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7 - 중요한 건 직접 물어봐라
[ 심상 진입 - ■ ]
▷타인의 심상에 진입하기 위한 허락을 구합니다.
▷심상에 진입한 동안 실제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아해야.
"···."
나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몰라도 일단 겉으로는 여성의 형상을 하고 있는 무신.
그녀를 심상에서 마주했을 때 느낀 지지직- 거리는 이질감이었다.
"잠시 들어가 있을래?"
촤르륵-
매만지던 글레이프니르를 돌려보내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흠··."
무협에서 전음이라 부를 법한 저 기이한 연락에 답할 수 있는 방도가 내게는 없다.
그걸 저쪽도 알고 있는 상황.
이런 타이밍에 저 스킬이 생긴 이유라 하면··· 쓰라는 신호밖에 더 되겠는가.
[ 심상 진입 ]
치직!
스킬을 사용하자 마나가 모인 손이 깨진 픽셀처럼 흐트러졌다가 돌아온다.
제대로 사용했다는 증거로 마나에 미량의 감소가 있었지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잠잠하다.
"응?"
아무 변화가 없어 의아해 스킬을 재차 사용하려는 순간.
눈앞이 비틀리며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
··
"윽!"
이유는 불명.
저번과 다르게 심상에 진입하는 순간 느껴지는 감각은 구토를 유발하는 어지러움이 있었다.
수도에서 타 영지로 가는 게이트의 수십 배는 될 법한 어지러움.
거기다 눈을 뜨고 보이는 곳은 어딘가의 병원을 연상시키는 새하얀 공간이라니.
'···신종 고문인가?'
어디를 봐도 눈이 시린 건 여전했다.
"저번과 달리 본좌의 심부로 단번에 떨어졌으니 혼란스럽겠지."
걸음에 소리와 기척이 없으니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어디에 있는지 찾지도 못했을 것이다.
"신체의 균형을 완벽하게 이루지 못했으니, 의식이 멀어지는 순간에 저항력을 잃는 것이다."
새하얀 바닥에 끌리며 따라오는 검은 장발과 천으로 눈을 가리고도 자유로이 움직이는 여성.
무신의 얼굴 쪽으로 눈을 돌려 보는 순간.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어지러움에 이 자리에서 정말 구토를 쏟을 것 같았다.
"우읍-!"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머리가 그녀를 인식하지 못하고 정신을 표백하는 괴이한 감각이 찾아온다.
'그래··· 원래 이런 여자였지.'
저번에도 같은 경험을 했음에도 잊고 있었다.
"아직도 본좌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다니. 그다지 발전이라 할 게 없구나."
무균실을 연상시키는 심상의 바닥이 울렁거리며 앉을 자리를 만들고.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시선에도 보일 만큼 긴 머리를 뽐내며 자리에 앉았다.
"후우-! 후우··."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크게 호흡을 이어가니 뒤틀린 속이 자리를 찾아가고 허리도 펴진다.
"진정이 되었다면 앉거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지?"
중심이 흐트러지며 첫걸음이 비틀거렸지만 어떻게든 의자까지 도착해 자리를 잡았고.
사방팔방 날뛰던 감각이 잠잠해지니 이제야 그녀가 눈에 흐릿하니 보인다.
얼굴이 인식되지 않는 건 전과 같지만 시선을 조금 아래로 향하면 버틸 만은 하다.
"쯧쯧- 정남(丁男)이라 해주기엔 나약한지고."
앉자마자 혀를 차며 구닥다리 문장을 뱉는다.
"···욕하려고 부른 거면 계속해."
첫 만남보다 목소리가 까칠한 것이 무슨 앙금이라도 생긴 걸까.
양도했다 해도 글레이프니르에 상처가 났으니 그것에 화를 내는지도 모른다.
"사고를 치고도 여전히 겁도 없이 까칠하구나. 그래··· 응당 사내가 곱게 고개를 숙이면 그것도 재미가 없지."
"때에 맞춰 귀신처럼 부른 걸 보니. 계속 봤나 보네."
