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0 - 네 번째 기사 -1-
해가 어둠에 눌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른 새벽.
창문에는 뿌연 습기가 방울방울 매달려 하늘로 돌아가기 위해 따사로운 햇볕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시간에.
저택의 거실에는 불이 들어와 밝은 빛을 밖으로 뿜어내며.
안에서는 덜그럭거리는 식기 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시간에 먹는 끼니는 야식이라 하기에는 늦어도 너무 늦고.
아침 식사라 하기에는 이르지만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아침 식사에 더 가까울 것이다.
"로만. 이것도 챙겨 먹어라."
"···저는 그만 챙기고 기사님 드시죠."
"나는 잘 먹고 있다."
"이제 한 입 먹었으면서··· 기사님. 아~ 하세요."
이렇게 둘이 끼니를 해결하면 에클레어는 옆에 딱 달라붙어 내 식사를 챙긴다.
음식이 식을 때까지 나를 챙기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그녀의 입에 내가 음식을 밀어 넣어야 이 자리는 어떻게든 끝난다.
침실에 곤히 잠들어 있는 리케와 클로에를 두고 이른 시간에 나온 우리는 오늘 각자의 의뢰와 업무를 힘내기 위해 배를 채웠다.
나야 아직 시간 여유가 있어 더 자도 상관없지만.
이런 자리를 가진 까닭은 단순하다.
저택 안에 이렇게 사람이 있는데 끼니는 같이 먹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
"애도 아니고··! 내가 먹겠다··."
숟가락을 들이미니 에클레어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슬쩍 돌린다.
리케와 클로에는 좋다고 받아먹어도 그녀는 한 번 더 권해야 넘어온다.
"나 팔 떨어진다? 백금이 팔 없으면 오늘 의뢰는 어떻게 하나~"
"정말··· 알겠으니 그만해라."
극성에 가까운 호들갑을 떨면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내가 주는 음식을 어쩔 수 없다는 양 받아먹는다.
나중에 리케와 클로에가 일어나면 지금과 반대로 둘이 내 입에 음식을 마구 쑤셔 넣을 것이다.
이처럼 드물게 나 혼자 아침 식사를 두 번 할 때가 있는데.
에클레어가 해가 뜨기도 전 새벽에 출근하는 날처럼.
누군가 혼자 움직여야 한다면 그 시간에 내가 일어나 같이 식사를 한다.
애초에 큼직한 위장을 가진 나에게.
아침을 두 번 먹는 정도는 억지스럽거나 부담이 가는 행동이 아니다.
모든 준비를 끝낸 뒤.
제복 차림으로 현관에 선 에클레어는 짧게 입을 맞추고 내 손을 잡았다.
"로만. 잘 부탁하마."
"걱정하지 마. 딱 의뢰 내용대로만 할게."
황실에서 보낸 의뢰서에는 4기사를 분석하는 학자들이라도 대거 참여했는지.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명시해뒀다.
정도가 과하다 느낄 정도로 예시가 많은 이유야 4기사가 그만큼 어디로 튈지 모르고 사고를 밥 먹듯이 치고 다니는 인물이라는 명확한 증거.
'그래봤자지.'
내가 모험가로서 의뢰로 밥 먹고 살아온 짬이 있다.
당연히 방심은 금지. 하지만 이런 일은 정해진 규율대로 움직이면 피를 봐도 후에 탈 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너무 늦는다 싶으면 저녁은 먼저 먹어라. 오늘은 늦을지도 모르니."
"다녀와."
긍정을 표하고 손을 흔들어준다.
그녀는 밝게 웃더니 다시 돌아와 촉촉한 입술로 내 볼에 부드러운 감각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다녀오마."
'진짜 귀엽다니까.'
아침을 같이 먹고 배웅하는 이유는 저 웃음을 보려는 게 제일 크다.
에클레어가 절도 있는 걸음으로 저택을 나서는 모습을 창문으로 지켜보다 뒤를 돌아보는 그녀에게 손을 재차 흔들어 인사를 건넨 뒤.
침실에 잠들어 있는 둘이 아카데미에 가기 전까지 안아주기 위해.
따뜻하게 온기가 감돌고 있는 침실로 돌아갔다.
*****
쨍하게 해가 떠 있는 시간.
앞으로 일어날 의뢰가 어떨지는 몰라도 날씨는 기가 막힌다.
모험가 의뢰라는 마음가짐과 감각을 살리기 위해 수도의 길거리에서 마른 과일과 육포를 씹으며 지정된 장소로 향했다.
기사들과 교단의 사제들이 모여있으니 제국민들은 호기심을 가지면서도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지 않는다.
'따로 통제는 안 하나?'
내 얼굴을 알고 있는 기사들을 지나쳐 웅성거리는 집단을 파고드니.
교단의 인원 중에서도 유난히 성스러운 기운을 뿜어내는 여인이 있다.
먼저 눈이 마주친 보좌와 눈인사를 끝내고 다가가니 하늘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고.
적의 한 점 없이 맑은 시선에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성녀님. 이렇게 또 뵙습니다."
모험가 길드에서 만났을 때보다는 혈색이 좋아도 피곤함이 완전히 가지 않은 얼굴.
저런 상태로 자진해서 명복을 비는 자리에 나오는 그녀의 정신은 높이 살만했다.
"로만 형제님! 오늘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로사리오가 감겨있는 양손을 모아 교단식으로 인사 해오는 성녀를 보고 나 또한 양손을 모아 인사를 어설프게 따라 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어디를 가도 그 집단만이 가진 인사법을 따라 해주면 호감 요소는 된다.
