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5 - 세 번째 유랑자 -1-
"큼···."
4기사는 최대한 멀쩡한 척 걸었지만 참지 못하고 입술 사이로 침음을 흘렸다.
걸을 때마다 골통이 울리고 쇠 맛이 목을 타고 찔끔찔끔 치고 올라오고.
근육이 비명을 지르니 순간순간 격통이 밀려와 걸음이 흐트러질 것 같았다.
아마란스 공작의 창도 문제였지만 백금이라는 그놈의 주먹이 보통 매운 게 아니었다.
거기다 치욕스러운 계약까지···.
"빨리빨리 걸어라. 멍청한 놈."
상념에 잠길 틈도 없이 공작이 뒤에서 두툼한 등을 창으로 쿡쿡 찔러 그의 걸음을 재촉했다.
도착과 동시에 창을 들고 살벌한 기세를 뿜는 공작의 감시 아래에 놓여.
내부에 여유분으로 준비된 복장으로 환복을 끝낸 뒤.
시종들의 손길을 받아 핏자국과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하는 게 우선.
외관을 깔끔하게 다듬고 정리하여 알현실로 걸음을 옮기며 일정에 돌입했다.
아마란스 공작이 플로이드 자작과 오는 걸 확인한 인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기별을 넣겠습니다."
"···."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알현실의 문 앞에 죄인처럼 선 4기사는 응답을 기다렸다.
-들라 하십니다.
에클레어의 목소리에 문이 열리고 세드릭 프리밀러가 최대한 격식을 갖춘 걸음으로 안으로 향했다.
··
··
이미 4기사가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박고 꾸지람을 듣는 것 외에는 없으니.
황제의 고성이 내려꽂히고 목소리가 높은 점을 빼면 알현 자체는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증언에 따라 플로이드가 벌인 일을 듣고 노성을 토하는 황제를 포함해 모든 게 공작이 예상한 상황.
정치에 무관심하여 중도를 지키던 4기사가 상황에 휩쓸려 황제파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상황까지.
'저 돌머리가 정치를 알 리가 있나.'
중도에서 이런 식으로 굴러들어 온 4기사는 꼭두각시 신세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유일하게 예상을 벗어난 부분이라 하면 그 모험가 친구가 황실에서 생각보다 더 이쁨을 받는 점일까.
연로한 제국의 지배자는 4기사가 벌인 사고를 듣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분노를 토하느라 지쳐 문책을 끝냄과 동시에 이른 시간 처소로 돌아간 상태.
아마란스 공작은 영지로 돌아가도 되는 입장이 되었음에도 바로 돌아가지 않았고.
입이 근질근질한지 인수인계를 위해 대기하는 에클레어와 사담을 나눴다.
"···폐하께서 그 모험가 친구가 상당히 마음에 드신 모양이군."
어디선가 의자를 가져와 앉은 공작이 알현 도중에 있었던 대화를 회상했고.
"아시다시피 황실의 의뢰는 실패한 적이 없는 게 제일 크지 않나 싶습니다."
거대한 문 앞에 서 있는 에클레어는 딱딱한 표정으로 앞을 보며 대답했다.
"호오~ 확실히 폐하께 그렇다고 들었지. 모험가 쪽에 그만한 인재가 있었다니 제국의 미래가 참 밝아. 나는 영지에서 발 뻗고 자도 되겠군. 하하하!!"
로만이 인정받는 느낌에서 오는 두툼한 만족감에 입꼬리가 자제력을 잃고 올라갈 뻔했지만.
에클레어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그 위에 한마디를 더 얹었다.
"의뢰를 해결하는 속도도 매번 예상보다 빨랐으니 그것도 좋은 평가의 이유가 되었다 생각합니다."
"은익의 단장님에게 그리 좋은 평가가 나올 줄은 몰랐군."
의외라는 듯 톤을 높이는 공작의 목소리에 에클레어는 아차 싶어 고개를 저었다.
"제 사견은 아닙니다··· 폐하가 해당 모험가를 찾고 선호하시는 이유를 업무에서 간추려 보았을 뿐입니다."
공작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습관적으로 콧수염을 만지던 손가락도 멈춰있었다.
에클레어가 앞을 보며 업무에 집중하고 있으니 한참이 지나 그의 입이 열렸다.
"허 참! 우리 막내딸이 이번에 혼인만 하지 않았어도 어떻게 엮어 보겠거늘."
웃음기가 쫙 빠진 공작의 발언에 에클레어는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지만.
그 반동으로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모험가가 그리 마음에 드셨습니까?"
"흔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특히 그 사나운 안광은 말일세. 그놈 앞에선 세드릭도 맹수인 척하는 가짜야 가짜."
몇 번만 더 합을 주고받아 보면 어떤 녀석인지 정의가 될 것 같았는데.
딱딱하기 그지없는 업무로 처음 만난 게 아쉽다는 공작의 말에 에클레어는 여러 감정을 느꼈다.
"그렇습니까···."
"모험가 중에 우루스가 최고라 불릴 시간도 얼마 안 남았을지 모르겠어. 애초에 작위도 없고 누구의 도움 하나 없이 시작해 그 나이에 백금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물론 에클레어와 비교할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꼬리를 붙인 공작은.
방금의 웃음이 거짓말 같이 얼굴을 굳히더니 혼잣말에 푸념을 섞어 더 없이 신중하게 고민을 이어갔다.
"지금 딸을 하나 더 만든다 치면 너무 늦겠지. 여아를 입양 해봐야 공작가와 백금의 면이 안살거고···."
"···."
보통 사람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공작을 보며 에클레어는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
안주를 집어 먹고 침대에 드러누운 로버트는 입에 술병을 물었다.
'아이작 이 새끼는 평생 안 오려는 건가?'