무신은 이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비웃음과는 결이 다르지만 나에게 있어 좋은 신호는 아닌 듯한 직감.
"감히 본좌에게 '수고해라'라는 말을 남기고 줄행랑치지 않았느냐. 그 말에 지켜보느라 수고 좀 했느니라."
"수고해라··? 아!"
형상을 얻기 위해 첫 번째 심상에 왔던 당시.
글레이프니르가 귀속되며 당황하는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로 손을 흔들며 남긴 한마디.
-수고해라.
그 마지막이 거슬렸는지 아직 개운치 않은 감정이 남아있었다.
'···이딴 게 무신?'
신이라는 대단한 글자를 쓰기에는 속이 너무 좁지 않나.
"약조한 시간을 제외하고 보느라 고생 좀 했느니라."
와중에 내 여자들과 관계를 가질 때는 보지 않겠다. 라는 약속은 지킨 듯 했지만.
그 시간 외에는 계속 보고 있었다는 뜻이니 솔직히 많이 미친 것 같다.
"···설마 그때 한마디로 지금까지 삐진 건 아니지?"
말을 듣는 순간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내려가더니 목소리까지 낮아진다.
"삐져··? 어찌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는 것이지? 헛다리 짚으며 감히 본좌의 속을 재단하려 든다면 당장 여기서 쫓아내겠다."
투명한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삐졌네··.'
속이 이리 좁아서야··· 글레이프니르를 받은 이후로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새로 생긴 스킬로 앞으로도 도움을 받을 기회가 생긴 거라면 말을 조금 가리는 게 좋을지 고민이 된다.
"결국 왜 부른 건데? 실력이 허접하다 욕하려고?"
"난봉꾼의 생각은 실로 협로(狹路)구나. 그리 한가한 몸이 아니다."
"···."
남 일상이나 종일 관음하고 있으면 한가한 거 아닌가?
말로 받아치려다가도.
무신이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쉽게 삐지는 성격이라는 걸 인식했기에.
일단 입을 닫고 귀를 연다.
사락-
본론을 시작하려는 신호라도 되는지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다리를 꼬았다.
"현시점에서 나찰만이라 해도. 아해는 본좌의 진전을 이어가는 무인이란 말이다."
"그건 사실이니 부정 안 해."
원래는 두 번째 형상인 천살성을 이어서 마지막 형상까지 쭉쭉 이어가는 전개를 생각했었다.
어쩌다 보니 상황이 막막하니 바뀌긴 했지만.
나머지 형상이 막혔다 해도 나찰의 백염을 밥 먹듯이 사용하고 있으니, 무신의 진전을 이어간다는 게 틀린 말도 아니고 부정할 말도 아니다.
"그런데 그리 나약하니 빌빌거리면 이쪽도 면(面)이 서지 않는다."
"···빌빌거리게 약해서 미안하네."
내 반응에 기분이 풀린 듯 그녀는 면전에다 소리를 내어 킥킥 웃었다.
"큭-! 조금은 개운하구나."
"···."
한 방 먹였으니 글레이프니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 생각했음에도 그녀는 현 주제를 놓지 않고 이어갔다.
"그 기름진 수염이 창을 다루는 걸 보면 녀석은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는 듯하지만 말이다. 아해는 아직 무(武)라는 게 무엇인지 애매한 곳에서 감을 잡지 못했구나."
창과 기름진 수염이라 하면 필시 아마란스 공작을 말하는 것일 터.
눈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오늘 부른 이유는 나한테 무(武)가 뭔지 알려주려고?"
"입으로 나불거리는 언어가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음은 물론이요. 개개인이 느끼고 성취하는 바가 다른 정신적인 것을 어찌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하겠느냐."
"···."
이해는 하지만 기운 빠지는 대답.
한숨이 푹 나오려 하니 그녀가 톤을 살짝 올려 말을 이어 붙였다.
"허나! 참고할 조언 정도는 들려주마."
"···인생 최고로 집중했어."
들었다 내리며 가지고 놀리는 기분도 들지만 뭐 어떠리.
집중력을 모두 긁어모아 그녀를 직시했다.
