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2 - 두 번째 기사 -1-
'뭐든 차례가 중요하지.'
모험가 대다수가 돌머리에 배운 게 없다 하지만, 단순 토벌 같은 의뢰라도 일에는 순서가 있는 걸 알고 있다.
황실에서 보낸 의뢰에서 강조된 사항 첫 번째.
사건이 터질 전조가 보이면 동봉한 아티팩트를 사용해 망설임 없이 신호를 보낼 것.
쨍!
품에 있던 손톱만 한 구슬을 마나로 깨트리고 조각을 버렸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잔재를 발로 비벼 완전히 가루로 만들자 바람에 뿌연 가루가 휘날렸다.
황실의 의뢰서는 전에 없을 정도로 난잡하고 장황해 어이가 없고 당황스러웠으나.
이제 이해할 수 있다.
'···왜 그렇게 적었는지 알겠네.'
마치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내용은 비슷했고 예시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황실에 미래를 보는 누군가가 있는 게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될 정도.
아니면 저 성질머리 더러운 노인의 행보가 지금까지 반복적이고 단순하기 짝이 없거나.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후자겠지.'
저런 놈을 비대칭전력 중 하나라고 보듬고 품어야 하는 제국도 꼴이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뛰어난 인간성이 아니라 칼질을 잘하는 게 최고 가치로 존중받는 사회의 문제점일지도 모르고.
비단 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연방국도 위에는 용인족이 대다수니 개판인 건 마찬가지겠지.
"적당히 합시다. 퇴근 좀 하게."
일하는 인간에게 퇴근만큼 중대 사항이 있을까.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 이 늙은이의 몸뚱이까지 잡는 것이다.
손목을 잡힌 세드릭 플로이드는 마젤라에게서 시선을 돌려 나를 노려봤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다. 꼴을 보니 모험가인가?"
기사도 아니고 교단도 아닌데 동행하고 있는 태도.
주위에서 부르는 호칭이 있었으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소속은 뻔했다.
"모험가면 어쩌게?"
새파랗게 어린 녀석의 말투에 화를 넘어 황당함을 품은 4기사의 눈이 번쩍 뜨였고.
바로 옆에서 대화를 듣던 성녀와 마젤라도 대답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에 싸늘한 침묵이 도래했다.
사석도 아니고 제국을 대표하는 다양한 세력이 모여 지켜보는 공석.
나 또한 모험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상대가 예의를 보이지 않으면 내가 예의를 차릴 이유는 없다.
"···좋은 말 할 때 놓아라. 죽을 거다."
"곱게 황실로 가겠다고 약속하면 풀어주고."
자식의 부고.
교단의 심문.
세드릭 플로이드의 낮은 스트레스 내성.
그의 정신은 수도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한계에 도달해있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몸에서 불이 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
후끈한 기운으로 4기사의 주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 울렁거린다.
'황실이 강조한 사항 두 번째.'
교단과 분쟁이 일어날 징조가 보인다면 최선을 다해서 말려줄 것.
특히 중요한 인물은 성녀.
더해서 교단의 고위직 인물들이 있다면 피해가 가지 않도록 부탁한다는 조항이 두 번째.
마젤라가 찾아와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어도 내 행동은 지금과 같았을 것이다.
애초에 상황만 봐도 이건 당연한 결정.
성녀가 먼저 도발하거나 심기를 건드릴 확률이 없다고 판단한 황실은 교단과의 관계를 선택함과 동시에.
혹여 사건이 터진다는 가정하에 4기사를 문책할 거리를 잡으려 들었다.
쿠구구구-
둘의 기운이 부딪히며 대기를 덜덜 울리니.
오늘을 위해 동원된 기사들도 앞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뒷걸음치지 않는 게 최선인 살벌한 현장이 만들어졌고.
누가 먼저 주먹을 뻗어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가 조성되니 아트라가 움직였다.
"잠깐만요! 두 분 그만 하세요!"
"성녀님···!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둘을 말리기 위해 움직이려는 성녀를 마젤라가 안아 들었다.
뒤로 빠지며 현장에서 멀어지자 아트라가 마젤라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으나.
자신의 호위에게 성법술을 쓸 리 없는 그녀가 마젤라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마젤라! 놔요!"