전생에도 코 큰 놈들이 한국에서 어설픈 발음으로 '안녕하세요.' 만 해도 다들 기뻐하는 것처럼.
이건 상대의 집단을 존중한다는 걸 보여주는 제일 쉬운 행동이자.
존중과 이해를 하고 있다는 제스처로 상대의 영역에 부드럽게 발을 넣는 행위다.
주위의 반응을 보니 역시 무난하게 좋은 수.
"저번에 도움을 주신 덕에 방황을 끝낸 듯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기도실에서 마주한 클로에를 생각해낸 아트라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도움을 드린 게 아니랍니다. 신실한 기도에는 언젠가 답이 내려오는 법이니··· 기도실을 함께 찾아주신 형제님의 인애가 여신님께 들린지도 모를 일이지요."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거창한 신성력을 뽐내지 않아도.
오늘따라 평온한 목소리에서 논리를 무시하는 대단한 호소력이 느껴진다.
'이게 진짜배기 종교인인가?'
대륙을 떠돌며 얼마나 많은 신도를 만들었을지···.
교단의 성장과 미래는 그녀의 행보에 걸려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럼··· 일이 시작되면 뵙겠습니다."
제국의 기사들이 한 무리.
경건한 교단이 한 무리.
자유로운 모험가는 나 하나.
다들 서서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바닥에 천을 깔고 편하게 앉아있다.
얼른 와서 일이나 끝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품이나 쩍쩍하며 앉아 있으니 그냥 바닥에 눕고 싶은 기분이 든다.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다는 걸 느끼며 앉아있지 말고 진짜 누워서 쉬고 있을까 고민하는 찰나.
절그럭거리는 금속음을 내며 한 인물이 다가왔다.
"모험가님."
성녀의 호위로 매번 붙어있는 거대한 여성이 옆으로 다가와 그림자를 만들었다.
"예?"
교단의 인물들에게 보호받는 성녀를 확인한 마젤라는 목소리를 낮추고 예를 갖췄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괜찮으신지요?"
"물론입니다. 앉으시겠습니까?"
실례하겠다며 묵직한 갑옷을 추스르며 주저앉는다.
모험가가 교단의 인사를 보이며 예를 갖춘 것과 같이 마젤라 또한 마찬가지.
백금을 계속해서 내려다보며 대화를 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바닥에 깔린 천에 자리를 잡았다.
'근데 이런 넓은 천을 어디서···?'
순간 사소한 의문이 들었으나.
마젤라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여 목을 가다듬은 뒤 말문을 열었다.
"모험가님. 본론을 바로 꺼내는 것도 죄송한 일이고 이건 만약의 일이라 입에 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일이나. 4기사님과 교단 사이에 다툼이라도 일어난다면···."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내뱉지 못하는 호위를 보며 나는 다리를 쭉 펴고 더 편한 자세를 취했다.
"거리낄 게 있습니까? 편하게 말씀하시죠."
"···부끄러운 말씀을 드리자면, 저의 수련이 미진하고 부족하여 성녀님을 안전하게 지켜낼 자신이 없습니다."
교단이 4기사와 그 줄이 이어진 영지를 들쑤신 것은 알고 있다.
그것 때문에 기분이 나쁜 건지 자식을 잃어서 그런지 몰라도 성녀의 호위가 봤을 때.
4기사의 현 상황이 그 정도로 심각하게 느껴졌나 보다.
"그렇다 해도 성녀님의 힘이라면 안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성법술에는 방어적인 수단도 있으니 기습을 당하지 않는 이상 4기사도 맨몸으로 그녀를 어떻게 하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장비가 없더라도 어지간한 기사들은 비교가 의미 없을 정도로 강하겠지.
허나 빈손으로는 성녀를 어떻게 못 할 확률이 지대하다.
내 의견에 시선을 내려 고민하던 마젤라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고가 터질 경우에 성녀님은 성법술을 다른 쪽으로 전개할 방향이 크다 여기고 있습니다. 여긴 무관한 제국민이 가득한 수도의 한복판이니 분명 그럴 겁니다."
"흐음···."
침음을 흘리며 의뢰 내용을 되짚어보고 있으니 그녀는 내용이 부족하다 느꼈는지 한마디를 더 올렸다.
"이건 오랜 시간 옆에서 지켜봐 온 저의 직감이며. 저도 그 덕에 살아남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뻔하게 예상가는 내용이라도 확신은 없어 되물었다.
··
··
에클레어와 갔던 림노에서 썰어죽인 그 반역자가 4기사의 생도 시절 라이벌이라 했던가.
얼마나 강할까.
기대를 담아 기다리던 나는 펼쳐뒀던 천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다.'
멀리서 본신의 기세를 숨기지 않는 누군가가 다가온다.
성녀는 그러려니 한 평온한 얼굴이라도 마젤라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눈가를 찌푸렸다.
4기사는 기분이 썩 좋지 않은지 투기를 풀풀 풍기는 태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저걸 보면 입장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법 하는데?'
느껴지는 감상은 그랬다.
저게 자신감인지 천성인지 모르나, 본인의 실력을 억누르거나 숨기려 들지 않아 더 투명하게 파악된다.
자식을 생각해보면 호부견자 그 자체에 림노의 반역자가 라이벌이라는 건 타칭이 아니라 자칭 라이벌 아니었나 싶을 정도.
생사결이야 힘이 전부도 아니고 겨뤄봐야 알겠으나.
전체적인 기량은 그 남자보다 확실하게 강하다는 감각.
기사 하나가 교단의 무리에게 다가와 이미 파악하고 있는 사실을 재차 알렸다.
"제국의 네 번째 기사 세드릭 플로이드 자작님이 도착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