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1 - 네 번째 기사 -2-
기사의 최고 가치는 고결한 기사도라 말하는 자도 있으나.
피 튀기고 걸음마다 시체가 걸리는 전장을 모르는 웃기는 소리.
예리함을 담아 내려오는 날붙이는 고결한 정신과 목소리에 멈추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강한 게 답이고 상대의 머리를 날리는 게 진리다.
그 한 가지.
단순히 그 한 가지를 제국에서 손에 꼽히게 잘하기에 자신은 이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4기사라는 자리까지 얻으면서 어깨를 펴고 다닌 자신이 제국 안에서 목줄 달린 개 마냥 이리 부자유스럽기는 처음이었다.
입맛이 뚝 떨어지는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생각하기를.
확실히.
'이건 아니다!!'
상황이 이렇고 황명이라 해도 이런 거지 같은 대우를 받을 자신이 아니었다.
····
과거 연방국에서 온 사신을 홧김에 죽이고 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백작에서 작위를 강등당하는 유례없는 불명예를 가문에 아로새겼더라도.
확고부동한 지지를 받으며 세드릭 플로이드가 가주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자작이라 불려도 가문의 위세는 그로 인해 어느 때보다 강해졌으니 가문의 누구도 그를 손가락질 하지 못했다.
지탄을 하는 순간 목이 달아난다는 걸 알기에 입을 다문 인물도 분명 존재했겠지만.
그는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하여 멈추지 않고 밀고 나갔다.
외부에서 가문을 깎아내리거나 잡음이 나오면 도끼 한 자루를 들고 직접 나선다.
명예를 건 대결로 몇몇 귀족을 쓸어내며 본보기를 보여주니 언젠가부터 헛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백작위를 잃고 자작이라는 작위를 달고 있음에도 누구에게 굽신거릴 필요가 없었다.
늘 그런 식.
현 4기사라 불리는 세드릭 플로이드의 일생은 매 순간이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었다.
그렇게 살아도 막힘이 없었기에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니.
자신의 존재를 정립하여 오러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순간에도 본인에게 가지는 확고한 믿음이 열쇠가 되었다.
'나는 뭘 해도 된다!'
인생은 모든 게 순탄대로.
군마가 드넓은 초원을 내달리듯 거친 뜀박질로 빠르게 내달리는 인생.
전장이든 침상이든 어디선가 삶의 끝을 볼 때까지 그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재앙은 방문을 예고하지 않는 불친절한 손님.
세드릭 플로이드는 생에 처음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부정의 늪에 잠겼다.
최고의 기사라는 아센 프리밀러를 만났을 때도 이리 길을 잃는 충격은 아니었다.
"레오··· 레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날아든 아들의 부고.
생에 두 번은 없을 충격을 받은 그는 처음으로 정신적 충격에 의한 현기증과 무력감을 느꼈다.
악마로 타락해서 퇴치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며칠을 멍하니 앉아 부정을 반복했다.
그러다 현실을 직시하니 눈이 돌아가 분노했으나.
이 분노를 풀 곳은 없었으니 속에 단단한 응어리가 진 상태.
주체하지 못해 분노를 터트렸는데 풀 수 있는 대상이 눈앞에 없다는 이유로 속에 부글거리는 화를 품은 채 머리만 강제로 식어버렸다.
'어디에 이 분노를 표출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는 아들이 타락한 게 사실이라면 뱀과 같은 혀로 꼬드긴 간악한 흑마법사들인가?
숨어있는 쓰레기들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복수는 막막하기만 하다.
거기에.
그의 성질에 마른 장작을 집어넣는 요소는 바로 눈앞에도 있었으니.
'망할 놈들···.'
자식의 시신조차 부검한다며 돌려주지 않은 채.
제국의 조사관들과 손을 잡아 영지를 마구잡이로 뒤엎고 다니는 교단도 보고 있으면 열이 오르는 건 마찬가지.
자식을 잃은 슬픔을 느낄 새도 주지 않는 그들의 행동은 눈엣가시 그 자체였고.
악의 절멸이니 뭐니 황실의 후광까지 등에 업더니 기세등등하게 여기저기를 들추고 다니니 보고만 있어도 살심이 치고 올라온다.
이 감정을 뭉치고 정제시켜 분노의 덩어리를 가슴에 만들었다.
명확한 복수의 대상을 찾고 아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
수도에 입성하자 보이는 교단의 인물들을 보니 또 열이 올라온다.
해결되지 않는 분노라는 용암을 속에 계속해서 품고 다닌 그는 속에서 울렁거림을 느끼기 시작했다.
'···레오의 명복이 먼저다.'
외적으로는 어떤 거창한 명목이 붙더라도 속으로는 아들의 명복만을 빌 뿐이다.
*****
"제국의 네 번째 기사 세드릭 플로이드 자작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나 화났다.'라는 큼직한 감정의 덩어리를 굴리며 움직이는 남자의 외형이 눈에 잡힌다.
이마가 드러나게 넘긴 붉은 머리에서 이어지는 야성적인 턱수염은 붉은 갈기를 가진 한 마리의 사자 같았으며.
거대한 덩치는 나를 아카데미에 꽂아 넣은 로랜드 볼프강 그 할아범을 연상시켰다.
나이를 속이지 못하는 주름진 얼굴과 다르게 근육으로 덩어리진 몸과 솥뚜껑만 한 주먹이 인상적이다.
묵직한 갑옷이 어울리는 몸뚱이로 제국의 지배자님을 알현하기 위해 치렁치렁하게 장식된 복장을 하고 있으니 내 눈에는 더없이 우스운 그림이라.