마주할 때마다 흐트러지는 인식이 조금은 또렷한 느낌.
"아해야.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무예의 형태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고?"
대답에 따라 큰 답을 얻지 않을까 싶어 신중하게 고민했다.
턱을 몇 번이고 긁으며 생각해도 답은 결국 하나.
"···나는 딱히 정식으로 이어가거나 배운 게 없으니 형태가 없으려나?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라 꼽겠지."
"그리 말할 줄 알고 있었다. '교육이 없었으니 형태가 없다.' 이 말을 고집하는 꼴이 진짜 무형이라 생각하느냐? 그건 이도 저도 아니라 하는 것이다."
"제대로 이해가 안 되는데··?"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만 이해할 뿐이다.
누군가는 자신을 부정하는 조언이 아프다고 할지 몰라도 지금 내게는 간절한 조언.
기분이 상하거나 나쁠 이유 없이 대답만을 갈구할 뿐이다.
"무의 흐름은 만류귀종이니 뒷골목에서 왈패들과 드잡이로 쌓은 무형이든 명문가에서 전승으로 이어간 유형이든 종착지는 통일된다."
"만류귀종···."
이 문장은 이해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니 다음 조언이 청산유수로 이어졌다.
"본인에게 형태가 없다 자신하는 무인도 상황에 따라 우선시하는 버릇이나 습관이 있는 법이지. 틀렸느냐?"
"그건 맞는데. 버릇이나 습관은 무예의 형태라 하기에는 좀 다르지 않으려나? 무인이 아니라도 전부 가지는 것들이니까."
내 말이 틀렸다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에- 그걸 이해 못 하니 결국 반쪽짜리라는 거다."
"쓰읍··· 어렵네. 답이 안 보여."
듣는 것만으로 확 오는 느낌이 없다.
막연하게 틀렸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해답이 멀리 있는 감각.
"후후- 위로 갈수록 길을 찾는 것은 고된 법이니 더 고민하고 더 헤매거라. 그럼··· 시답잖은 담소는 끝이니 돌아가거라."
돌아가라는 말.
'···끝이라고?'
말의 맺음과 동시에 새하얀 심상이 나를 내보내려는 기색이 느껴진다.
쫓겨나기 전, 머리에 계속 품고 있던 본론을 급하게 물었다.
지금 자리에 불려 와 얻은 것은 형상도 아니었고 수리법도 아니었으니.
이대로 돌아가기엔 두루뭉술한 조언밖에 없었다.
"잠시만!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안 했잖아! 글레이프니르의 수리는?"
감정을 가장 확실히 표현하는 눈을 가리고 있어 보이지 않음에도.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 기분을 제대로 표현했다.
"중요한 사항은 대면하여 직접 물어봐야 하지 않겠느냐?"
"음?"
"허! 참으로 미련한 아해로다. 심상을 찾아가는 요사스러운 사술(邪術)을 본좌가 어째서 하사했겠느냐."
대사와 달리 힐난하는 감정이 담긴 목소리는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내게 소리 없이 다가온다.
"···왜 오는데?"
한 손을 뻗어 자리에 앉아있는 내 이마에 손가락을 올리더니.
그녀는 남은 손으로 안대를 슬쩍 들어 올려 영롱한 금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본좌가 한 말을 잊지 말거라. 참하고 수줍음이 많은 아이니 무작정 들이밀면 안 될 것이다. 못된 바람둥이 기질을 한 번 살려보거라."
탁!
그녀가 손가락으로 나를 살짝 밀어내는 순간.
눈앞이 팽그르르 돌아간다.
··
··
"-!!"
어지러운 광경에 눈을 감았다 다시 뜨니 저택의 소파에 앉아있는 상태로 돌아왔고.
멍한 정신이라도 조언에 따라 눈치껏 움직인다.
"글레이프니르."
사륵!
단단한 쇠사슬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생각을 이어간다.
'수줍음이 많다···.'
어느 정도 머리로 시뮬레이션을 끝내고.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는 글레이프니르에게 스킬을 사용했다.
[ 심상 진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