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7 - 기도를 찾은 소녀
"프레이(Pray)"
클로에의 목소리에 꽃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손 위에서 찰랑이는 한 줌의 액체에서 일어날 현상에 대해 클로에는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것을 쏟아내듯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니 무구의 손잡이가 생겨났다.
폼멜부터 크로스 가드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칠흑과 같은 금속.
'거, 검은색?!'
빛을 집어삼키는 어두운 색상은 자신의 연인이 생각나 기쁘면서도 언니의 이노센스와 비교하면 정반대라 묘한 기분이었다.
한 소녀만을 위한 검의 탄생은 이어진다.
빛이 타고 흐르면서 베일만큼 날카로운 날이 아래로 뻗어나간다.
마지막으로 단단함이 느껴지는 검에 은은한 황금색으로 무늬가 아로새겨지니.
경계선이 없는 독특한 형태의 검이 탄생했다.
전체가 하나.
이 무구는 평범한 검과 달리 조립된 형식이 아니다.
전체가 미지의 금속 하나로 붙어있으니.
실력 좋은 조각가들이 순도 높은 흑요석 덩어리에 달려들어 검의 형상으로 깎아 낸 예술품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다.
'신기해··!'
클로에의 머리에 프레이의 정보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검집이 없음에도 날이 상할 걱정이 없고 손상되어도 마나를 사용하면 다시 수복할 것이다.
착!
공중에 떠 있는 검을 잡는 순간 손바닥에 달라붙듯 감겨온다.
그립을 끈이나 가죽으로 보강하지 않았음에도 이때까지 잡아본 어떤 검보다 편하다.
지금껏 사용해왔던 롱소드 보다 길면서 검폭이 넓은 양날검의 형상.
대검이라 불러도 문제가 없을 크기는 어두운 색상과 함께 대단한 위압감을 내재하고 있었고.
클로에의 입장에서는 분명 처음 다뤄보는 검인데. 한평생 이 날붙이를 사용해 온 감각을 선사한다.
피잉!
휘둘러보니 무게도 이 이상이 없을 정도로 딱 좋았다.
바람을 여유롭게 가르는 적당한 묵직함.
자신만을 위해 맞춤으로 제작된 사양이라는 게 느껴진다.
'···이건 뜻이 있는 걸까?'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황금빛이 나는 무늬를 쓸어내리니 머리로 정보가 쏟아진다.
함부로 재단하지 말지어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그대들의 몫이 아니다.
감히 누가 흰 것은 옳고 까만 것은 그르다 장담하였는가.
'···!!'
이 은은한 각인이 뜻하는 바가 명확하게 느껴진다.
칠흑과 같은 어둠을 간직하고 있음에도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지니 이 검에 누가 감히 불길함을 입에 담겠는가.
소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당장 이 소식을 저택의 가족들에게 나누기 위해 방을 나섰다.
덜컥.
클로에가 환희와 기쁨에 물들어 나오자 로만이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품에 안기니 커다란 손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는다.
그 따뜻한 온기와 감각에 클로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에 대한 고민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자기만의 무구를 찾은 이 상황 자체가 꿈이 아닌가 싶었으나.
연인의 손길과 살내음을 통해 현실을 실감한다.
프레이라는 자신만의 무기가 생긴 건 결코 허상이나 꿈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고생했어. 마음에 들어?"
"네에··! 정말 감사해요···."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아래로 내려와 엉덩이를 토닥이자.
말랑하게 풀린 얼굴로 배시시 웃은 그녀는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에클레어가 오면 깜짝 놀라겠네."
동생의 성장을 체감한다면 에클레어는 누구보다 기뻐하지 않을까.
"언니가 오기 전에 리케에게도 미리 말해야겠어요!"
로만의 품을 독차지하여 어리광을 부리던 클로에는 고개를 들어 저택에 있을 한 명을 찾아 시선을 움직였다.
"여기 있어. 축하해."
리케가 헐렁한 옷차림으로 침실에서 걸어 나와 양팔을 벌리자 클로에가 스스럼없이 리케를 껴안았다.
"고마워요··!"
로만은 둘이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는 걸 보고 있으니 실로 바람직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좋네!'
남자들끼리 껴안는다 생각하면 아무리 잘생겨도 토악질이 나오는데 내 여자들끼리 껴안는 건 왜 보기만 해도 좋을까.
침실에서 다 같이 문란한 시간을 몇 번 가지면서 리케가 드리트나 자매에게 해온 야릇한 행동들이 있기 때문인지.
드리트나 자매의 사이는 일상에서도 손을 잡고 다닐 만큼 더 끈끈해진 건 물론이고.
그 자매가 리케에게도 허물없이 붙어 있곤 했다.
"언니가 제일 기뻐할꺼야."
"헤헤~ 그랬으면 좋겠어요."
클로에를 안고 있는 리케가 눈을 마주치자 야릇한 눈웃음을 지으며 혀를 살짝 내민다.
'···오늘은 오랜만에 다 같이 할까.'
최근에는 한 명씩 돌아가며 상대하고 잠은 다같이 잤으나 저 모습을 보니 로만의 속에 불이 붙었다.
··
··
이 저택에서 가장 빠르게 나가고 제일 늦게 돌아오는 건 아주 높은 확률로 에클레어였다.
해가 떨어지자 리케와 클로에는 창문에 붙어 그녀가 오는 것을 기다렸고.
멀리서 그녀가 오는 게 보이자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자신을 마중 나온 셋을 보고 웃던 에클레어는 클로에의 말에 흥미로운 듯 고개를 주억였다.
"클로에가 보여줄 게 있다니. 기대되는구나."
제복을 벗지도 않고 마당으로 이동한 그녀는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피곤하실 텐데 죄송해요··."
