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8 - 글레이프니르 -1-
[ 심상 진입 ]
▷타인의 심상에 진입하기 위한 허락을 구합니다.
▷심상에 진입한 동안 실제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심상 진입 스킬의 설명에 있는 '허락을 구한다.'는 문장.
이건 마나를 사용해 대상의 심상에 들어가도 되는지 노크를 하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강제적으로 침입하는 스킬도 이점이 있을지 모르나.
이와 같이 허락을 받는 점이 당당할 수 있기에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큰 이점이 있다.
'하루에 두 번이나 심상을 진입하는 경험이 흔하지는 않겠지.'
그것도 대상이 다르니 어떤 차이가 있을까 호기심이 생기기도 한다.
마나를 이동시켜 손 위에 놓여있는 글레이프니르를 대상으로 [ 심상 진입 ]을 발동시킨다.
미량이지만 마나가 빠져나가는 느낌.
'이번에도 기다려야 하나?'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몰라 스킬을 사용하고 멍하니 기다리니.
촤륵! 차르륵!
늘어져 있던 글레이프니르가 깜짝 놀라 펄떡이기 시작했다.
"어어··! 왜 그래?!"
글레이프니르가 자의로 이리 허둥지둥 움직이는 건 처음 봤다.
표정이나 언어 없이. 요동치는 몸놀림만으로 당황스러움의 극치라는 게 느껴진다.
그렇게 사방팔방 난리를 치던 글레이프니르가 시간이 지나니 다시 늘어졌다.
"···?"
축 뻗은 모양새가 포기한 것 같기도 하고 감당하지 못할 혼란에 빠진 생물 같기도 하다.
'설마.'
정말 혹시나 하는 생각이지만 머리를 스치는 한 가지 가능성.
-참하고 수줍음이 많은 아이니 무작정 들이밀면 안 될 것이다.
경고에 가까운 무신의 마지막 한마디가 떠오른다.
'예고도 없이 심상에 허락을 구해서 놀란 건가··?'
단적으로 보자면 이 그림은 어떤가.
낯을 가리는 누군가의 집 앞에 찾아가 얼굴 보고 이야기 좀 하자고 문을 두들기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보라.
사슬의 끝만이 불규칙하게 대롱대롱 흔들리는 모양이 사람으로 치면 발을 동동거리는 느낌.
'···오늘은 안 되겠네.'
글레이프니르는 보통 무구와 다르다고.
감정이 있는 것이라 그렇게 입으로 말하고 명심하려 했으면서 중요한 순간 행동에서 틀려먹었다.
"미안. 너무 갑자기 시도했지?"
차락-
혼란스러운 상태를 보니 역시 돌려보내는 게 좋을까 싶어.
허공에 이어진 공간으로 밀어도 돌아가지 않는다.
'···?'
오늘따라 처음 겪는 경우가 유독 많아 지금도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흐음."
돌아가라 해도 돌아가지는 않고 내 손 위에서 뒹굴며 고민을 이어가는 느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글레이프니르를 손에 올린 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신체에 어떤 문제가 없음에도 눈앞이 요동치는 감각.
글레이프니르의 허락이 떨어졌다.
··
··
'괜찮네?'
무신의 심상과 마찬가지로 구토를 유발하는 어지러움 같은 증상이 찾아올까 걱정했으나.
푹신한 솜덩어리에 안착하듯 편안한 느낌으로 심상에 떨어졌다.
살짝 뜨는 정신을 잡고 주위를 둘러본 나는 참지 못하고 탄성을 뱉었다.
"오오···!"
무신의 심상이 새하얀 정신병동 같은 공간이라면.
글레이프니르는 눈이 편해지는 무채색에 가까운 심상이었다.
회색과 새까만 색의 중간 정도일까.
거기다 공간이 텅 비어있지도 않았다.
중간중간 솟아올라 끝이 어디인지 모를 허공에 이어져 올라가 있는 사슬들.
차륵-
'진짜 사슬이네?'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만져보니 하나하나 생생한 질감을 가지고 있다.
가시가 돋친 사슬부터 이음새의 크기가 다른 독특한 생김새.
천과 같이 얇은 사슬까지 별의별 모양이 다 있다.
"글레이프니르? 어디 있어?"
반응은 없고 내 목소리만 웅웅 울리며 돌아온다.
글레이프니르를 찾기 위해 둘러봐도 특별한 생명체나 무언가는 보이지 않는다.
이 넓고 복잡한 심상 어디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귀속이라는 접점 때문인지 막연하게 끌리는 느낌이 있다.
일단은 걸어서 심상의 심부라고 느껴지는.
사슬의 줄기가 빗줄기처럼 가득한 곳으로 향했다.
'어떤 생김새일까?'
참하고 수줍음이 많다?
그런 말을 들어도 내가 봐온 글레이프니르의 외견은 사슬.
성별이 아예 없는 불꽃이나 빛의 덩어리 같은 형태일지도 모른다.
형태가 있다고 해도 테로와 같이 인간과는 전혀 다른 형상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귀여운 동물이면 죽어라 이뻐해 줄 수 있겠는데.'
테로와 마찬가지로 눈이 초롱초롱한 파충류의 형태도 좋고.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나 고양이라도 더할 나위 없겠지.
빳빳한 털이 멋들어진 고고한 늑대나 핫도그처럼 털이 찐 여우도 동물애호가인 나를 미치게 한다.
처음 보는 종류인 테로를 제외하면 게임에서 인기 있는 영(靈)의 형상은 그 정도일까.