"···절대 안 됩니다."
서로를 진짜 죽일 기세로 노려보고 있는 둘을 보고 애가 탄 아트라가 드물게 목소리에 힘을 줬다.
"저 진짜 화낼 거예요!"
"성녀님. 교단에 돌아가서 저를 징벌방에 넣으시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지금은 절대 안 됩니다!"
"···."
마젤라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모를리가 있나.
진심으로 징벌방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꺼내니 아트라는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대쪽 같은 말과 함께 도저히 양보할 기미가 안 보이는 마젤라의 목소리.
아트라는 항변하는 걸 포기했다.
그 모습을 본 마젤라가 주위를 보며 목청을 높였다.
"혹시 모르니 근처에 제국민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동행한 기사들에게 자리를 빠질 수 있는 합당한 업무를 부탁하고.
교단의 인원들까지 물린 마젤라는 안전하다 싶을 정도로 거리를 두고 백금의 모험가와 제국의 4기사의 대치를 지켜봤다.
*****
파고드는 손가락이 맹금류의 발톱을 연상시키고 손목을 잡은 악력은 짐승과 같이 범상치 않았다.
"그래··· 모험가 중에 이 정도 힘을 가졌으면서 얼굴을 모르는 놈이 딱 하나 있구나."
잡히는 소문으로 황실과 줄이 놓여있다는 그놈일 텐데.
저 젊음에 백금이라 하니 에클레어 드리트나와 비견할 정도일까.
그래봐야.
겉으로 보이는 신체는 완성형이라도 경력으로 보자면 4기사의 입장에선 새싹이나 다름없다.
"마지막이다. 놔라."
"성녀님 그만 괴롭히고 황실로 바로 가겠다고 약속하면 놔준다니까?"
4기사에게 시건방진 느낌을 주는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거구가 움직였고.
둔기라는 말이 어울리는 주먹이 휘둘렸다.
쩌억!
얼굴에서 핏물이 튀어 오르며 고개가 휙 넘어갔다.
마나가 담기지 않았으나 일반인이라면 골통이 가루가 되어 죽을힘이 담겨있다.
[ 유혈귀(流血鬼)가 발동합니다. ]
출혈에 스킬이 자동으로 돌아가며 4기사를 잡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모, 모험가님!!"
매번 나긋나긋하던 성녀가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를 냈다.
황실에서 강조한 세 번째는 절대 먼저 폭력을 휘두르지 말 것.
이 조항은 사건이 터진 후를 가정한 조항으로.
귀찮은 조항들이 곁다리로 붙어있긴 해도 혹여 피해를 보면 그만한 보상을 해주기로 약조가 되어있다.
'너구리··· 다 뱉을 준비해라···.'
황제를 뜯을 생각에 아려오는 통증도 잊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미친 것 봐라?"
몸을 그대로 날려버릴 힘에 맞고 고개가 넘어갔음에도 손목은 놓지 않는 상황.
세드릭 플로이드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주먹을 보고도 그냥 맞아···?'
날아오는 주먹을 보고 타이밍에 맞춰 고개를 돌리는 잔재주를 부리려는 것도 아니었다.
제대로 박힌 감각이 손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감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서 피할 생각 없이, 두려움 한 점 없이 주먹을 맞아?
더 없는 치욕.
더 없는 굴욕.
이 나이까지 오면서 단 한 번도 겪는 적 없는 상황에 4기사의 인상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주먹에 맞고 나서 더욱 강해진 악력이 찝찝함을 가중시키며.
분노로 억누르고 있던 자잘한 감정들이 살살 긁힌다.
뒤로 넘어가 있던 로만의 고개가 천천히 원위치하여 고개를 앞으로 기울이자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재능만 믿고 치기 어린 짓 하다가 목숨 ㅡ."
빠악!
"지랄하네."
딱딱한 부츠가 말을 하고 있는 4기사의 안면에 박혀 들었다.
코가 욱신욱신 아려오더니 바닥으로 핏방울이 떨어진다.
뚝. 뚝. 뚝.
제국을 대표하는 다섯 기사 중 하나라 하기에는 기실 추한 꼴.
그런데도 어쩐지 후련하기까지 하다.