"아니. 오늘 하루 검을 뽑지 못했으니 몸이 굳지 않게 움직여주려 했다."
에클레어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속에 있는 고민을 덜어낸 동생의 얼굴은 업무로 받은 정신적 과로를 한 번에 날릴만큼 귀여웠으니.
그걸 느끼는 건 자신만이 아닌지 로만과 리케도 한쪽에 자리를 잡아 흐뭇한 얼굴로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후우우···."
클로에가 숨을 한번 내쉬고 손에 쥐고 있는 브로치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철컥-
클로에의 몸을 감싸는 검은 갑주.
새카만 투구 사이로 삐져나오는 푸른 안광.
하지만 손은 허전하니 비어있었다.
대련을 할 때는 사용하지 않았던 아티팩트까지 사용하며 준비하는 클로에를 보고 에클레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프레이(Pray)."
지잉!
클로에의 비어있던 손에 황금색 문양이 새겨지더니 그걸 쥔 손에는 어느새 거대한 검이 들려있다.
등에 걸고 다녀도 땅에 닿을 것 같은 새까만 양날검을 든 그녀가 자세를 잡는다.
그와 동시에.
이 자리에서 클로에의 검을 본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닮았다!'
외형은 전혀 다르나 풍기는 기운이 에클레어가 보유한 검과 닮았다.
"···가겠습니다."
투구 안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에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지 오거라."
허락이 떨어지는 동시에 클로에의 몸이 움직였다.
탁!
중갑임에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
허리에 있는 검을 뽑을까 하던 에클레어는 벨트에 걸려있던 검을 로만에게 던져두고 손을 뻗었다.
"이노센스(Innocence)."
그녀의 손에 순백의 입자가 모여들어 형상을 빠르게 만들어낸다.
카앙!
검을 막아낸 에클레어가 클로에의 묵직한 공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어지는 깔끔한 검법에 그녀의 마음이 들뜬다.
"훌륭하구나!"
클로에가 에클레어의 실력을 믿기에.
손속에 망설임을 버리고 전력이 제대로 표출된다.
째쟁!
클로에의 재빠른 연격을 막아낸 에클레어가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입을 우물거렸다.
'저 검의 힘인가?'
칠흑 같은 검과 부딪힐 때마다 이노센스가 공명하고 있다.
클로에와 무언가가 연결되는 것 같다고 해야 할지··· 설명하기 힘든 감각이 순간순간 느껴진다.
위험하거나 부정한 느낌은 아니지만, 어딘가 간질간질하니 진지한 분위기가 자꾸 무너지려 한다.
새로 얻은 검의 능력이라 하기에는 클로에도 기묘한 감각에 휩싸이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1분 정도 합을 받아주던 에클레어가 이노센스를 내리자 클로에도 덤벼드는 걸 멈췄다.
"아무래도 스킬이나 검의 효과는 아닌가 보구나. 저 둘도 무슨 일인지 모르는 것 같고."
투구를 슬쩍 움직여 로만과 리케를 본 클로에가 긍정을 표했다.
"네에···."
어딘가 아쉬워 보이는 클로에를 보며 에클레어는 느낀 바를 솔직하게 전했다.
"짧은 합이라도 클로에의 성장이 어느 정도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훌륭한 무구를 떠나 드리트나 검법에 대한 진보가 눈부시구나."
"···!"
에클레어의 진심 어린 칭찬에 푸른 안광이 흔들렸다.
"클로에도 곧 자신만의 검법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내가 장담하마."
"가, 감사합니다··!"
단순히 자매라고 건넨 입에 발린 칭찬이 아니었다.
클로에도 그걸 알기에 앞으로 더욱 힘 낼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고.
"그리고 이 감각은···."
"!!!"
이노센스로 사자심의 기운을 끌어올리자 클로에의 검이 덜덜 떨려온다.
'무언가가 있군.'
클로에도 그걸 느꼈는지 자신의 검에 일어난 변화를 주시했다.
자신과 같이 검으로 얻은 힘이 클로에에게도 존재할 것이다.
그게 원인이라면.
"검법과는 완전히 다른 부분이니 클로에의 능력이 손에 익으면 같이 확인을 해봐야겠구나."
"네에!"
이노센스를 돌려보내자 그걸 보고 아직은 미숙한 느낌을 풍기며 클로에도 검을 돌려보냈다.
*****
오늘 저택을 떠들썩하게 하는 대화의 주제이자 주인공은 당연하게 클로에.
저녁 식사를 하며 함께 축하하고 클로에의 검과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후로는 각자 할 일을 끝낸 뒤 침실로 모이는 게 저택의 일상.
똑. 똑.
침실에 가기 전에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던 로만의 방문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문이 열리자 편한 옷을 입고 포니테일을 풀어낸 에클레어가 방에 발을 들였다.
"로만."
처음에는 실례한다며 어색해하던 에클레어도 이제는 편하게 들어와 방문을 닫는다.
"키티~ 일단 이리 와."
둘만 있을 때 부르는 이름을 꺼내자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성큼성큼 다가온다.
입을 짧게 맞추고 안아주자 에클레어는 눈을 감고 부드러운 볼을 내게 붙였다.
"···좋구나."
"일 하느라 고생했어."
무슨 연유로 방에 왔는지 본론을 꺼내기 전에 제대로 하지 못한 인사가 먼저.
사실 대단한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좋지.'
내 여자들이 내 방에 들락날락하는 것이야 일상이자 행복이니.
에클레어는 내 얼굴을 붙잡아 진하게 입을 맞추고 나서야 이야기를 꺼냈다.
"클로에의 일도 감사하고 싶고··· 다른 이야기도 있으니 들어줄 수 있나?"