어오는 건, 마치 샌드위치 같은 모양새.
누워있는 로만 위에는 아카데미 정복도 벗지 않은 리케와 클로에가 늘어져 잠들어 있었고.
자신이 우당탕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수마가 떨어지지 않은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아! 언니다~ 고생했어!"
완전히 떠지지 않은 부스스한 눈으로 침대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클로에를 안아주고.
에클레어는 리케에게 깔려있는 로만의 겉모습에 도드라진 외상은 없는지 확인했다.
시선이 마주치니 웃는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온다.
에클레어 본인이 이리 급하게 온 이유를 아는 태도였다.
"걱정 마. 성녀님이 손수 치료해 주셨어."
"아무리 그래도···!"
염려로 감정이 격해지려는 에클레어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주자 그녀가 말을 멈췄고.
품에 안아주니 한숨을 푹 내쉬는 게 흥분이 가라앉은 듯했다.
"마나도 없는 개싸움이었는데. 늙은이 주먹이 아파봐야 얼마나 아프다고."
노인이라도 그 4기사의 주먹인데? 어이없는 발언에 반박하려던 에클레어는.
제복 위로 자신의 엉덩이를 주무르는 커다란 손에 말을 삼키고 헛웃음을 뱉었다.
"그래··· 로만이 무사하면 됐다."
"다음부터 안 다치게 더 조심할게."
로만이 백금의 모험가인 이상 의뢰에서는 어쩔 수 없을 터.
모험가가 일을 하는데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하길 바라는 게 말도 안 되는 바람일 뿐이다.
"그러니까~ 오빠는 무사하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해."
"맞아요··!"
리케와 클로에가 분위기를 보고 슬금슬금 다가와 붙었고.
우스운 자세로 도란도란 모여 포옹을 하던 네 명이 엉키며 자연스레 침대에 누웠다.
여기 있는 세 명의 여성이 제복과 정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나뒹구는 헐렁한 모습.
그녀들을 아는 외부인들은 상상도 못 할 모습이지만.
당사자들은 이게 정말 편한 모습이라 행복으로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
각자 할 일과 훈련을 마무리한 뒤 침실에 모이는 시간. 편한 옷을 입고 모두가 잠자리에 모였을 때.
나는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하루 종일 정리해 온 내용을 한 번 더 정리했다.
"뜬금없지만, 셋에게 허락받고 싶은 일이 있어."
"···응?"
의문을 품고 반짝이는 세 쌍의 눈동자가 내게 쏠렸다.
"어디부터 말해야 좋으려나···."
간단명료하게.
오늘 의뢰에서 아마란스 공작을 만나며 실력 부족을 통감했다는 말.
그게 분해서 무작정 움직이는 게 아니라 발전의 여지는 느끼고 있기에 거기서 욕심이 생겼다고 숨기지 않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면목 없지만 허락을 해준다면 당분간 바깥을 나돌고 매일은 집에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래도 약속할 수 있는 점은.
무조건! 주에 최소 한 번은 돌아올 것이다.
'아카데미 수업도 뺄 수 없지.'
육체만을 단련하는 게 목적이 아니기에. 개인의 평안을 위해 힘을 키우려는 것이 아니기에.
손안에 있는 것을 지키려고 하면서. 해야 할 것과 가진 것을 내팽개치고 던져두는 건 절대 답이 될 수 없다.
수단이 목표를 잡아먹지 않도록 해야 하고 힘의 사용처와 방향성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장담하건대 기한도 길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 쓸모가 없다고 생각해 버려뒀던 것들.
계륵이라 하기도 뭐한 미미한 효과로 방치해뒀던 히든 피스를 회수하고도 진전에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면?
'에클레어와 대련으로 도움을 받거나 밀려있는 백금 의뢰를 둘러보는 것도 괜찮겠지.'
결론은 수도 밖으로 좀 나돌겠다는 뜻.
이야기를 듣고 멍하니 있던 여자들 중에 에클레어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하- 종일 혼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했더니···."
그녀의 말에 턱이 절로 가려워졌다.
"···티가 많이 났나?"
리케와 클로에가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상황이 상당히 뻘쭘하다.
모험가 생활을 하며 통증을 참거나 철면피나 다름없는 뻔뻔함은 완벽하게 갖췄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닌가?'
표정을 숨기는 쪽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머리가 복잡해도 평소와 같이 일상을 지냈다 생각했다.
눈치가 귀신인 리케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눈치챌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자매까지 아는 분위기라니.
"오빠. 걱정하지 마. 우리가 아니면 누가 봐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
실시간 생각까지 읽힐 만큼 내 표정이 다채롭나?
말문이 막혀 뒷말을 꺼내지 못하고 가만히 있으니. 리케가 셔츠의 단추를 풀어 부드러운 살갗으로 내 얼굴을 품었다.
"오빠는 진짜 귀엽다니까··· 언니. 매번 경험해도 신기하지 않아요? 클로에가 봐도 그렇지?"
리케의 말에 클로에가 격하게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에클레어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흔히 보는 남자들과는 이질감이 너무 강하긴 하지."
이 자리에 있는 세 명은.
발전을 위한 갈림길에 서 있을 때 통보가 아니라 허락을 구하는 가장은 본 적이 없다.
리케의 부친인 에녹 스카디는 발전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버리는 인간이었고.
드리트나 자매의 부모는 클로에가 아니라 에클레어에게만 안부를 가장한 업무적인 연락만을 하는 상황.
리케는 유달리 독특한 경우지만. 드리트나 자매는 제국의 귀족 사회에서 흔하디흔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저택과 가정의 실권을 가지고 있는 로만이 자신들의 허락을 구하는 상황 자체가 유별나고 특별한 일.
그렇다고 로만이 만인에게 부드럽고 허락을 구하는 남자도 아니었다.
타인에게는 사납고 까칠하기만 한 백금의 모험가 아닌가.
밖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조심스러운 태도는 받는 애정과 존중의 격 자체가 다르다고 재차 실감할 수 있었다.
····
'맛있네.'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수제 샌드위치를 먹으며 저택을 나섰다.
의뢰를 한 번 다녀오면 몸 상태에 대해 걱정을 많이 받다 보니.
그 경우를 떠올리며 가정하다 보니 어제는 생각이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애초부터 내 여자들의 성향상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막을 일은 없으니 허락이야 무조건 받는다 생각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납득할 설명이 필요할 거라 예상했음에도.
뒷말은 꺼낼 필요도 없이 놀라울 만큼 쉽게 허락을 받았다.
전생과 현생 모두 통틀어 이리 행실에 보답해주는 여자들은 처음이라 세상 각별하다.
'평생 잘 챙겨야지. 선물도 매주 사 오고.'
그날 저녁부터 최선을 다해 새벽까지 리케, 에클레어, 클로에 누구 하나 빠짐없이 만족시킨 다음 날.
습한 새벽 공기를 몸으로 돌파하며 해가 뜨지 않은 어스름한 거리를 걸었다.
수도를 떠나기 전.
제일 먼저 들려야 할 장소가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