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9 - 글레이프니르 -2-
"···히으으."
"엥?"
사슬로 이루어진 기둥 뒤에서 쭈뼛쭈뼛 나온 인영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생각과 달라도 너무 달라 그냥 당황스러웠다.
사족보행을 하는 동물의 형태도 아니고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무언가도 아니라.
저 소녀가 심상의 주인인 글레이프니르라는 건 내 감각이 선명하게 느끼고 있으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묘했다.
성숙하다 하기엔 한 티끌 부족하고. 풋내가 난다고 하기에는 옅게 무르익은 자태.
한창 성장하는 애매한 구간에 서 있는 느낌이었으나.
멈추지 않고 앞으로 가는 시간이 보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성장은 더없이 아름다울 것이라고.
'아!'
여유롭게 감상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밖으로 나오니 어떤 태도도 취하지 못하고 자리에 서서 덜덜거리는 글레이프니르를 보고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안녕?"
"···."
내 목소리에 놀라 황급히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든다.
주저앉은 상태에서 어떻게 움직이기도 애매했다.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다가가면 놀랄 것 같은데···.'
지금부터 신중해야 한다. 강하게 느끼고 있다.
저 태도와 느낌은 클로에보다 조심히 접근해야 할 강적이라고.
"앞에 앉을래?"
"으읏··."
한쪽만 뜨고 있는 붉은 눈동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고민하고 망설인다.
내 말은 확실히 알아듣는 것 같은데 말은 하지 않으니 여러 가지 추론이 머리에 쫘르륵 깔린다.
'혹시 말을 못 하고 소리만 낼 수 있는 건가? 아니면 무신처럼 머리로 울리는 그런 걸 사용할지도···.'
그럴 수도 있고 그렇다고 뭐 어떠리.
외견부터 평범하지 않은데 무엇 하나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어디로 이어진 건지 몰라도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치렁치렁한 사슬부터.
피부에 문신처럼 이어진 무늬라던가 전생을 떠올리게 하는 현대적인 복장도 마찬가지.
"불편하면 중심에서 나갈까?"
"···!"
심부라는 감각이 여실한 공간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찌릿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던 바깥으로 나간다면 조금 편해질까 싶어 물으니 그건 또 아닌지 고개를 격렬하게 젓는다.
'이번은 정말 쉽지않구나!'
하지만 면전에다 한숨을 쉬거나 티를 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런 상황은 극복을 하면 어떻게 변할지 기대감이 생겨 재미있지 않나.
-못된 바람둥이 기질을 한 번 살려보거라.
그런 말을 남긴 무신은 아마 글레이프니르의 심상이 어떤지 알고 있던 게 아닐까.
'시원하게 다 알려주면 될 걸 끝까지 치사하게 굴기는.'
일단 인벤토리에 손을 넣어 그럴듯한 물건을 꺼내 보였다.
과일 맛이 나는 사탕.
다크 초콜릿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게 선호도가 높지 않을까.
내가 먹는 게 아니라 저택에 있는 셋을 위해 인벤토리 한쪽에 쌓아두고 다니는 물건 중 하나.
"단 건 좋아해? 먹을래?"
글레이프니르가 음식을 먹긴 하는지 영양 자체를 섭취할 필요가 없는지 모른다.
손바닥 위에 있는 물건보다는 내 눈을 보고 피하기를 반복하는 상황.
'일단 이건 아니군.'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 태도를 보니 다른 시도가 필요하다.
"이건 어때?"
관심을 가지는 물건이 있을까 정말 오만가지 물건을 넣었다 뺐다.
포션부터 무기에 여분의 신발과 옷. 벌레 쫓는 약부터 정말 별별 것들이 글레이프니르의 관심을 받기 위해 등장했다.
내가 인벤토리에 이런 게 있었구나!
이게 어디 있나 했는데 여기 있었구나. 하고 강제되는 회상을 이어간다.
"···!"
어느 순간부터 내가 꺼내는 걸 지켜보던 글레이프니르가 흠칫하며 반응이 있는 게 왔다.
왜 하필 이것에 관심을 가지는지 이유는 모르나··· 사실 반응만 온다면 이유 따위 필요하지도 않다.
'이거다!'
내가 모험가 초창기에 샀던 허름한 책.
글 보다는 허접한 그림이 잔뜩 들어간 책이지만. 신입 모험가들의 필독서라 할 만한 물건이다.
문맹 모험가들이 하도 많다 보니 먹거나 만지면 안 되는 위험한 식물 같은 것을 해골로 표기하고.
식용이 가능한 것이나 돈이 되는 것은 따로 표기를 해둔 책으로.
숲의 동물들과 급이 낮은 몬스터 그림도 특징을 살려 하찮고 귀여운 생김새로 들어가 있다.
글은 읽는 것을 상정하지 않은 수준으로 정말 짧게 한두 줄 정도.
"같이 볼까? 내가 읽어줄게."
"···."
어떤 말이나 활발한 제스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아주 느릿한 보폭으로 비척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모습이 불안하기 그지없지만.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서로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는 게 실로 흡족한 일.
옆이 아닌 맞은 편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글레이프니르 쪽으로 책을 돌려서 펼쳤다.
"어디부터 볼까··· 그래도 동물 쪽이 제일 좋겠네."
지금부터 혼잣말로 예정에도 없던 토크쇼를 해야 한다.
코드가 보통 사람과 같은지도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해 흥미를 사야 하는 것이다.
식물보다는 귀여운 것들부터.
색연필 비스름한 것으로 대충 그려서 더 좋았던 이 그림들.