몽글몽글하게 오르는 기대감을 안고 발을 움직이니 보인다.
한줄 한줄이 아닌.
수천수만 줄기의 사슬이 엉키고 뭉쳐져 거대한 기둥을 만들고 있는 장소.
'저기다!'
심상의 심부 말고는 있을 곳이 없다.
저벅. 저벅. 저벅.
느낌이 오니 보다 자연스럽게 빨라지는 발걸음.
글레이프니르도 느끼고 있는지 모르지만 서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감각이 진해진다.
기둥에 다가갈수록 묘한 분위기와 느낌.
"···이야."
가까이 도착해 눈앞에서 마주한 글레이프니르의 심부는 웅장하고 성대했다.
몇 가닥인지 모를 거대한 사슬 뭉치는 그 끝이 보이지 않으니 마천루 같기도 했고.
글레이프니르의 세상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아닌가 싶다.
목이 뻐근할 정도로 위를 향하던 시선을 내리니.
이음새가 박살 나 바닥에 떨어져 있는 쇠사슬 두 가닥이 보인다.
'흠집으로 생긴 상처인가··?'
상태도 볼 겸 끊어진 사슬을 주우려 심부에 더욱 가까이 향하니.
찌릿! 하고 느낌이 온다.
부스럭-
동시에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귀에 잡혔다.
'있다.'
가까이에 글레이프니르가 숨어있다.
기척을 읽는 것과는 다르게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이어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사슬로 만들어진 거대한 기둥 뒤에 있다고.
잘 숨어있다가 나와 마찬가지로 이 감각을 느꼈기에 놀라서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으음~"
경험상 경계심을 풀기 위해서는 섣불리 먼저 다가가는 건 좋지 않다.
그저 글레이프니르가 자진하여 나오기를 기다리는 게 최고일 터.
더 이상 가까이 가지 않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언젠가 나오겠지.'
스킬의 설명대로 심상이니 바깥의 시간은 흐르지 않을 터.
그것만으로 급할 것이 없고 모험가라는 직업으로 살아오며 기다리는 건 나름 도가 튼 인간이다.
허락은 받고 들어왔으니 글레이프니르의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한 시간이고 하루고 그저 기다리면 될 간단한 일이다.
"으쌰-"
자리에 앉아 말로이 백작의 연구일지를 꺼낸다.
어려운 내용이 많아 마법 언어를 정리한 사전까지 준비한 상태.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다시 처음부터 읽으며 모르는 단어 위에는 악필로 설명을 붙이며 시간을 보냈다.
'이거 사기 아닌가? 바깥 시간이 안 흐르는데?'
허락받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면 책이나 무언가 업무를 정리할 때 시간 낭비가 0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3분의 1 정도를 돌파했을 때.
"···히으으."
차륵. 차르륵.
두꺼운 사슬의 뒤에 멈춰있던 글레이프니르가 소동물의 울음소리 비슷한 것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에 맞춰 책을 집어넣고 기다리니.
"엥?"
기둥 뒤에서 슬금슬금 나온 글레이프니르는 귀엽거나 고고한 동물의 형태가 아니었고.
무형적인 빛이나 불길 혹은 액체 덩어리도 아니었다.
단순히.
아름다운 소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
주인이 돌려보냈던 자신을 다시 불러냈을 때.
상처 입은 자신을 위로하고 이뻐해 주기 위한 시간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주인이 자신의 안으로 들어와도 되냐고 묻는 상황에 얼마나 당황했던지.
예상도 못 한 상황에 펄떡펄떡 날뛰었었다.
난리를 치다 정신을 차리고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민의 연쇄.
'어, 어떻게 하지···?!'
당연히 만나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같이 쌓여있다.
이때까지 못 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고 궁금한 걸 물어보고 싶다.
그래서 고민 끝에 자신의 공간에 들였다.
하지만 막상 심부로 다가오는 걸 느끼니 마주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지금 쫓아내고자 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만··· 불러놓고 다시 내쫓는다니?
놀리는 걸 넘어 지독하게 불쾌한 행동이 될 것이다.
"흐으···."
심부의 뒤에 쭈그려 앉아 글레이프니르는 고심했다.
마음에서 결정이 엎치락뒤치락 난동을 부린다.
무신은 자신을 참하고 수줍음이 많다고 소개했지만.
그런 좋은 말로 포장하기엔 모순의 덩어리로 만들어진 자신이 아닌가.
'···왔어! ··와, 왔다!'
주인이 심부에 점점 가까워진다.
기척을 누르고 숨어있었는데 주인이 심부의 영역에 발을 들이니 찌릿! 하고 느껴지는 감각.
의사와 관계없이 몸을 부르르 떨었고.
걸치고 있던 복장이 움츠러들며 부스럭 소리를 냈다.
'···!!!'
이건 무조건 들켰다.
주인과 자신은 지금 서로를 인지하고 있다.
"으음~"
무언가 고민하는 주인의 목소리.
이대로 자신 쪽으로 오는가 하고 얼어붙어 있었는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더니 책을 읽기 시작했다.
'···.'
뒤에 있는 자신을 보거나 잡으러 오지 않는 건 천만다행이었지만.
저대로 언제까지고 기다릴 것 같다.
'나, 나가야겠지?'
정말 한참을 고민한 끝에 마음을 먹었지만, 긴장감으로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사슬을 잡았다.
차륵.
"···히으으."
용기를 내서 슬금슬금 밖으로 나오니 주인은 멍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