자리에 도착한 세드릭 플로이드의 시선은 제일 먼저 나에게 향했다.
눈을 피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심드렁하게 보고 있으니 그것만으로 화가 난 얼굴.
'저래서 어떻게 살지?'
에클레어에게 어떤 인물인지 듣긴 했지만.
저리 하나하나에 과민반응을 하면서 화병으로 안 죽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용하다.
그만큼 지금까지 자기 멋대로 살아도 문제가 없었다는 방증일 터.
자식은 쥐뿔도 없으면서 오만하고 아비는 자기 시선을 받고 눈을 안 피한다고 화를 내는 미친 인간.
황실에서 온 의뢰서가 왜 그런 꼬락서니였는지 확실하게 이해했다.
말 한마디 없는 살벌한 교착 상태가 길어지니 성녀가 사이를 막으며 고개를 숙인다.
"기사님.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
성녀가 예의를 차려 인사를 건네도 4기사는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꾹 닫은 채 목만 까딱 움직이고 침묵을 유지한다.
'나이를 저만큼 처먹고 잘하는 짓이다···.'
남자는 나이를 먹어도 애라고 하지만 저건 또 다른 경우였다.
미래에 저렇게는 늙지 말아야지 라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훌륭한 반면교사.
그 태도에 교단의 인물들이 험악한 표정을 그렸으나.
당사자인 성녀는 이 상황이 이제 익숙한 듯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업무에 들어가자 웃음을 지운 진지한 표정으로 성녀가 앞장서고 뒤를 나와 마젤라가 붙어서 이동한다.
척! 척! 척! 척!
규율에서 자유로운 몇몇을 제외하고 기사들과 교단의 인물들이 제식을 딱딱 맞춰 이동하니 제법 그림이 산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수도에 있는 교단에서 멀지 않은 곳.
"들어가겠습니다."
경비대와 교단의 인물이 지키고 있는 골목을 파고들자 과거 부랑자로 붐볐던 골목은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수습되지 않은 잔해들과 까맣게 변해버린 핏자국이 군데군데 남아있는데.
피 칠갑을 한 손으로 벽을 벅벅 긁은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이 자리에서 일어난 잔혹한 사건과 처절함을 보여주는 메시지.
"아직 드물게 언데드가 발생하는 구역인지라 교단에서 관리하는 중입니다."
악마에게 죽은 시신이 한 곳에 쌓이면서 대지가 부정함에 물든 것이라 시간 외에는 답이 없다고 한다.
"···."
4기사는 무심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성녀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유달리 잔해가 많이 남아있고 검게 굳은 핏물이 낭자한 자리에 도착하자 모두의 걸음이 멈췄다.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성녀의 신성력이 허공에서 찬란한 꽃의 형상을 만들더니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꽃잎이 흩날리며 장관을 만들었다.
-이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여신님에게 간청하나이다. 신성한 빛으로 어둠에 빠진 자들을 건져 주시고, 여신님의 품 안에서 평화와 안식을 찾아 무한한 연민으로 그들의 고통이 잊혀지기를 기도합니다.
교단의 인물들은 눈을 감고 손을 모아 자리를 지켰으며.
기사들은 그 신성한 기운에 자기도 모르게 양손을 모아 꽃잎이 휘날리는 걸 지켜보았다.
-악에 끌려간 죄 없는 자들에 대한 자비를 요청하나니, 은혜의 빛이 우리 모두에게 영원히 비치기를 바랍니다. 여신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저희를 인도하여 악에 맞서게 하시고 죄 없는 자들을 위해로부터 지키게 하소서···.
"묵념을 올리겠습니다."
성녀의 주도로 이어지는 침묵.
짧은 묵념이 끝나고 모두가 고개를 든다.
의식이 끝나자 세드릭 플로이드가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성녀님. 제 아들··· 기사 레오 플로이드의 마지막은 어땠습니까?"
"···."
애지중지 부둥켜안고 키워온 아비로서 듣고 싶은 말은 분명히 있겠지.
실낱 같은 희망으로 억울해 보였다거나, 자신의 뜻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거나···.
그렇다고 해도.
성녀의 입장상 악마로 타락한 자의 최후를 빈말로라도 명예롭다거나 용맹하고 헌신적이었다는 입에 발린 말을 입에 담을 수 없다.
지금까지 명복을 빌어온 모든 희생자를 모욕하는 짓이라.
"말씀해 주십시오."
"···."
허나 아트라도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픈 얼굴은 알고 있다.
자식을 잃은 아비의 면전에, 당신이 키운 아들의 최후는 악에 물든 추악한 모습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아트라의 마음은 정이 없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는 성녀에게 한 걸음 다가오는 세드릭 플로이드의 앞에 마젤라가 끼어들었다.
"기사님.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앞을 막는 마젤라를 본 4기사의 붉은 머리가 일렁이는 화염처럼 흔들렸다.
"내가 무얼 했다고 감히 길을 막지? 이 몸이 성녀님에게 해라도 끼칠 거라 생각하는 건가?"
강대한 기운에 눌린 마젤라가 숨을 멈추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4기사가 마젤라를 밀어내려 손을 뻗는다.
'일할 시간이구나.'
지켜보고 있으니 조용히 넘어가긴 글렀다는 느낌.
의뢰서에 적힌 대로 움직여 4기사의 손목을 잡았다.
성격 더러운 노인네를 잡는 건 실로 최악의 기분이라 토가 쏠린다.
"적당히 합시다. 퇴근 좀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