얼마 만에 보는 본인의 피인가.
"하·· 하하!!"
입술이 찢어져 피를 흘리는 모험가와 주름 사이로 코피를 찔찔 흘리는 노기사.
둘은 그 상태로 서로를 마주보다 동시에 주먹을 뻗었다.
빠각!
쩍!
사람이 사람을 때린다고 믿기 힘든 둔탁한 소리.
난타가 이어질 때마다 서로의 눈앞이 번쩍번쩍한다.
맞는 순간 저항할 수 없는 힘에 하늘이 보이거나 바닥이 보이며 시선이 휙휙 돌아간다.
4기사가 보유한 난폭함은 끝도 없이 터져 나오는 분노.
기반이 그러하니 주먹질조차 단순했다.
단순함에 잔재주는 없이 순수한 근력만이 담겨 한 방 한 방이 묵직하니.
정면으로 맞는 것은 누가 봐도 미친 짓이나 다름없음이다.
그럼에도 이 놈은.
눈 밑이 찢어지고 입술이 터져 피를 줄줄 흘리면서 주먹을 피하지 않는다.
회피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모험가의 행동에 4기사도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이렇게 되면 자존심 싸움.
피하는 순간 지는 것이나 마찬가지.
제일 자신 있는 분야라 마나를 빼고 육체 능력만을 끌어올려 전력으로 후려치기를 반복했다.
··
··
"커헉!"
모험가의 발끝이 바짝 서서 명치를 찌르듯이 파고들었다.
날붙이에 비견해도 부족함이 없는 날카로움에 참지 못한 4기사가 숨을 토했고.
허리가 구부러질 것 같은 통증을 원동력 삼아 주먹을 올려 치자 백금의 몸이 들렸다가 떨어진다.
"아~ 빈말로라도 솜 주먹이라고는 못하겠네."
다 늙은 노인이 힘도 좋다며 킥킥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나더니 짐승처럼 재차 달려든다.
달려오던 몸을 공중으로 붕 던지더니 돌덩이같이 단단한 무릎을 그대로 4기사의 안면에 박아 넣는다.
으직!
"큽··!"
이번에는 플로이드의 거구가 핏물이 흩뿌려진 바닥을 뒹굴었다.
난타전이 이어지면서 이 놈은 점점 앞으로 밀고 들어오고 자신은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상황.
시간이 지날수록.
주고받는 타격이 늘어날수록.
밀리고 있다.
열세가 스멀스멀 몸에 감겨온다.
놈은 인제야 예열이 끝났다는 양 힘과 속도를 점진적으로 높이기 시작했다.
'···밀린다고?'
세드릭 플로이드는 자신이 순수한 주먹다짐에서 밀리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어린놈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이건 재능이 출중한 천재라는 느낌이 아니다.
반대로 경험의 집대성.
주름 하나 없는 얼굴을 가지고 도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마나가 없는 야만적인 개싸움임에도.
어지간한 전장은 미지근하게 느끼게 하는 화끈함을 준다.
"죽여주마-!!!"
속에 응어리진 감정이 깨지며 응축되어 있던 분노가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정신이 새하얗게 변하니 이제 수도에 뭘 하러 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장난질은 그만두고 이 미친놈을 힘으로 찍어누르고 싶다.
화르륵!
불길과 같은 붉은 오러가 맥동하며 4기사의 손에 맺혔고.
파지지직-!
그걸 확인한 모험가의 주먹에서도 검붉은 번개가 튀어 올랐다.
성녀가 급하게 성법술을 준비하는 도중.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까지."
콰아앙!
4기사와 로만의 사이로 사람 하나가 유성처럼 바닥에 내리꽂혔다.
허공에서 떨어진 남자는 황금색으로 물결치는 창으로 4기사의 복부를 후려쳐 무릎을 꿇렸다.
"끄윽!"
"신호를 받고 바로 뛰어왔는데··· 아슬아슬했군. 세드릭- 네놈은 그 나이를 먹어도 발전이 없구나."
황금창을 어깨에 올리고 한숨을 내쉬며 콧수염을 만지는 남자가 누구인지 만난 적은 없어도 알 수 있다.
벨크 아마란스 공작.
제국의 두 번째 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