로버트는 지금 상황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오늘까지만.
진짜 딱 오늘까지만 기다려 보자.
내일 오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 아이작을 찾아봐야지.
'자고 일어나면 이번에는 진짜로···.'
저번에도 같은 생각을 했지만 이번에는 각오부터 달랐다.
"하아암~"
술기운과 함께 몰려오는 수마에 순응하여 어두운 방 안에서 눈을 감고 눈을 떴을 때.
이번에는 진짜 달랐다.
술병이 나뒹구는 글러 먹은 생활도 정말로 끝이 났다.
그것도 강제로.
"어···?"
눈을 뜨니 햇빛이 예고도 없이 눈가를 때렸고.
어두운 방에서 벗어나 태양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신성력을 본 언데드처럼 로버트가 눈을 찡그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디인지도 모를 푸른 숲.
상쾌한 공기, 듣기 좋은 새소리와 반대로 로버트의 머리는 어지럽고 혼란스럽기만 했다.
"뭐, 뭐야!"
의자에 밧줄로 꽁꽁 묶여 앉아있는 자신.
처음엔 꿈이 아닌가 싶었으나 손목과 발목을 조여오는 통증은 절대 허상이 아니었다.
거기다 이 의자는 숙소에 있는 것.
"씨발···! 뭐냐고!"
억하심정에 터져 나오는 욕설이 숲을 메아리쳤다.
덜컥! 덜컥!
몸부림을 쳐도 의자만 들썩거리지 밧줄을 어떻게 묶은 건지 풀리지는 않고 살 껍데기를 더 조여온다.
마나를 끌어올려 줄을 끊어내려 하는 순간.
"쉿. 조용히."
목에 서늘한 금속이 닿았고.
뾰족하고 단단한 그것은 당장이라도 자신을 해 할 기세였다.
아카데미에서 기사 학부에 속해 검을 들어본 인생인데 이게 무엇인지 모를 리가.
"···!"
숨도 멈춘 채로 시선만 슬쩍 내리니 날카로운 단검과 피부가 드러나지 않게 가린 검은 손이 보인다.
두꺼운 손가락은 추정하건대 남자가 아닐까.
"비명을 지르면 입에 칼을 넣고 휘저어 주마."
누구인지 몰라도 성별도 구별이 되지 않는 이 목소리.
변조한 티가 팍팍 나는 기분 나쁜 음성은 분명 본인의 목소리가 아니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도 좋지는 않다는 걸 로버트의 머리로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 아이작?"
절대 아닌 걸 알면서도 간절한 희망을 담아 기다리던 친구의 이름을 불러본다.
"닥치고 말을 들어라. 허락 없이 질문을 하거나 고개를 돌리면 몸에 구멍을 하나씩 내주마. 눈을 가리지 않은 것만으로 내 자비는 끝이다."
"···."
감히 반항할 여력조차 생기지 않는 살기와 몸이 찌그러질 것 같은 기운.
어딘가 익숙하고 자시고 공포감에 머리가 멈춰버린다.
목에 있는 차가운 날붙이에 힘이 들어가는 감각을 느낀 로버트의 턱이 덜덜 떨려왔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 그럼 진짜 집으로 돌아갈 단서를 주마."
저택이나 영지도 아니고 '진짜' 집? 돌아가? 단서?
로버트 자신에게는 각별한 단어들에 공포감 위로 기대라는 감정이 부상한다.
"설마···."
"너만 특별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버려라."
자신의 뒤에 있는 인물은 도대체 누구길래.
어떻게 자신을 알고 찾아온 것인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수도 없이 많은 의문이 머리에 보글보글 차올랐다.
심장이 유례없을 만큼 쿵쿵 날뛰는 고조된 감정과 흥분!
하지만 그걸 억누를 만큼 커다란 문제가 있으니.
지금은 입을 열면 안 된다고 압박을 가해오는 살벌한 기운이 바로 뒤에 있지 않은가.
그저 직감.
한 번 죽음의 고비를 넘으며 익힌 감각.
'괴물·· 이 인간 괴물이다··.'
그때 자기 팔을 망가뜨리고 죽이려 했던 정신병자.
사지가 꺾이고도 죽지 않는 그 미친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괴물일지도 모른다.
딱! 딱! 딱! 소리를 내는 턱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알겠지."
탁!
그런 로버트의 앞에 던져져 바닥을 나뒹구는 익숙한 스크롤.
"어! 이거!"
스크롤에 있는 말로이 가문의 직인.
아이작이 가지고 있어야 할 마법진 스크롤이 자신을 납치한 다른 누군가의 손에 있다?
'설마 아이작한테 무슨 일이 났나···?'
차올랐던 희망이 덮이며 불길한 감정과 생각들이 머리를 뒤죽박죽 섞는다.
피잉!
동시에 날카로운 바람 불더니 밧줄이 잘리며 풀리고 로버트의 손발이 자유로워졌다.
밧줄이 깔끔하게 잘리는 사이 무엇이 지나갔는지 느끼지도 못했다.
"이건 거래가 아니다. 의문은 가지지 말고 죽기 싫으면 마나를 마법진에 사용해라."
"···아, 알겠습니다."
발로 등을 미는 감각에 선택지는 없으니.
아려오는 손목을 돌리며 로버트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스크롤을 펼쳤고.
울며 겨자 먹기로 마나를 끌어올리자 마법진이 빛을 뿜으며 발동하기 시작했다.
쩌적- 쩌저적!
마법진을 사용하자 떨어지는 차원의 파편.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광경이었다.
"내가 다시 접선할 때까지 수도를 벗어나지 말고 기다리도록."
어디에 있어도 찾을 수 있다는 뒷말을 듣고.
차원의 틈에서 누군가가 나타나는 걸 마주한 순간.
로버트의 의식은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