내 감성에는 실사보다 이 막된 느낌이 좋았는데 글레이프니르의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사락- 사락-
책의 페이지를 넘기다 멈춘다.
"여기 이 생물이 뭔지 알겠어?"
뚫어져라 그림을 보던 글레이프니르는 내 눈을 슬쩍 올려다보고 고개를 작게 저었다.
"이건 화관 사슴이라는 동물인데 머리에 뿔 대신에 꽃이 자라서 이걸 약물 재료로ㅡ."
··
··
얼굴이 있다고 해도 반응이 없으니, 글레이프니르의 기분은 외견이 사슬일 때 보다 알기 어려웠다.
재밌어하는지 지루해하는지도 아예 모르겠다.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가고 책을 넘기면서도 입이 말라 물을 마시며 설명을 이어가니 책도 몇 장 남지 않았다.
남은 부분은 식물 목차.
의뢰로 살아남기 위해서 중요도는 제일 높아도 재미나 흥미로 따지자면 제일 낮지 않을까.
'여긴 재미없을 텐데···.'
흥미를 살거라 예상했던 동물과 몬스터 부분은 어떤 반응도 얻지 못하고 지나가 버렸다.
"음·· 이건 여기까지 할까? 뒤는 풀떼기만 잔뜩이라 별로 재미는 없거든."
다른 무엇을 해봐야 할지 고민하며 책을 덮으려 하니.
글레이프니르가 책 끝을 살짝 눌렀다.
"더, 더··읽어주세요··."
숲에서 마주하는 아담한 동물을 연상시키는 앙증맞은 목소리.
아교를 바른 듯 닫혀있던 글레이프니르의 입이 열린 진전에 짜릿한 쾌감이 흐른다.
거기에 제일 놀라운 점은 역시.
'말을 할 수 있었어?!'
반응이 외적으로만 보이지 않을 뿐 심심하지 않게 들을 정도는 되는걸까.
물을 한 모금 넘긴 뒤 흐뭇한 마음으로 책을 다시 펼쳤다.
"그럼 뒤도 천천히 보자."
샤락-
책의 페이지를 넘기니 식물들에 각각 해골 표시와 동전표시가 붙어있다.
반응이 없어도 있다고 생각하며.
초기 모험가 시절 경험담에 조미료를 살살 뿌려 혼자 이야기를 나불거리기를 한참.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갔다.
"아··!"
반응 없이 무표정을 지키던 글레이프니르가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를 내고는.
무의식이었는지 화들짝 놀라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어 숨겼다.
'통한다. 어디에서 흥미를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본인도 얼굴을 숨기는 행동을 굳이 짚고 넘어가는 건 최악의 수.
자연스럽게 책을 넣고 목을 가다듬었다.
이럴 때 톤은 살짝 높이고 말소리는 느긋함을 담아 천천히.
"지금은 글자만 가득한 재미없는 책들뿐이라 더 읽어줄 만한 게 없네··· 다음에 또 올 수 있으면 그때 잔뜩 가져올게."
"···네."
집중하지 않으면 듣지 못했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그래도 당장 처음 만났던 바로 전에 비견하면···.
'장족의 발전이지.'
무엇을 주제로 이어 가야 할까 고민하며 글레이프니르를 보고 있던 시선이 바로 뒤.
이음새가 끊어져 바닥에 떨어져 있는 사슬로 향했고.
그녀도 그걸 느꼈는지 고개를 살짝 들어 나를 보았다.
"미안. 내가 무기를 다루는 게 미숙해서··· 아프지는 않았어? 아직도 아프다거나."
"그리 아프지는·· 않았어요··."
많이 아프지 않았어도 통증이 있기는 했다는 뜻.
절로 마른세수를 하게 만드는 말을 듣고 마음을 굳혔다.
또 주제를 돌리기보다는 이 정도에서 본론을 꺼내 정면 돌파를 해도 될 것 같으니.
"상처를 고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알려 줄 수 있어?"
무언가 우물쭈물 망설이던 글레이프니르는 눈에 달린 사슬을 찰랑이며 고민을 이어가는 듯하더니.
어두운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그, 그냥 두면 금방 괜찮아져요···."
다행이다.
조건도 없이 시간만으로 돌아가다니 격이 다른 무구는 달라도 이리 다르구나.
"하아! 진짜 다행이네. 금방이라 하면···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아?"
"아마 5년 정도···."
"5년이라··· 5년?!"
금방이라는 단어 뒤에 5년이 오다니. 귀가 고장 난 줄 알았다.
'금방이라기엔 멀어도 너무 먼데?'
어딘가 가치관 자체가 어긋나있는 느낌. 서로 시간을 생각하는 관념이 아예 달랐다.
"그 정도 시간을 막연히 기다리기엔 나 혼자가 아니라서··· 다른 방법은 없을까?"
혼자라면 여기서 물러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이렇게 간단히 물러나면 안 되는 이유가 너무 많다.
"흐으···."
당황한듯 한쪽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글레이프니르를 보고 나는 속에 있는 생각을 꺼냈다.
"무기를 다루는 무인으로서 정말 무책임하고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실력이 어중간해서 앞으로 이런 상처가 없을거라 장담을 할 수가 없어···."
죽지 않는다고 각오를 다지면 통증은 견딜 수 있다.
대가가 피든 마나든 살점을 베어간다 해도 내줄 각오가 있다.
웃음기를 버리고 진지한 얼굴로 눈을 지그시 마주하고 있으니.
무언가 결심한 표정의 글레이프니르가 자리에서 고양이처럼 기어서 다가왔다.
"그럼 저, 정말 조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